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253)
흑백무제 1258화(1253/1255)
1258화. 전면전(全面戰) (2)
“여기군요.”
“그래.”
“세상에나…… 이렇게나 멋지다니.”
거대한 흑제성을 보는 연지평의 얼굴에는 경이로움이 가득했다.
성문 너머에서도 뾰족하게 솟은 지붕들이 수십 개나 보였다. 거대한 영역을 둘러싼 성벽은 무림 고수의 신법으로도 오르지 못할 만큼 높았고, 중앙 성문은 어찌나 견고해 보이는지 화포에 맞아도 뚫리지 않을 것 같았다.
크기는 무림맹보다 작지만, 그보다 더 밀도가 높다는 인상을 준다. 마치 어둠으로 몸을 가린 거인이 웅크리고 있는 듯했다.
“가자.”
성문 앞에 도달하니, 수문위들이 창을 교차하며 두 사람을 막았다.
“이곳은 흑제성이오. 신분을 밝히시오.”
날카로운 반응이었다.
흑도의 거친 기질이 묻어 나오면서도 전시(戰時)라 한껏 예민해진 모습이 보인다.
연지평은 또 한 번 감탄했다.
희대의 거인 양천 아래 모여 정예화된 흑도이니 뭐가 달라도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연히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더 정예화된 느낌을 준다.
고작 수문위를 보는데도 이러할진대, 정예 부대나 주축 고수들은 얼마나 절도가 있을는지.
쿵.
광룡부가 땅에 박혔다.
연호정이 담담히 말했다.
“이 도끼를 보고도 모르겠는가.”
“……?!”
“연락을 받았을 터인데? 소정광에게 닿지 못했나?”
느닷없이 오대신장의 이름을 꺼낸다.
하지만 수문위들은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 도끼는 설마?!”
최대한 기도를 갈무리했다지만, 연호정의 무시무시한 존재감은 감춘다고 감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 존재감 때문에 도끼조차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제야 도끼를 확인한 수문위들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설마, 성주님이십니까?”
연호정이 품에서 철패 하나를 꺼내 들었다.
“암무단주에게 따로 연락하여 먼저 들어가라 했는데, 시간상 열흘에서 보름 전쯤 도착하지 않았나 싶군. 암무단주도 안에 계신가?”
쿵!
수문위들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성주님을 뵙습니다!”
“성주님을 뵙습니다!”
연호정이 무안한 듯 두 사람을 일으켰다.
“그러지 말게. 무릎 깨지겠어.”
부축을 받고 일어난 수문위들의 얼굴에 감격한 기색이 가득했다.
흑제성주 흑백무제 연호정.
그 이름은 흑도 무림에서 전설과도 같았다.
젊다고는 하나, 이제 와서는 누구도 그를 나이 때문에 가벼이 보지 않는다. 오히려 젊기 때문에 그는 신화가 되었고 영웅이 되었다.
하물며 연호정은 백도 정파의 명문가 출신인데도 스스로 양천 휘하에 들어가 제자가 되었다. 이후 출중한 능력과 무공으로 천하를 놀라게 했으니, 흑도인들에게 연호정은 영웅 이상이었다.
“영광입니다, 성주님. 이렇게 뵙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감동으로 가득한 목소리.
연지평은 자신의 형이 얼마나 존경받는 인사가 되었는지 수문위들의 반응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정말이지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문을 열어 주게.”
“아……!”
수문위가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만 성주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안에 기별을 넣도록 하겠습니다.”
연지평의 눈이 커졌다.
‘기별이라니? 성주인데?’
당장 문을 열고 안으로 모셔도 이상하지 않을 판에 기별을 넣겠다는 것은 성주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로도 해석될 수 있다.
뜻밖에도 연호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래야지. 나도 많이 지치긴 한 모양일세. 절차를 잊었군.”
“죄송합니다. 이 죄, 달게 받도록 하겠습니다.”
“하하, 이 사람아. 나와 태상께서 만든 법인데 어찌하여 벌을 주겠나. 걱정하지 말고 안에 기별을 넣도록 하게.”
“감사합니다!”
그렇게 수문위가 좌측 쪽문으로 들어갔다.
연지평이 조심스레 물었다.
“형님, 저 무사분 말이 무슨 뜻입니까?”
“흑도에는 워낙 별종들이 많지. 굳이 흑도가 아니더라도 지금은 전시가 아니더냐. 철패를 위조하거나 정체를 숨긴 자가 성에 들어올 수도 있으니, 성주라 하더라도 철저한 확인을 거치지 않고선 들이지 말라고 했다.”
