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244)
흑백무제 1249화(1244/1255)
1249화. 붕괴의 시작 (4)
스릉.
호연합이 칼을 뽑았다.
혈존대사가 손을 들었다.
“기다려라.”
“예.”
쿠르르르릉!!
지금 이 순간에도 바위는 무자비한 기세로 경사를 따라 쏟아지고 있었다.
‘과연.’
혈존대사의 눈이 깊어졌다.
그의 눈에는 보였다. 쏟아지는 바위 속에서 번뜩이는 붉은 진기의 흐름이.
‘혈마(血魔)에 이른 실력, 심지어 상단 천공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놈이로다. 이 싸움은 쉽지 않겠어.’
쿠구궁!!
바위가 떨어지고 난 길.
자욱한 먼지 속에서 한 줄기 섬광이 일었다.
쩌어어어어엉!!
손가락 크기의 암기 하나 막았을 뿐인데도 영귀사제의 몸은 돌산 벽에 처박혔다.
내상은 없지만, 뒤통수가 찍혀서 피가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암기술이었다. 온 천하, 사병기(射兵器)를 쓰는 문파 중에서도 최고 경지에 올랐다는 당가의 암기술이었다.
화아악!
먼지를 걷어 내고 나타난 당관의 모습은 제법 험했다. 완벽하던 의복은 군데군데 찢어졌고, 이마에서도 한 줄기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두 눈은 형형했고 뿜어져 나오는 기파는 엄청났다. 그 많은 바위들에 휩쓸렸는데도 내상 한 줌 입지 않은 듯했다.
“재미있는 술수를 쓰는군.”
불처럼 타오르던 분노가 차갑게 식는다.
고요하고 서늘하다. 하지만 종전보다 더 진한 분노가 느껴졌다.
이것이 진짜 당관의 모습이었다. 원수 조직의 수뇌가 나타났기에 눈이 돌아갔지만, 이 한 수로 인해 평정심을 되찾은 것이다.
혈존대사가 차갑게 웃었다.
“용케 살아남았구나.”
“괴악한 환술이군. 나도 이 정도 환술은 처음 당해 본다.”
그렇다.
돌산 꼭대기에서부터 쏟아진 바위들은 전부 환술이었다.
환술이라도 지독한 현실감을 지닌 환술이었다. 여느 사파 무인이나 마인들이 쓰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래서 당관도 상처를 입은 것이다. 미세한, 아주 미세한 마음의 흔들림만 있어도 환술의 공격은 실제가 되어 몸에 타격을 줄 것이다.
그 흔들림, 마음의 빈틈을 없애기 위해 당관은 정신을 바로잡았다.
‘까다로워.’
혈존대사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혈왕환신술(血王幻信術)이 얼마나 통할지 확신이 서질 않는다.’
심, 기, 체가 완벽하게 연마된 고수조차도 당하는 게 혈왕환신술이다. 혈교 비전의 환술은 그 신묘함이 하늘에 닿은 공부였다.
하지만 혈왕환신술을 구사하기에는 마기의 양이 다소 부족했다.
물론 온전한 상태였다면 혈왕환신술보다 더 끔찍한 비술을 썼겠지만.
스륵.
당관은 결코 방심하지 않았다.
상대가 환술의 대가라면 섣불리 움직이는 건 금물이다. 만류귀원신공의 신안(神眼)으로도 다 파악하지 못했으니, 지금은 신중해야 할 때였다.
이동을 멈춘 당관이 소매를 살짝 흔들었다.
어느새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비수가 드러났다. 총 네 자루의 비수는 평범했지만, 당관의 손에 들렸기에 비범해 보였다.
혈존대사의 미소가 짙어졌다.
“어디 그 잘난 철판 조각을 휘둘러 보거라.”
“그럴 생각이다.”
파아아앙!
그럴 생각이라면서 비수가 들리지 않은 오른손으로 장력을 쳐 냈다.
조금 전에 구사했던 삼양신장이었다. 다만, 빠르고 과격했던 이전과 달리 풍성하고 느릿하지만 범위를 크게 확장한 장력이었다.
호연합이 외쳤다.
“막아라!”
사제들은 몸을 곧게 세우며 다가오는 장력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콰아아앙!!
범람하는 강물처럼, 피격 지점에서 터진 장력의 여파가 사방으로 넘실거렸다.
“우웨엑!”
사제 중 절반이 피를 토했다.
치명상은 아니지만 이 한 수로 상당한 내상을 입은 것이다.
