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243)
흑백무제 1248화(1243/1255)
1248화. 붕괴의 시작 (3)
“…….”
조양진인의 눈이 깊어졌다.
안색은 하얗게 질리고 입술까지 파래졌지만, 그의 눈빛은 무당을 나섰을 때보다 훨씬 더 짙어져 있었다.
“잡히지 않소.”
조양진인의 말에 기천웅과 찰극평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사천에 들어오긴 했는데…… 서서히 옅어지더니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어. 또다시 술법인가?”
서쪽으로 길을 잡은 것은 정답이었다. 그들은 다시금 혈존대사의 지독한 마기를 느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곳, 사천 동남 부근까지 접근하니 또 마기가 스러져 버렸다. 추적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기천웅의 눈이 깊어졌다.
“무당파 최고위 술법과 비슷한 류의 공부를 구사하고 있다면, 놈의 힘이 강대해지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나.”
“그건 아닐 것이오.”
조양진인의 말은 단정적이었다.
“이곳까지 오며 그자의 마기가 분산되어 감을 느꼈소. 호위들을 마기로 중독시킨 것이 분명하오. 그렇다면 외려 힘이 약해졌을 가능성이 있소.”
“하면 지금 이 상황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나로서도 알 수 없소.”
조양진인은 크게 무리하고 있었다.
몸 상태 자체가 그러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원정을 소모하고 있는지라, 무언가에 집중하는 것이 힘들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조양진인은 끊임없이 기감을 날 세우고 있었다. 그러한 행위 자체가 목숨을 깎아 먹는 것인데도 그러했다.
아직도 죽지 않은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일단은 남부로 가 봅시다. 사천당가의 눈치를 볼 테니, 남부를 가로질러 서부로 타고 올라갈 확률이 가장 높소.”
이런 상황에도 조양진인의 머리는 제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세 사람이 다시 몸을 날리려 할 때였다.
“…….”
저 멀리서 누군가가 빠르게 달려오는 게 보였다.
“당가?”
그렇다.
다급하게 달려오는 그 신법은 당가 비전인 추뢰신법이었다. 게다가 몸 곳곳에서 작지만 날카로운 금기(金氣)도 느껴졌다. 전신에 암기들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일행 앞에 도착한 사내가 무릎을 꿇었다.
“인사드립니다. 사천당가의 당을한이라 합니다.”
기천웅의 눈이 형형해졌다.
‘상당하군.’
당연히 무극수와는 비교할 수 없고, 심지어 초절정고수도 아니다.
하지만 그의 안목은 이 당을한이라는 사내의 무공 경지가 최근 가파르게 발전했음을 꿰뚫어 보았다. 깨달음이 아닌 새로운 무공을 몸에 붙여 발전한 실력이었다.
‘비전 무공을 개방한 것인가.’
전쟁 중이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감안해도 꽤 놀라운 일이었다.
기천웅은 모를 것이다. 직계와 방계의 차별이 심했던 당가가 크게 변하고 있음을. 재능과 능력이 있다면 직계와 방계를 구분치 아니하고 철저한 시험을 거쳐 비전 무공을 전수한 지가 꽤 되었다.
한차례 내홍을 겪은 당가의 화려한 부활이었다. 그 수는 적어졌을지라도 내부 결속은 훨씬 단단해졌으며, 내원 무사들은 철저하게 정예화가 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현재 혈존이라 불리는 적측 수뇌부가 사천 남부를 지나 서부로 향하고 있습니다. 세 분 선배님들께서 그를 잡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조양진인이 미소를 지었다.
“과연 사천의 패자다운 정보력일세. 맞네. 우리는 그자를 잡으러 왔네.”
기운 없는 목소리지만 호의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당을한이 다소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재 가주님과 음제 하은교 선배님께서 혈존을 쫓고 있습니다. 나아가 본가 정예 부대 네 곳이 두 분의 뒤를 받치는 상황이니, 조만간 그를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당가다. 제아무리 당가라도 소수 인원이 사천으로 진입한 것까지 알 수는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진실로 대단한 정보력이었다.