연지평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 법을 형님과 투왕께서 만드셨다고요?”
“법이라고 하기에는 뭐하지만, 여튼 그렇다.”
“……대단하십니다, 형님.”
그 자신은 그렇지 않지만, 권력을 가진 자가 얼마나 쉽게 변하는지는 연지평도 잘 알고 있었다.
흑제성주라면 무림의 힘을 양분하는 당대 최고 권력자 중 하나다. 그런 사람이 이런 답답한 절차를 거쳐서 입성한다고 하니, 연지평은 놀라우면서도 형이 자랑스러웠다.
잠시 후.
“성주님!”
허겁지겁 뛰어나온 소정광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신(臣) 오대신장 소정광, 흑도 무림의 주인을 뵙습니다!”
소정광과 함께 달려온 젊은 장로들과 부대장들이 너도나도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성주님을 뵙습니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모두 오랜만일세.”
“그동안 수많은 전투로 인해 심신이 얼마나 지치셨습니까. 어서 안으로 들어오셔서 편히 휴식부터 취하시지요.”
소정광의 말투는 이제 각이 딱 잡혀 있었다. 감각만으로 천하에 내로라하는 책사들을 눈 아래로 보던 소정광이, 지금은 제갈공명과 같은 품격까지 갖춘 듯했다.
“쉴 시간이 있겠나. 중원이 요동을 치고 있는 판인데. 여하간 일단 들어가지.”
그렇게 연호정은 실로 오랜만에 흑제성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성이었지만, 고향에 돌아온 듯 편안했다.
* * *
“호정.”
“너?”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이거 정말 오랜만인데.”
제갈아연이 씨익 웃었다. 하얗게 드러난 치아가 정갈했다.
“공식적인 자리 아니니까 성주 대우는 안 해도 되지?”
“뻔뻔한 건 여전하구만.”
“너만 하겠냐? 맨날 누님을 부려 먹기만 하고 말이야.”
“부려 먹을 만하니까 부려 먹었지. 그나저나…….”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대단한데? 예전과는 딴판이야. 무공 수련을 허투루 하지 않았어.”
무종을 눈앞에 두었을 뿐 넘어서지는 못했으니, 내로라하는 고수들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낼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그녀의 나이를 생각하면 이 또한 대단한 것이다. 워낙 재능 넘치는 괴물들이 판을 쳐서 그렇지, 학식으로 유명한 제갈세가의 혈육이 이 연배에 이만한 무공을 쌓았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아버지한테 한 수 제대로 가르침을 받았지.”
“가문의 비기를 물려받았군. 군사님의 기도와 흡사해.”
“귀신이네, 여전히.”
제갈아연이 연호정의 어깨를 토닥였다.
토닥임이 점점 강해지다 못해 퍽퍽 소리가 났다.
“워낙 여기저기 쏘다니느라 바빠서 만나기도 힘들었지. 하지만 너에 대한 소문은 언제나 천하를 진동했어. 흑백무제라…… 너와는 통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이상하게 잘 어울리는 별호야.”
“어깨 아프다. 그만 두들겨라.”
“웃기시네. 성천에 이름을 올린 절대고수께서 고작 이 정도에 엄살이야?”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제갈아연은 정말 크게 반가워했다. 얼굴까지 발갛게 물든 걸 보면, 단순한 반가움 이상의 감정을 느끼는 듯도 했다.
연지평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누님.”
“이게 누구야!”
반가움은 비슷했지만, 연호정을 대할 때보다 훨씬 더 편해 보인다.
“와, 너 정말 몰라보겠다! 내가 알던 지평이 아니야. 예전의 그 하얗고 동글동글 귀여웠던 얼굴은 어디로 가고, 완전히 사내대장부가 다 됐잖아!”
“과찬이십니다.”
“게다가 이 분위기……! 무종을 넘었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정말 대단해. 세상에, 처음 봤을 때와는 완전히 딴판이야. 나중에 누가 나 괴롭히면 너한테 일러바치면 되겠다!”
연지평이 무안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아직 한 명의 무사로 인정받을 만한 수준은 아닙니다.”
“네가 그러면 난 뭐가 되니?”
제갈아연은 새삼 연씨 형제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핏줄이 다른 건지, 무공이 다른 건지.’
형인 연호정은 중원 무림 최강자들과 동급인 고수가 되었고, 동생인 연지평도 그 젊은 나이에 무종을 넘어 종사급의 검객이 되었다.