‘무공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군.’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
혈마의 경지는 신으로 가는 길 위에 섰음을 뜻했다. 그중 선택된 자들만이 한없이 신의 곁에 가까워질 수 있으며, 기(氣)의 활용과 밀도가 차원을 달리했다.
‘하지만 너는 알아야 할 것이다. 그와 같은 경지에는 나 역시 올라섰음을.’
올라가는 길이 달랐을 뿐이었다. 만류귀종을 입에 담기에는 아직 서로가 부족하지만, 술법계에서 천하제일을 논하는 혈존대사는 지금의 상태로도 당관을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물론 딱 거기까지였다.
상대할 자신은 있어도 이길 자신은 없다. 애초에 이기려고 힘을 줘서는 안 될 싸움이었다.
‘벌써 이틀이 지났다. 어서 와라!’
혈존대사가 외쳤다.
“끝까지 자리를 지켜라.”
퍼퍼펑!
삼양신장이 연달아서 날아왔다.
느릿하지만 넓은 범위를 아우르는 장력, 빠르지만 범위가 작고 날카로운 장력, 더 막강한 힘을 실어 한없이 빠르고 강한 장력까지.
같은 무공을 전혀 다른 무리(武理)로 풀어 내니, 도무지 같은 무공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채롭기 그지없는 삼양신장의 위력, 사제들의 불그스름한 두 눈에 다급함이 일었다.
콰쾅! 콰아아앙!
호연합까지 가세했음에도 누적되는 피해량을 줄일 수가 없었다.
총 일곱 번의 장력을 막은 그들의 몸은 완전히 피투성이였다. 호연합마저도 코와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상대가 되지 않는다. 진형을 형성하고 작전을 짜서 공격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초절정고수라도 무극수와의 정면 승부는 이렇게나 힘든 것이다.
하지만 당관은 그들을 경시할 수가 없었다.
‘하나도 죽지 않았다니.’
전력을 다한 것은 아니더라도 과감하게 힘을 쓴 것 역시 사실이었다.
한데도 누구 하나 죽지 않았다. 삼양신장 일곱 발, 삼양칠색포(三陽七色砲)를 연환으로 구사하지 않고 하나하나 정성을 다해 내쳤는데 아무도 죽지 않은 것이다.
‘내가 보지 못하는 게 있군.’
우우우우웅!
당관의 눈이 재차 붉게 달아올랐다.
‘역시 그랬나.’
비로소 신안에 잡히는 투명한 방어막.
혈존대사를 중심으로 무색무취의 술력(術力)이 졸개들 하나하나의 몸에 덧씌워져 있었다.
거대한 막을 형성한 것도 아니요, 움직이는 고수들에게까지 따로 술력 방어진을 씌웠다. 진법에도 일가견이 있는 당관이었지만, 이와 같은 경지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힘을 회복하지 못했는데도 이 정도라…….’
당관의 미소가 짙어졌다.
‘확인해 보길 잘했군.’
무공을 구사하면서 귀원신공의 신안까지 발하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었다.
훅!
상단전을 중심으로 만류귀원진기가 벼락처럼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우우우우웅!
퍼져 나간 진기는 다시 상단전 중심으로 수렴하고, 수렴되어 응축된 진기는 재차 전신으로 뻗어 나갔다가 되돌아왔다.
그와 같은 응축과 발산이 짧은 순간, 수십 번이나 일어났다.
화아아아아악!!
혈존대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호연합을 위시한 사제들 역시 저도 모르게 돌산 벽에 붙었다.
쿠구구궁!!
당관이 비스듬히 선 돌벽 주변으로 깊고 거대한 금이 뻗어 나갔다.
그 반경만 무려 이십여 장이었다. 기파를 발산하는 것만으로도 산의 중심부가 무너질 것 같았다.
“무공에 대응하는 술법이라…… 대단하긴 하다만, 뭐가 더 있을까 걱정했더니 고작 그 정도라.”
당관이 씨익 웃었다.
순간 사제들은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혈신지기, 이 세상에서 가장 독한 마기에 중독되어 공포를 모르는 그들조차도 순간적으로 두려움을 느낄 만큼 당관의 기파는 무시무시했다.
“잘 가라.”
그 순간, 혈존대사가 외쳤다.
“좌방(左方) 일로(一路)!”
번쩍!
혈존대사의 언령이 뻗어 나가는 순간 이미 당관이 날린 네 자루 비수는 사제들 이마 한 치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섬광과도 같은 속도, 무엇이라도 뚫어 버릴 수 있을 것 같은 힘.
당가 비전 암기술 중 하나인 추뢰비도(追雷飛刀)였다.