기천웅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로 충분하다 한들, 혈존대사는 상상을 초월하는 술법을 보유한 자다. 또 무슨 수로 전황을 바꿀지 알 수 없어. 모두가 그를 잡으러 가야 할 것이다.”
당을한의 말을 이 판에 끼어들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한 듯했다.
하지만 당을한은 그런 말을 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렇습니다. 하여, 세 분께 제안을 드리고자 합니다.”
“제안?”
“세 분의 무공이 하늘에 이르렀음은 저희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이곳 사천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은 저희입니다. 지형에 익숙한 만큼 전략과 전술도 발 빠르게 펼치거나 꿰뚫어 볼 수 있으며, 적에 대한 대응 능력 역시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자부합니다.”
당연한 자부심이었다. 한 지역을 대표하는 문파라면 이 정도는 당연했다.
“하여 감히 청하옵니다. 저희와 함께 곧장 서부로 가 주십시오.”
“서부?”
“본가의 가주님과 음제 선배님께서 목표물을 제거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하신 대로, 적이 어떤 술수를 벌일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찰극평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만에 하나를 위해 후속 병력으로 남아 달라?”
“그렇습니다.”
예의는 충분했으나 비굴하지 않았고, 당당했지만 거슬리지 않았다.
방계 출신 당을한의 가장 큰 능력이었다. 재능도 뛰어났지만, 특히 사람을 상대하는 능력만큼은 어떤 직계보다도 뛰어났다.
기천웅이 조양진인을 바라보았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사천은 당가의 영역, 저들의 말을 들어 나쁠 것은 없소.”
“물론 그렇겠지. 다만, 그대의 목숨은 언제 스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듯하네만.”
죽기 전에 적과 손이라도 섞어 보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것이다.
조양진인이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나는 죽지 않소.”
“확실한가?”
“먼저 간 사제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소이다. 그자가 죽었다는 것을 확인하기 전까진, 그 무엇도 나를 죽일 수 없소.”
이렇게까지 말하니 당가 측의 제안을 거부할 수도 없었다.
“길을 잡게.”
“감사합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당을한을 따라 사천 서부로 직행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서부행은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저 멀리 북서쪽에서부터 몰려오는 또 다른 먹구름, 그것은 또다시 사천을 불사르려는 악귀들의 아우성과도 같았다.
* * *
‘저기인가.’
기천웅, 찰극평, 조양진인과 달리 수시로 정보를 듣는 당관은 혈존대사 측과의 거리를 상당히 줄일 수 있었다.
‘머리를 쓰는군.’
사천은 널따란 분지이기에 도시 바깥쪽은 수많은 산맥으로 가득했다.
쫓기는 상황에선 당연히 산을 타고 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천의 산들은 하나같이 험해서 도주자라도 쉽사리 선택할 만한 길은 아니었다.
‘한데도 산길로 잡았다. 이쪽 정보망을 최대한 피하겠다는 의도인 데다가…….’
당관의 눈이 깊어졌다.
우우우웅.
만류귀원신공의 힘이 솟구치며 그의 등 뒤로 불그스름한 기운을 흩뿌렸다.
상단전의 힘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절세신공이었다. 당관의 불그스름한 안광은 먼 거리를 단숨에 압축하여 적이 지나친 길들을 확인했다.
‘지역 특성상 음기(陰氣)가 성할 수밖에 없는 곳이다. 한데도 음기의 밀도가 지극히 낮아.’
당관의 얼굴에 살기가 어렸다.
‘그래, 마인이라 이거지.’
음기를 취하여 마기를 회복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모르긴 몰라도 보통 마인은 아닐 테니, 음기로 마기를 채우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이 필요할 것이다.
‘몸이 생각보다 훨씬 엉망인 모양이군.’
훅!
극한에 이른 추뢰신법이 그의 몸을 한 줄기 빛살로 만들었다.
철저하게 혈존대사가 지나친 길을 되짚어가는 그와 달리, 당가의 정예 부대는 보다 북쪽으로 이동해서 서부로 향하고 있었다.
남쪽으로는 절대 넘어가지 않는다. 그런 확신이 있기에 가능한 진형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
당관의 눈이 깊어졌다.
‘이상하군.’
