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245)
흑백무제 1250화(1245/1255)
1250화. 붕괴의 시작 (5)
“좌방 삼로!”
파바박!
혈존대사를 중심으로 호연합을 포함, 살아남은 여섯 사제가 환영진 좌측 아래로 몸을 날렸다.
혈왕환신술로 만들어진 용암을 뚫고 내려왔지만 그들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면 시전자도 환상에 당해 죽을 수도 있는 환술이었으나, 취심축마술로 마기를 보한 지금의 혈존대사는 제 술법의 희생양이 될 만큼 녹록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쉬이이이익!
환영 속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이무기가 당관의 몸을 휘감았다.
시전자도 아차 하면 당해 버릴 만큼 현실성이 짙은 환술이었다. 상대가 받는 정신적 충격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러나.
푸화아아악!
그 거대한 이무기의 몸통이 통째로 뜯겨 나가며 사람 몸통보다 큰 살점과 핏물을 쏟아 냈다.
‘……!!’
혈존대사의 눈이 부릅떠졌다.
‘저건?!’
촤르르륵!
쇠 비늘 부딪치는 소리가 살벌하기 그지없다.
당관의 몸을 휘감은 수백 개의 암기는 무적의 방어력과 절대의 공격력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용이 되다 만 이무기의 몸통 따위, 회전하는 암기만으로도 갈아 버릴 수 있었다.
‘환술을 파훼한 것이 아니야.’
혈존대사의 눈이 흔들렸다.
‘환술에 걸렸다. 걸린 채로 박살을 냈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엄청난 신기(神氣)에 무시무시한 자존심이다. 저 정도 자신(自信)은 수백 년간 몇 번 본 적이 없는데.’
환술에 걸렸다는 건, 곧 신화 속 이무기가 현실에 존재한다는 걸 마음으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한데도 그 이무기의 몸통을 손쉽게 박살 냈다.
신화 속에서나 거론되는 괴력난신도 내 상대가 아니라는 자신감을 보여 준 셈이었다. 그런 마음을 진짜로 먹지 않는 이상, 이무기가 저렇게 박살이 날 수는 없다.
번쩍!
당관의 붉은 눈동자는 지옥의 화염을 담고 있었다.
혈존대사의 혈광 가득한 눈빛과는 다른 느낌의 적색이다.
사천, 아니 중원 땅 전체의 분노를 끌어모은 듯 폭발적인 감정을 보여 준다. 그러면서도 증폭된 기도에는 큰 흔들림이 없었다.
불같은 분노와 차가운 증오가 함께한다. 사람이 가장 무서워지는 순간이었다.
혈존대사의 안광이 더 짙어졌다.
번쩍!
하늘에서 내리치는 벼락이 점점 당관에게 향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용암 역시 당관을 향해 파도쳤다.
대자연의 재해 중 손에 꼽힐 만한 재앙을 몰고 와서 당관의 마음을 흔든다.
이무기를 박살 냈을지언정 벼락과 용암의 힘까지 버텨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무기에게는 동물 같은 실체가 있지만, 벼락과 용암에는 그런 게 없다.
‘어디 이것도 막아 보아라.’
그때였다.
번쩍!
당관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무형의 기운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
혈존대사의 눈이 재차 커졌다.
날아오른 무형의 신기는 곧바로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가는 벼락이 되었다.
혈왕환신술로 만든 환상의 벼락과는 달랐다. 저것은 상단전의 신기(神氣)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기가 수천 줄기의 벼락이 되어 하늘에 거대한 그물을 펼치고 있었다.
‘아름답다.’
혈존대사의 눈이 몽롱해졌다.
술법의 극의에 도달한 그의 눈에도 저 신기의 그물은 지독히도 아름다웠다. 눈에 보이지 않기에, 오직 선택된 자들만이 볼 수 있는 기(氣)의 그물이기에 그 아름다움은 더더욱 빛을 발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 뒤에는, 아름다움 이상의 경이를 머금은 공포의 살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옥음강포(獄飮鋼鋪).”
치리리리리리링!!
귀청이 멀 것만 같은 사나운 소리가 사위를 휩쓸었다.
수백 개의 암기가 서로 부딪치며 쪼개졌다. 쪼개진 철 조각들은 순식간에 뭉쳐져 거대한 몸체를 이룬 용 한 마리가 되었다.
촤르르륵! 촤르르르륵!
꿈틀대며 움직이는 용의 거체.
부서진 암기 조각들이 끊임없이 부딪쳐 대며 상상을 초월하는 기음(奇音)을 만들어 냈다.
