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250)
흑백무제 1255화(1250/1255)
1255화. 불괴(不壞)의 땅 (5)
‘가주!’
하은교의 눈에 반가움의 빛이 떠올랐다.
‘드디어!’
당관의 경지는 여기 모인 이들 중 하위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흑검혈마가 죽고 기천웅도 힘을 잃어 가는 판이었다. 아군으로 무극수 하나가 더 참전한다면 정국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었다.
티이이이잉! 따다당!
내력으로 만든 방패 위에 걸린 일곱 가닥의 현줄이 무섭게 튕겨졌다.
딱히 곡을 연주하는 게 아닌데도 격정적인 음악처럼 들렸다. 그리고 그 음악 아래, 혈왕환신술이 크게 흔들렸다.
치이이이익!
철썩이던 용암이 환상처럼 흩어지고, 푹 꺼졌던 땅이 본래의 형상으로 돌아왔다.
음파로 술력을 분해하고 있었다. 진동에 기를 실어 상단전의 공능을 분쇄하는, 온 천하에 음제밖에 할 수 없는 위업이었다.
혈존대사의 얼굴에 다급함이 일었다.
“소교주!”
콰아앙!
천화룡의 묵룡염원(墨龍炎原)이 하은교의 몸을 오장 밖으로 밀어 냈다.
‘강하다.’
하은교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런 마공이 있다니! 숨쉬기도 어려울 지경이구나.’
그 화력은 비기를 개방하기 전의 기천웅과 겨룰 만하며, 쏟아 내는 뇌광의 힘은 아차 하다간 목숨을 잃을 정도로 과격하기만 했다.
이룬 경지 이전에 익힌 마공의 위력이 너무도 대단했다. 얼핏 보면 전력으로 싸우는 것 같지도 않은데 접근 자체가 힘들 지경이었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우우웅!
음화제무신공의 힘을 받은 일곱 가닥의 현줄이 하은교의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화아아아악!
순백의 진기가 칠현(七絃)에 스며들며 하은교의 의지에 따라 선명한 곡조를 연주했다.
땅! 따당! 티잉!
천화룡의 눈에 놀라움이 어렸다.
허공에 떠오른 칠현이 저 알아서 움직인다. 어딘지 모르게 서정적이면서도 마음은 편하게 만들어 주는 곡조를 뽑아내고 있었다.
화르륵!
묵룡염원이 꿈틀거리고 뇌룡강재의 힘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마기 파훼? 아니다. 이건 그런 공격적인 술수가 아니야.’
천화룡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 곡조가 마음을 침범하고 있다.’
자식을 잃고 방황하는 마음을 바로잡기 위해 스스로 만든, 금치여심(錦治女心)이라는 곡조였다.
비단으로 여인의 마음을 다스린다. 그 비단은 곧 음악이었으니, 자식 잃은 애절함을 혼신의 힘을 다해 다독이는 서글픔이 묻어 나온다.
우우웅!
그 곡조에 음화제무진기가 어려 고즈넉한 야산 위, 홀로 하늘을 바라보는 여인의 형상을 그려 낸다.
듣는 이의 상상을 절로 자극하는 곡조였다. 혈존대사는 물론 천화룡조차 싸울 마음이 생기질 않았다.
‘이런.’
힘으로 싸우는 거야 무섭지 않지만,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곡조 앞에선 쉽사리 손이 올라가지 않는다. 상중하, 모든 단전을 완벽하게 다스리고 있는 마왕들에게도 통하는, 어떠한 섭혼술로도 이룩하기 힘든 예술의 힘이었다.
콰앙!
하은교는 평안해진 마음으로 탄금천녀수를 구사했지만, 천화룡은 파괴적인 마공의 힘을 점차 상실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돼.’
천화룡이 힐끔 혈존대사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부족하단 말인가.’
마정까지 취한 그의 쌍룡광세마공은 혈존대사의 술력에 막강한 힘을 부여했다.
환신술이 아닌 혈존 고유의 술법을 쓸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마력을 주입해 주었건만, 아직도 부족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후방에선 당가주까지.’
그나마 다행인 건, 등장하며 발산하던 기파에 비해 신법 속도가 다소 느리다는 것이다.
‘더 빨리 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늦다는 건 내상이 심하거나 한계까지 힘을 모으고 있다는 뜻.’
당연히 후자일 가능성이 컸다.
번쩍! 콰르르릉!
뇌룡강재의 힘으로 하은교를 튕겨 낸 천화룡이 큰 소리로 외쳤다.
“혈존! 더는 위험하오!”
“나도 아네!”
