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246)
흑백무제 1251화(1246/1255)
1251화. 불괴(不壞)의 땅 (1)
“…….”
강량의 눈이 저 멀리 남동쪽으로 향했다.
“뭐지?”
진양 역시 무언가를 느낀 듯, 깊어진 눈으로 강량과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좀 오싹한데?”
하은교보다 먼저 서부에 도착한 그들이었다. 그들 주변에는 사천 흑도 세력 일부가 진을 치고 있었다.
강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진짜 못해 먹겠군.”
“뭐가?”
“이 경지 말이오.”
“뭔 소리야?”
“처음 이 경지에 오르고 나선 뛸 듯이 기뻤지. 하지만 무공이 상승하고 경지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점점 모호함만 남는 것 같소.”
불평할 만한 경지가 아니다. 그 연배에 강호 최대 명문의 수장급 무력을 거머쥐었다면, 이는 보통 대단한 일이 아닌 것이다.
평생 강량의 발치에도 이르지 못하고 죽어 나가는 무림인이 대다수인 걸 생각하면 그의 발언은 꽤 기가 차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진양은 강량의 마음을 이해했다.
‘높이 올라갈수록 더 높은 경지를 바란다. 지금 내 위치에 만족하지 않는다.’
초조함도 향상심이 없다면 누리기 힘든 권리다. 그런 면에서 확실히 강량은 남다른 바가 있었다.
진양이 웃으며 말했다.
“밀려오는 공기가 확실히 달라. 당가주께서 적과 교전이라도 벌이고 계시는지도 모르지.”
그들의 기감으로는 절대 느끼지 못할 거리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남쪽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기감을 뛰어넘는 육감, 그들의 상단전이 엄청나게 예민하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나는 남쪽보다 저쪽이 더 걸리는데.”
진양의 화안(火眼)이 북쪽을 바라보았다.
후우우웅.
불어오는 바람이 몹시도 거칠다.
하늘엔 먹구름이 가득했고 공기도 습했다. 비든 눈이든 한바탕 쏟아질 것만 같은 날이었다.
“하 선배님께서는 우리보다 십 리 정도 남쪽에 계시지. 십 리…… 먼 거리이긴 하지만, 우리가 느끼는 불길함을 하 선배님이 못 느끼셨을 리가 없다.”
“형님 말이 맞소.”
강량이 초조함은 느끼는 것은 비단 남쪽에서 느껴지는,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일 때문만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저 북쪽 하늘에서부터 내려오는 지독한 불길함을 느끼고 있었다. 남쪽보다 훨씬 더 구체화된 불길함이다.
전장의 냄새가 맡아진다.
숱한 전투 경험과 천재적인 재능, 시시각각 첨예해지는 상단전 능력이 그들의 감각을 보검처럼 날카롭게 벼려 주었다.
“알 수 없군. 현재 광혈교 병력은 호북 무당산에서 전멸했다. 섬서 남부를 가로지르는 병력도 대형과 의정군이 섬멸했다고 했어. 한데 왜 또……?”
강량이 묘한 눈으로 진양을 바라보았다.
그 말은 곧 북쪽에서 내려오는 병력이 광혈교 측 병력임을 확신한다는 뜻이었다.
“마인인 것 같소?”
“너도 알잖아?”
“난 솔직히 불길하기만 해서…… 이거 진짜 쓸데없는 능력 아닌가 싶은데.”
“마인이 맞아.”
우우우웅.
진양의 눈에 화기가 들끓었다.
빛나는 진기가 하단과 중단을 거쳐 상단까지 관통한다.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리는 화기일지언정 그의 신공은 정순한 것이었다. 사마기의 구분 능력이 흑도의 심법을 익힌 강량보다 뛰어날 수밖에 없었다.
“강력한 마기다. 점점 가까워져. 아니…… 무서운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다.”
훅!
진양의 몸에서 긴장감 넘치는 기파가 일어났다.
마냥 불길함만을 느끼고 있었지만, 이제는 다르다. 구름처럼 느긋하게 밀고 들어오던 전장의 공기가 지금은 폭풍이 되어 몰아치고 있었다.
진양이 외쳤다.
“너희는 지금 당장 하 선배님께 이곳으로 오시라고 전해라! 그리고 거기 둘은 당가 부대로 가라! 나머지는 전부 도시로 들어가! 청성과 당가에 지금 당장 광혈교의 전력이 접근하고 있다고 알려라!”