“크윽!”
“아아악!”
사제들이 귀를 막으며 비명을 질렀다.
신기로 증폭된 철 조각의 합주다. 인간의 청력으로는 버티기 힘든 날카로운 소리가 귀를 뚫고 머리까지 뒤흔들었다.
혈존대사가 버럭 소리쳤다.
“갈!”
우우우우웅!!
엄청난 마력이 담긴 목소리에 사제들의 얼굴이 편안해졌다.
하지만 혈존대사는 다급했다. 제물들이 정신을 차리도록 만들기 위해 지닌 마기 중 절반을 끌어다 썼다. 하물며 돌산에 벼락, 용암까지 만든 직후였다.
순식간에 기가 허해지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힘을 얻을 때마다 점점 더 많은 양을 소모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미칠 노릇이었다.
콰르르릉!!
천둥과 함께 한 줄기 벼락이 내리꽂혔다.
번쩍! 치리리리링!!
내리꽂힌 벼락은 철룡(鐵龍)의 몸을 두들기고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게 아니었다. 분산된 벼락의 힘이 그대로 철룡의 몸체에 흐르고 있었다.
당관의 몸을 지켜 주는 무적의 방패였다. 벼락의 힘도 머금을 수 있는 상단전 무공의 극치가 거기에 있었다.
“분신만파(焚身萬波).”
쩌저저저저저정!!
암기 조각들이 더 강하게 부딪치며 수백 개의 불꽃을 피워 올렸다.
쇠와 쇠가 부딪치며 생성된 불똥이 용의 몸체 곳곳에서 타오른다.
쩌저저정!
과거, 배신자이자 혈육을 죽이기 위해 썼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형상이다.
그때가 이무기였다면 지금은 명백한 용이었다. 형태도 훨씬 섬세해졌다. 거대하지만 눈매와 입, 심지어 이빨과 수염까지 철 조각으로 만들어 낸 진짜 용이었다.
그리고 그 용이, 주둥이까지 쩍 벌린 채 소리를 질러 대고 있었다.
쇠끼리 부딪치며 나는 소리에 불과했지만, 신기로 증폭된 그 소리가 혈존대사의 귀에는 진짜 용음(龍音)으로 인식되었다.
‘저럴 수가 있는가.’
환술의 벼락을 전신에 두른, 와중에 거칠게 일어난 쇠 비늘로 불꽃까지 피워 올리는 철의 용.
뇌화(雷火)의 힘을 머금고 있는 그 용은 끊임없이 당관 주위를 꿈틀대며 방어와 위압을 동시에 선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혈존대사는 저 용이, 자신들을 향해 사납게 울부짖으리라는 걸 확신했다.
“좌방 대로(大路)!”
파아아악!
사제들을 이끌고 서쪽을 향해 마구 달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혈왕환신술로는 저 힘을 막는 게 불가능했다. 아니, 설령 멀쩡한 상태였다 해도 혈왕환신술로는 맞상대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쿠르르르릉!!
차오르는 용암 너머, 땅바닥에서 거대한 먹구름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하늘의 양(陽), 땅의 음(陰).
대지에서 올라오는 먹구름이 뇌화로 휩싸인 용의 힘을 끌어당긴다.
반경 이십여 장을 뒤덮는 철의 감옥이 거기에 있었다. 펼쳐지기까지가 문제일 뿐, 한번 펼쳐지면 누구도 파훼할 수 없는 절대 무적의 비기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혈존대사가 외쳤다.
“녹여 버려라!”
촤아아아악!
파도가 해일이 되었다. 꾸덕꾸덕하고 시뻘건 용암이 거대하게 일어나 당관의 몸을 휩쓸었다.
화아아아악!!
용암으로 가려진 그림자 너머.
짓눌린 당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만천(滿天).”
콰릉! 콰르릉!!
절대의 확신 속, 용암의 형태가 조금씩 일그러진다.
과한 술력의 사용으로 용암이 힘을 잃었다. 더하여 사천당가 최강의 비기를 준비한 당관의 자존심은 끝을 모르고 상승하여, 용암이 덮쳐 와도 멀쩡할 거란 믿음을 선사했다.
치이이익!
그 믿음 아래.
화상을 입은 당관의 몸이 본래대로 돌아왔다. 벼락의 힘으로 저릿저릿해진 손이 멀쩡한 움직임을 발했다.
당가의 힘, 그리고 자신의 힘.