이 정도면 적이 보여야 했다. 그의 직감도 그러했으며, 그간 받은 정보를 생각해도 지금쯤이면 시야에 보이거나 최소한 이질적인 기감을 느낄 수 있어야만 했다.
한데도 적이 보이지 않는다.
‘놈들의 능력이 이렇게까지 뛰어났다고?’
당관은 그 의문을 부정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우리를 뿌리칠 정도로 빨랐다면 굳이 사천 남부로 길을 잡지 않았을 것이다. 오면서 마기를 완벽하게 회복했다 한들, 차라리 사천 중앙으로 치고 들어와 환란을 일으키는 쪽이 놈들에게는 더 좋은 판단이었을 것이다.’
분노한 와중에도 당관의 판단은 정확했다.
‘그렇다면, 이건 무공이나 속도의 문제가 아니다.’
스슥.
신법을 멈춘 당관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술법이다. 술법이 아니고서야 설명이 안 돼.’
어지간한 술법이라도 극에 이른 상단전 능력으로 한눈에 빈틈을 읽어 냈을 것이다.
이것이 술법이라면, 정말 최고위 술법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도 당관은 겁먹지 않았다. 애초에 당가 사람에게 두려움이란 없다. 다만 가문의 태상을 죽인 적측 수뇌부를 눈 뜨고 놓친다면, 그건 꽤 두려운 일이 될 것이다.
화아아악!
만류귀원신공의 힘이 본격적으로 개방되기 시작했다.
펄럭!
진기로 만들어진 붉은 장포가 그의 온몸에서 넘실거렸다. 마치 피에 물든 악귀들이 주인을 보호하는 것처럼 보였다.
번쩍!
초극상법으로 안정화된 상단전, 그리고 안목.
당관의 붉은 눈이 사방을 훑었다.
“……역시.”
우우웅! 우우우웅!
공기의 흐름이며 자연기의 움직임이며 어느 하나 이상할 게 없다.
“역시 숨어 있었던가.”
그 자연스러움 속에 몸을 숨겼다. 한 줌의 마기도 새어 나가지 않도록 철저하게 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관이 버럭 외쳤다.
“이 사천 땅에서 우리의 눈을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더냐!!”
퍼어어엉!
분노 가득한 신법으로 쏘아져 나가는 당관.
그가 목표로 한 곳은 거대한 돌산 중앙이었다. 급격한 비탈을 자랑하는 그곳에서, 자연기를 두 겹 덧씌운 지점을 발견한 것이다.
당관 정도의 예민함을 지니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할 위치였다. 극한의 마기를 지닌 자가 자연기를 이용해 몸을 숨긴다는 것도 상상키 어려운 일이었다.
당관의 좌수가 벼락처럼 움직였다.
번쩍!
쏟아져 나오는 공력이 매서운 돌풍을 일으켰다.
당가의 삼양신장(三陽神掌)이었다. 예전보다 더 촘촘해지고 빨라진 그의 장력은 성천의 누구도 쉬이 받아 내기 힘들 만큼 막강해 보였다.
콰아아앙!!
화탄 두어 개는 터진 것 같았다.
폭음과 함께 돌산 중심부에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사람 두어 명은 넉넉히 들어갈 수 있을 만한 동혈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놀랍게도 상처 하나 입지 않은 십여 명의 사내들이 있었다.
으드득.
당관의 입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거리가 이렇게 떨어졌는데도 표정이 선명하게 보인다.
사기와 마기가 뒤죽박죽 섞인 고수들 사이로, 양은 적되 무지막지한 밀도를 지닌 마기를 보유한 노인이 있었다.
어느새 피처럼 붉어진 머리카락, 굽은 허리도 상당히 펴졌다. 안색은 창백했지만 두 눈에 깃든 끔찍한 마기는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정신을 손쉽게 파괴할 정도로 독했다.
“네놈이구나!”
그때, 혈존대사가 힘차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당관의 눈이 번뜩였다.
콰르르르릉!!
돌산 위쪽에서 수십, 수백 개의 바위들이 엄청난 속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혈존대사가 차갑게 웃었다.
“사천에서 가장 크고 독하다는 독사의 실력이나 보자.”
콰콰쾅!!
바위들이 순식간에 당관을 휩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