지금껏 보여 준 적 없던 진양의 위엄 넘치는 외침이었다.
흑도 정보원들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유독 신법이 날랜 녀석들로만 뽑아서 왔으니, 정보 전달도 한층 빠를 것이다.
“우리는 남쪽으로 빠진다.”
“형님! 그럼 놈들은?”
“우리가 감당할 만한 놈들이 아니야.”
그때였다.
훅!
진양은 물론 강량의 얼굴도 확 굳어졌다.
안 그래도 빨라진 폭풍이 이제는 질풍이 되어 날아온다.
‘우리의 존재를 눈치챘어.’
파아아악!
두 사람이 빠르게 남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때, 저 멀리서 하은교의 모습이 보였다. 정보원을 보내기도 전에 불길함을 느낀 그녀가 지소현과 함께 다가온 것이다.
“선배님!”
하은교의 얼굴은 지독하게 차가웠다.
“강자들이네. 자네들은 내 뒤로 오게.”
“알겠습니다.”
하은교가 양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우우우웅!
섬섬옥수에서 흘러나온 무형의 음화제무진기가 가느다란 진동과 함께 널리 널리 퍼져 나갔다.
지소현이야 말할 것도 없고, 지금의 강량과 진양으로서도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하은교가 눈을 감았다.
‘하나, 둘…… 넷?’
감은 눈이 저절로 뜨였다.
그녀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긴장이 떠올랐다.
‘무극수가 넷이나 된다고?!’
정확히는 셋이다. 다른 하나는 무극수인지 아닌지 잘 읽히지가 않았다.
‘당가 측 정보로는 광혈교의 거의 모든 병력이 중원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볼 때, 교단을 지키는 고수까지 끌고 왔을 리는 없다.’
전략 전술에 능하지 않은 하은교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건 상식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 병력이라면 어찌하여 굳이 함께 오지 않은 거지? 교단을 지키기 위함이라면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게 상식인데, 이토록 어정쩡한 순간에 소수 정예를 파견해?’
전략 전술은 잘 몰라도 쌓아 온 경험의 깊이가 다르다.
하은교는 적의 움직임이 상식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긴장했다. 적이 상식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곧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알 수 없다는 뜻, 아군 측에서도 적의 움직임을 읽기 힘들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내가 걱정할 바는 아니지.’
생각은 여기까지다.
우우우웅!!
그녀의 양손에 희뿌연 진기가 어렸다.
‘나는 사령관도, 군사도 아니다. 그저 눈앞에 다가오는 모든 위협을 제거하면 그만.’
하은교가 뒤로 손을 뻗었다.
후우웅!
지소현이 안고 있던 금(琴)이 두둥실 떠올라 하은교의 앞에 놓였다.
놀랍게도 하은교는 그 자리에 앉아 무릎 위에 금을 올렸다. 적이 엄청난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빤히 알면서도 여유로운 행동을 보여 주었다.
강량이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님.”
“무극수가 셋, 혹은 넷이라네. 그들을 따르는 마인들의 숫자는 삼백 정도 되는데, 능히 정예라 할 만하네.”
진양이 이를 악물었다.
“피하시지요.”
“그럴 수는 없지.”
“선배님!”
“걱정하지 말게. 내 저들을 섬멸할 능력은 없어도 시간을 끌 능력은 되네. 게다가…….”
하은교가 동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군이 오고 있네. 적의 발을 묶어 둘 수 있는 막강한 아군이.”
그때였다.
“우우우우!!”
북쪽에서부터 엄청난 사자후가 들려왔다.
소림의 사자후와는 아예 느낌이 달랐다. 사위를 휩쓰는 마성(魔聲)에는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의 두려움을 자극하는 기묘한 공능이 있었다.
색으로 치면 먹물처럼 까만색이다. 지독한 마기, 마치 마정(魔精)을 품은 거대한 마물이 울부짖는 것 같았다.
그리고.
훅!
검고 붉은 마기를 불꽃처럼 휘날리는 적들이 언덕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 * *
“이상하군.”
조양진인의 눈이 깊어졌다.
“강렬한 마기로고. 이는 무당산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한데…… 밀도는 다소 낮더라도 이 또한 무극을 넘보는 힘이로다.”
“광혈이다.”
기천웅과 찰극평은 조양진인보다 빨리 광혈교의 마기를 읽었다.