한 가문의 형제가 이토록 빠르게 개화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심지어 두 사람이 피운 꽃은 당대는 물론 고금을 뒤져도 찾아보기 힘들 만큼 크고 아름다웠다.
제갈아연은 내심 확신했다. 차기 천하제일가는 벽산연가가 될 거라고.
동시에 생각했다.
‘절대 받아들이지 않겠지.’
연호정이 흑제성주가 된 것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함이지, 야망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게다가 동생인 연지평 역시 가주직에 큰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 성품에 이만한 무력이라면 부담감은커녕 자신감이 넘쳐야 마땅한데도 스스로를 낮추고 있다.
훗날 전쟁이 끝나고 평화를 되찾아도, 이 형제들은 절대 세력을 이끌고 군림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천성처럼 보였다.
“그나저나 누님께서는 여기 어떻게……?”
“어? 몰랐어?”
어깨를 으쓱이는 제갈아연의 모습에선 사람 냄새가 났다.
“흑백이 동맹을 맺었지만 머리를 쓸 줄 아는 사람은 대부분 무림맹에 몰렸잖아. 물론 흑도에도 찾아보면 인재가 많겠지만, 당장 소 신장 혼자서 방대한 일을 처리하기에는 힘들겠지. 그래서 내가 온 거야.”
“그렇군요.”
“막상 와 보니 뭐 도울 것도 없더라. 소 신장의 지략과 안목은 천하를 다투는 경지에 올랐어. 너무 똑똑해서 질투가 날 지경이더라.”
그때, 소정광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 말씀하시면 안 되지요. 제갈 소저께서 안 계셨다면 흑제성의 조직 편성, 군사부 위계도, 정보 처리 등등 온갖 문제가 터졌을 겁니다. 확실히 명문가에서 배운 분은 뭐가 달라도 다르더군요.”
제갈아연의 얼굴이 붉어졌다. 소정광이 저렇게 말해 주니 괜스레 부끄러웠던 것이다.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일단 좀 씻어야겠네. 한 시진 뒤에 다시 모이도록 하세.”
“마음 같아서는 며칠은 푹 쉬시라 하고 싶습니다만…… 성주님 말씀대로 상황이 상황인 만큼 빨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겠습니다.”
한 시진 후.
“여깁니다.”
소정광이 지도의 한 곳을 가리켰다.
“현재 하북 무림이 초토화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무림맹 역시 그에 대응하고 있지요. 하북으로 들어온 신화교 병력은 이만이 넘는다고 하는데, 전력의 상세 파악은 되지 않았습니다.”
연호정의 눈이 차가워졌다.
“지금 이 순간에 치고 내려왔다…… 곧장 터질 줄은 알았지만, 이만이 넘는 병력이라면 그야말로 총공세나 다름이 없어.”
“그렇습니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하나 있습니다.”
“퇴로가 없군.”
소정광의 얼굴에 진심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제갈아연 역시 감탄한 얼굴로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이만이 넘는 대군이 남하했다면 작심을 한 셈이지만, 동시에 그들을 잃으면 신화교는 회생 불능의 타격을 받는 셈입니다. 그런 만큼 언제라도 빠질 수 있도록 퇴로를 만들어 놓아야만 합니다.”
“…….”
“한데 놈들에게는 그런 게 없습니다. 기껏해야 산서까지 전화(戰禍) 속으로 끌어들인 건데, 그것은 북부를 점령하기 위함이지 퇴로를 만든 것이 아니에요.”
“퇴로를 만들려 했다면 역시나 육지가 답이니 산동도 아닐 터, 믿는 바가 없었다면 일을 치지도 않았겠지만…… 지금 상황에선 하북을 박살 낼 게 아니라 점령하고 내실을 굳혔어야 했다.”
“역시 성주님과는 대화가 통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소정광의 얼굴에도 심각한 빛이 어렸다.
“퇴로 없는 남진, 내실을 다지지 아니하고 여기저기 전화의 불씨를 옮기는 행위. 몰살을 당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답은 하나뿐입니다.”
“성동격서.”
“그렇습니다. 지금 같은 경우는 성북격동이겠지요.”
소정광의 손이 동해를 가리켰다.
“사음교, 사음교가 동해로 밀고 들어와 황궁을 공격할 확률이 지극히 높습니다.”
“…….”
“……그리고 그곳에는 성주님의 가문, 연가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