천지가 뒤집혀도 절대 자신을 이길 수 없다는 신앙과도 같은 마음에, 혈왕환신술의 술력이 뿌리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화아아아악!
흩어지는 용암 속.
어느새 차분해진 당관의 눈에 최종 비기의 마지막 두 글자가 하나씩 담겼다.
하늘을 보는 오른손, 그 위로 대지를 뒤덮는 왼손이 내려왔다.
“화우(花雨).”
카카카카카캉!!
거대한 뇌화철룡이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졌다.
흩어지는 순간 온 하늘을 뒤덮는다. 뒤덮는 순간 이미 폭우가 되어 쏟아진다.
술법진을 넘어 돌산 팔 부까지 휩쓸어 버리는 만천화우의 비술이 절망의 이름으로 내리꽂혔다.
콰콰콰쾅!!
지극히 작은 철 조각이지만, 그 하나하나가 유성과도 같은 힘을 발한다.
그런 유성이 수천 개다. 수천 개의 유성이 제각기 다른 속도로, 다른 범위를 아우르며 사위를 휩쓸어 버리고 있었다.
콰르르릉!!
음과 양이 만나 거대한 충격파를 일으켰다.
일발 폭격 이후 이 차 폭발이 터져 나왔다. 인위적으로 조작한 진기 충돌은 곧 주인의 손을 벗어나 대자연의 이치대로 힘을 증폭시켰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설령 저 성천의 권신이라도 살아남기 힘든 대폭발이었다.
쾅! 콰르르릉! 콰쾅!
이제는 폭발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곳이 부서지고 파괴되었다. 강력한 음양 충돌로 대지 위에 무형의 뇌기(雷氣)가 거미줄처럼 뻗어 나가고 있었다.
퍼퍼펑! 콰아앙!
상중하, 모든 단전의 힘을 끌어모은 완전영창(完全令唱)의 만천화우.
당관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이 자리, 이곳에서 적을 잡기 위해 바다와도 같은 내공력을 아낌없이 쏟아붓는다.
푸스스스.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던 대폭발도 이제는 힘을 잃어 갔다.
펑! 퍼펑!
더 이상의 유성은 없었다. 그저 거미줄처럼 흐르는 뇌기가 조금씩 작은 폭발을 일으키며 땅을 뒤집어 놓고 있을 뿐.
그리고.
그곳에 혈존대사는 물론 사제들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핏물 하나까지 모조리 증발해 버린 것일까?
그렇지 않다.
당관은 저 멀리, 미약한 마기의 흔적을 읽을 수 있었다. 만류귀원신공의 힘이 크게 약해졌지만, 그것은 적도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기척을 숨기는 술법을 쓸 수 없는 것이다.
‘놓치지 않는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도 추적해서 죽인다.
파아아앙!
더 이상 육지비행술을 펼치지 못하는데도 당관의 신법은 흔들림이 없었다.
* * *
“허억! 허억!”
그사이 용케 사제 한 명의 심장을 뽑아낸 혈존대사는 취심축마술을 펼치지도 못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이럴 수는 없다.’
당관의 무공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무(武)와 술(術)의 경계를 거의 완전하게 허무는 공부.
이 정도면 삼백 년 전, 혈교의 괴수들을 홀로 잡아먹어 버린 황룡무(黃龍武)의 파괴력과 비교해도 크게 차이가 나질 않았다. 기의 순도로는 비교할 수 없지만, 기술의 파괴력만 보면 거의 황룡에 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직 멀었는가! 그대들이라면 지금 나타나도 이상할 게 없거늘!’
서북쪽 하늘을 향해 끊임없이 외쳐 본다.
호연합은 말조차 잃은 채 혈존대사를 업고 마구 달리고 있었다. 그의 몸도 만신창이였지만, 생명력까지 소진해 가며 운반책 노릇을 하고 있었다.
울컥!
혈존대사는 힘을 있는 대로 끌어올리며 심장을 씹었다.
축마술로 인해 마기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몸에 활기가 돌았지만, 그래 봤자 동원할 수 있는 마기의 양은 소량에 불과했다.
혈존대사가 버럭 외쳤다.
“어서 달려라! 네 심장이 멈추기 전까지 달려!”
호연합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여력까지 아끼며 달려 나갔다.
‘빌어먹을! 또다시 이런 꼴로!’
온 천하에 공포를 드리울 혈교 제사장의 힘.
그의 힘도, 선친을 위한 복수심과 천하 최강의 자존심을 등에 업은 당가주의 무공 아래 꺾이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