“교단을 지키던 최후의 병력이 온 것이다.”
“이해할 수 없구려. 그럴 거면 애초에 중원으로 내려온 병력과 함께 오는 것이…….”
“혈존대사가 소환했을지도 모르지.”
조양진인의 눈이 번쩍였다.
무당파의 비전 술법, 무극술계에 준하는 술법을 피폐한 몸으로도 펼칠 만한 술사라면 먼 거리에 떨어진 아군 역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최후까지 교단을 지키는 병력이라면, 소교주의 병력이겠군.”
“소교주?”
“그렇다.”
화아아아악!
어느새 당을한을 제치고 날아가는 그들의 속도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섭혼이든 뭐든, 광혈교 병력은 교주와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소교주는 아니야. 광혈의 소교주는 삼교의 후계 중 가장 완성된 이다. 지금 당장 교주직에 올라도 이상할 게 없는 무력이지.”
“……!”
“정권이 바뀌면 사람도 바뀌는 법. 소교주의 곁에도 천화에 이른 자들이 있다. 중원으로 밀고 들어온 병력이 교주의 사람들이라면, 지금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자들은 소교주의 사람일 것이다.”
조양진인이 고개를 저었다.
“하면 광혈교에는 중원을 침공한 병력만큼의 수가 더 있다는 것이오?”
“그건 아니겠지. 놈들의 병력은 산화되었다. 그러나 수뇌부 중 일부는 멀쩡히 살아남았겠지.”
화르륵!
기천웅의 몸에 불이 붙었다.
본격적으로 속도를 올리겠다는 뜻이었다.
“혈존대사의 짓인지 아니면 뭔가 얻을 게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놈들까지 박살을 내면 광혈교는 진짜로 멸망한다.”
광혈교 최후의 결전이다.
“가자!”
기천웅과 찰극평이 조양진인의 팔을 잡고 속도를 높였다.
파아아아앙!!
지금까지 펼쳤던 신법도 전력이 아닌 모양이었다.
두 사람이 바닥까지 힘을 쓰자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가 나왔다. 분지 위, 도시를 뚫고 가는 속도가 유성과도 같았다.
순식간에 바뀌고 또 바뀌는 풍경.
점점 화려한 도시는 보이지 않고, 촌락과 황량한 땅만이 그들을 맞아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저기다!”
기천웅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여유롭게 앉아 금 위에 손을 올린 아리따운 여인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만만치 않은 세 명의 남녀가 긴장한 채로 정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의 맞은편에는 삼백이 넘는 마인들이 엄청난 속도로 돌진하고 있었다.
‘역시, 우리 생각이 맞았구나!’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다. 정말이지 조금만 늦었어도 먼저 교전이 벌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기천웅의 안도는 곧 놀라움이 되었다.
팅!
가볍게 금현 하나를 튕기는 손 밑으로 보이지 않는 음이 낮게 깔린다.
순간 기천웅이 속도를 늦췄다.
“멈춰라!”
파바바바방!!
조양진인을 붙든 두 사람이 서둘러 신법을 멈추고.
그 즉시 하은교의 양손이 어지럽게 금현을 튕겼다.
티티티티팅!! 티팅!!
곡조랄 것도 없는, 마치 연주하기 전에 손을 푸는 악사처럼.
가볍게 퉁겨지는 금현 너머로 무형의 경풍이 화살처럼 쏘아졌다.
퍼퍼펑!!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한데도 무려 백여 장 밖에서 돌진하는 선두 마인들의 상체가 연신 비틀어졌다.
무형의 충격파를 상쇄하는 것이었다. 하은교에 육박하는 실력 없이는 백 장 거리라도 대처가 힘들었을 것이다.
“제법이구나.”
하은교가 미소를 지었다.
미소는 따뜻했지만 두 눈은 혹한이다. 손을 다 푼 강호 제일의 음공 고수가 본격적인 연주를 시작했다.
“극비광소곡(克悲狂笑哭)이란 자작곡이다. 어디 내 연주에 비할 만한 춤사위가 나오는지 보겠다.”
퉁! 투두둥! 따아앙!
빠르다가 느리게, 여운을 주면서도 거칠게.
비장하기 그지없는 칠현금의 곡조 위, 분지 일대를 휩쓰는 천하 명곡의 비애가 땅과 하늘을 어둡게 물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