혈존대사가 이를 악물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마력을 받았다면 일대를 완전히 죽음의 늪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을 것을.
‘어쩔 수 없다. 여기서 화의 근원을 끊어 버릴 요량이었거늘.’
최초의 계획은 천화룡과 함께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고수들을 보는 순간 마음이 바뀌었다. 당관 하나도 막지 못해 목숨을 걸고 여기까지 왔는데, 지원군이 있다 한들 이들 모두를 물리치고 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다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천화룡이 녹인 마정의 힘이 있다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하은교의 음공으로 인해 천화룡의 발이 묶이고 환술도 반파되었다.
더는 도리가 없었다.
“가세!”
우우웅!!
천화룡의 눈에 강렬한 마기가 어렸다.
그 순간, 우회한 호혈단의 마인들이 하은교를 급습했다.
하은교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어딜 감히!!”
재빨리 물러나는 천화룡을 일별한 그녀가 다가오는 군세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튕기듯 크게 원을 그린 섬섬옥수가 무지막지한 경력을 담고서 내리누르듯 움직였다.
콰콰쾅!!
탄현만근공(彈絃萬斤功)의 경력 앞에 호혈단 마인 삼십여 명이 그 자리에서 짜부라졌다.
보이지 않는 거인의 손이었다. 준비 시간이 필요한 절학이었으나 창졸간에 펼친 위력도 엄청났다.
운명의 교차였다.
하은교가 호혈단원을 공격한 순간 천화룡이 혈존대사를 어깨에 멨다.
그리고 그때, 이십여 장까지 거리를 좁힌 당관의 얼굴에 결심의 기색이 서렸다.
“피하십시오!”
우우우우웅!!
하늘을 날던 수십 개의 암기와 수백 개의 돌멩이들이 만류귀원신공의 힘을 받아 붉게 변했다.
하은교의 눈에 핏발이 섰다.
“하아아압!!”
탄현만근공의 힘을 또 한 번 구사하는 그녀였다.
만근의 압박감이 천화룡과 혈존대사의 몸을 짓눌렀다. 그 잠깐 사이 호혈의 마인들로 인해 몸 여기저기에 상처를 입었지만, 그녀는 경력을 회수하지 않았다.
천화룡이 소리쳤다.
“우우우우!!”
무지막지한 마룡후(魔龍吼)에 탄현만근공의 힘이 약해지고, 마인들의 기파가 치솟았다.
하은교가 이를 악물었다.
“당가주! 공격하게!”
당관의 얼굴에 미약한 망설임이 깃들었다. 지금 만천화우를 발하면 그 힘에 하은교까지 휩쓸릴 것이다.
그때였다.
파아앙!
영웅과도 같은 등장이었다.
청린신화공을 내려놓고 금제순화공을 이용,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하은교의 몸을 안고 전권에서 이탈하는 기천웅의 기지가 눈이 부셨다.
천화룡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호혈단의 움직임이 어수선해지는 그 순간.
쿠르르릉!!
천둥과 함께 당관의 손이 천화룡, 정확히는 혈존대사에게로 향했다.
‘만천화우(滿天花雨).’
치리리리링!!
암기와 돌멩이들이 마구 뒤섞이며 거대한 용의 형상을 이루었다.
‘독룡행(毒龍行).’
적아의 구분 없이 모든 영역을 파괴하는 기존의 만천화우와 달리, 표적만을 공격하는 만천화우의 대(對) 소수 전략 무공이었다.
콰아아앙!
땅을 가르며 쏘아진 거대한 용이 천화룡과 혈존대사를 향해 아가리를 쩍 벌렸다.
표적을 따라 이동한다 해도, 용의 몸체가 워낙 굵고 거대했다.
퍼버버버벅!
피하지 못한 호혈단 마인 오십여 명이 암기와 돌로 뭉쳐진 용체에 부딪혀 피 보라로 화했다.
파파팡!
백도괴마를 튕겨 낸 찰극평이 천화룡을 향해 염제수를 날리고, 강량과 진양, 지소현이 혼신의 힘을 다해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훅! 콰아아앙!
상식을 불허하는 움직임으로 염제수를 회피한 천화룡은 문득, 두 다리를 압박하는 강력한 허공섭물의 힘을 느꼈다.
천화룡이 우측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기천웅과 함께 달아난 하은교의 코와 입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천화룡을 겨눈 손에 상상을 초월하는 신기(神氣)가 맺혀 있었다.
‘저년이!’
만근의 힘으로 두 다리를 묶어 버렸다. 무려 삼십여 장 밖으로 이탈했음에도, 지닌 모든 힘을 쥐어짜 천화룡의 발밑에 탄현만근공의 힘을 쏟아 넣은 것이다.