사악! 퍼벅!
언령 이전에 혈존의 의지가 있었으니, 당관의 공격보다 사제들의 움직임이 더 빠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비수 두 자루는 사제 둘의 미간을 정확하게 뚫어 버렸다.
공격은 한 박자 느렸지만, 비수의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다. 그야말로 빛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바박!
죽은 사제들을 챙긴 그들이 좌측으로 몸을 날렸다.
그 순간, 그들의 모습이 당관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조화였다. 진법, 요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훅!
당관의 몸이 허공을 떠다녔다.
술법을 구사하는 자 근처에 가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이 없다. 하물며 상단전을 완전히 개화한 무극수에게도 위험한 술사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당관의 선택은 탁월했다.
탁월했고, 놀라웠다.
핏빛 장포처럼 퍼져 나간 붉은색 귀원진기는 마치 피에 젖은 선녀의 옷과 같았다.
그 옷을 입고 허공을 둥실둥실 잘도 떠다닌다. 경지 구분 이전에 수많은 독을 취하며 최강의 내공력을 갖춘 당관에게 있어 이 정도 허공답보, 아니 육지비행(陸地飛行)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삼현(三絃), 삼정(三霆).’
치링! 번쩍!
소매 안에서 튀어나온 세 자루 비수가 혈존대사 일행이 사라진 곳 상방과 하방 좌측, 하방 우측으로 쏘아졌다.
퍼버벅!
비수가 돌벽에 박히기도 전에 모습을 감췄다. 저 일대가 온통 허상인 것이다.
우우우우웅!!
벽에 박힌 세 자루 비수에서 귀원진기의 힘이 전해졌다.
당관의 손이 천천히 오므라졌다.
“삼절폭(三絶爆).”
콰아아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반경 삼 장 범위의 돌벽이 박살 났다.
추뢰비도의 삼절폭이었다. 비도와 발경을 응축하여 폭발시키는 죽음의 진(陣)이었다.
지이이잉!
술법이라도 기의 조화일 뿐이다. 이 정도로 강력한 기가 폭발했다면 환술 역시 지워질 수밖에 없다.
지잉! 지이이잉!
평범한 돌산의 형상이 제멋대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제 보니 돌산의 절반이 다 환영이다. 무극수 중에서도 유독 상단전이 발달한 당관의 눈조차 속일 만큼 고차원적인 환영이었다.
그리고 그 일렁이는 환영 사이로.
혈존대사의 마기와 사제들의 사기가 느껴졌다.
훅!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하지만 느리지도 않았다.
허공을 질주하는 당관의 모습은 하늘을 나는 귀장(鬼將) 그 자체였다.
퍼퍼퍼펑!
환영을 따라가며 거침없이 장력과 비수를 쏘아 냈다.
돌산 전체가 진동했다. 일그러지다가 복구되었던 환영이 마구 뒤틀리며 곳곳에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드리웠다.
그때였다.
훅!
당관의 눈이 깊어졌다.
‘마기가 폭증한다?!’
퍼벅!
아무것도 없는 허공 밖으로 죽은 사제 둘의 시체가 떨어졌다.
놀랍게도 그들의 가슴은 활짝 열려 있었다. 그 열린 가슴 속, 마땅히 있어야 할 심장이 없었다.
“아깝구나. 이놈들의 심장을 벌써 취하게 될 줄이야.”
번쩍!
돌산의 환영이 곧바로 원상태로 돌아왔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부글부글.
어느새 돌산 밑에서부터 엄청난 열기를 지닌 핏빛 용암이 무서운 속도로 상승하고 있었다.
콰르릉!
어두워진 하늘에선 소리 없는 벼락이 줄줄이 내리쳤다.
하늘과 땅에서 생길 수 있는 최악의 재앙들이 당관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 모든 곳에, 숨 막힐 듯한 마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당관은 공포를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분노를 느꼈다.
“감히…….”
위이이이잉!!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을 것 같던 귀원진기의 밀도가 점점 상승했다.
“내 앞에서 이따위 더러운 마기를 드리우느냐?”
파아아앙!
상승하는 진기의 본능을 따라, 당관의 몸이 그대로 돌산을 향해 쏘아졌다.
치리리리링!!
어느새 그의 등 뒤로 수십, 수백 개의 암기들이 찬연한 빛을 뿌리며 솟구쳤다.
“감히 내 앞에서! 내 땅에서!!”
당관이 괴성을 지르며 오른손을 뻗었다.
옥음강포의 구결을 따라 만천화우(滿天花雨)의 술식이 맞춰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