콰쾅!!
무섭게 가까워지는 독룡행의 힘.
천화룡이 외쳤다.
“사제장!!”
번쩍!
피를 토하며 달려온 전대 사제장이 독룡행을 향해 두 손을 마구 휘둘렀다.
카카카카카캉! 푸화아아악!
이미 움직이기도 힘들 만큼의 내상을 입은 몸이었다.
독룡의 아가리가 신비인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신비인의 영육은 그 순간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하지만 그의 희생은 가치가 있었다. 목숨을 다한 일격에 독룡행의 이동 경로가 미세하게 틀어진 것이다.
파지지지지직!!
천화룡의 두 다리에 전광이 깃들고, 강량 등과 싸우던 호혈단주가 하은교를 향해 비검술을 날렸다.
치링!
섬전처럼 쏘아진 검격, 하은교로서도 탄현만근공의 힘을 회수할 수밖에 없었다.
천화룡이 완전한 자유를 얻는 순간이었다.
파아아앙!!
인간의 육신으로 구사할 수 없는 속도를 낸다.
아비인 광혈교주 천위룡이 그랬던 것처럼, 뇌룡의 힘을 끌어와 엄청난 속도로 이동하는 그의 움직임은 한 줄기 벼락과도 같았다.
찰나지간 모두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 많은 고수가 모였는데도 기어이 천화룡은 혈존대사를 구해 내고야 말았다. 지금 와서 천화룡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는 고수는 아무도 없었다.
포획 실패, 섬멸 실패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였다.
“칠성무곡(七星武曲), 태극탈백(太極脫魄).”
파랗게 질린 안색의 조양진인.
천화룡의 측방에서 나타난 그의 검이 장중한 움직임을 발했다.
“원무신검(元武神劍), 백하무량(白河無量).”
후우우우우웅!!
칠성군검진의 남은 진력에 원정까지 불사른 그의 검이 혈존대사의 등을 고정한 천화룡의 손목을 향해 나아갔다.
빠르거나 강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어쩐 일인지, 조양진인이 발한 태극의 검결은 너무나도 쉽게 천화룡의 기파를 뚫고 팔뚝까지 진입해 있었다.
천화룡의 얼굴에 경악이 깃들었다.
파사현정(破邪顯正), 파마멸사(破魔滅邪)의 힘이다. 도가 문파 최강이라는 무당파 도사의 목숨을 건 일격이 마의 화신이 될 광혈교 소교주의 마공을 뚫어 버리는 순간이었다.
찰나에 찰나를 쪼갠 순간.
‘위험하다. 팔 하나가 날아가는 정도가 아니야. 이 검격이 침투하면 마기가 폭주한다.’
마기가 폭주하는 순간 쌍룡광세마공도 제힘을 내지 못할 것이다.
아직 적들이 건재했다. 그런 상황에서 선기가 침투하면 십 할의 확률로 죽는다.
천화룡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희뿌연 검기가 그의 팔목을 휘감으려는 순간.
사악!
혈존대사를 잡고 있던 팔이 어느새 후방 아래로 내려왔다.
고정되지 않은 혈존대사의 몸이 그 자리에서 떨어졌다.
떨어지기 전, 경악한 눈으로 천화룡의 뒷모습을 보는 그의 얼굴이 실로 압권이었다.
시간이 다시 빨라졌다.
파아아앙! 쾅! 퍼억!
혈존대사를 놓고 기어이 전권에서 벗어나 버린 천화룡.
갈 길 잃은 태극검기가 땅을 부수고, 혈존대사의 몸이 땅에 떨어졌다.
파파팡!!
찰극평의 염제수가 천화룡의 후방을 공격했다. 진짜 죽일 요량이 아니라, 혹시라도 되돌아올 가능성을 없애 버리기 위함이었다.
콰콰쾅!!
독룡행의 일격이 대지에 거대한 고랑을 만들어 내고 박살 나 흩어졌다.
흩어진 암기들은 기어이 호혈단주와 마인들의 몸을 휩쓸어 버렸다. 끝나도 끝나지 않은 공격, 고금에 손꼽을 최강의 기예는 그렇게나 지독하고 무서웠다.
푸스스스스!!
삽시간에 차가워진 공기, 살아남은 일부 마인들마저도 멍하니 혈존대사를 바라보았다.
스륵.
조양진인과 찰극평이 혈존대사 앞에 나란히 섰다.
광혈교의 소교주는 놓쳤지만, 혈교의 핵심 인물을 사로잡은 것이다.
“끝났다, 혈존대사.”
혈존대사의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