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256)
흑백무제 1256화(1251/1266)
1256화. 불괴(不壞)의 땅 (6)
“가주님!”
뒤늦게 도착한 당가 정예 부대가 당관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당관은 늦은 그들을 탓하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그들이 늦은 게 아니라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빨랐던 것뿐이었다.
“잔당을 쓸어 버려라.”
당가인들이 살기를 피워 올리며 남은 호혈단을 공격했다.
호혈단은 끝까지 저항했지만, 당가의 정예들을 상대로 유효한 공격 한번 가하지 못했다.
결국 분노한 당가인들의 손에 호혈단이 전멸했다.
“후욱. 후욱.”
당관이 숨을 몰아쉬며 혈존대사를 향해 걸어갔다.
엄청난 두통과 내상으로 인해 눈앞이 번쩍번쩍했다.
무리한 신법과 극한의 힘을 담은 만천화우를 두 번이나 쓴 하루였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지만, 무서운 자존심이 그의 두 다리를 움직이게 했다.
“이제야, 잡았구나.”
힘이 빠진 목소리임에도 묵직한 위엄이 가득했다.
혈존대사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나를 죽일 참인가.”
“하면 살려 둘 거라 생각했더냐.”
“차라리 소교주를 쫓는 것이 나을 텐데. 그는 교주보다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이다. 제 애비가 이룬 경지에 이십 년은 더 빨리 올랐어. 이대로 놔두면 너희들로서도…….”
“죽기 싫어 발악하는 거야 어쩔 수 없다지만, 구하러 온 사람까지 희생양으로 삼는구나.”
당관의 얼굴에 혐오의 감정이 떠올랐다.
“끝까지 추하군.”
혈존대사가 이를 악물었다.
자존심이 갈기갈기 찢어진다. 속이 쓰리다 못해 구멍이 뻥 뚫린 것만 같았다.
마음 같아선 쌍욕이라도 퍼붓고 싶은데,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살길을 도모해야만 했다.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사지에서도 끝까지 삶을 도모한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목숨이었다.
“나는 혈교의 제사장이다. 나를 갖지 못하면 삼교도 정통성을 잃는다. 고로, 그들은 나를 필요로 한다.”
혈존대사가 고개를 들었다.
핏발 선 눈, 죽음의 늪에 빠졌는데도 불구하고 두 눈은 생의 의지로 가득했다.
오랫동안 수십, 수백만 생명을 유린했던 혈교의 이인자도 결국 사람일 뿐이다. 지고의 영력으로 육신을 잃더라도 귀(鬼)가 되어 살아갈 수 있다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육신에 대한 집착이 강할 수밖에 없는 남자였다.
“하지만 너희는 알아야 할 것이다. 내가 죽는다면, 그때부터 삼교는 제대로 미쳐 날뛸 것이다. 그들이 지금껏 힘이 없어서 전면전을 선포하지 않았을 성싶으냐? 결코 그렇지 않다! 그들은……!”
그때, 찰극평이 말했다.
“확실히 맛이 가긴 갔군.”
“……!”
“이곳에는 삼교 출신이 둘이나 있다. 그중 한 명은 교주위에 올랐던 사람이지. 통할 거짓말을 하라.”
혈존대사가 버럭 소리쳤다.
“닥쳐라, 버러지 같은 놈!”
“뭐라?”
“불의 마가(魔家)는 오직 정화의 업을 타고난 가문일 뿐, 너희에게는 애초에 마(魔)의 손길이 닿지도 않았다! 순수한 사마(邪魔)에 속한 집단은 광혈과 사음뿐이야! 삼교? 외부에서 그리 불렀을 따름이다! 너희 신화는 다른 두 교에 비할 만한 놈들이 못 돼!”
찰극평의 눈에서 살기가 쏟아졌다.
비록 신화교를 배신했지만, 신화교에 대한 애정만큼은 누구 못지않은 그였다. 또한 그 역시 광혈과 사음을 싫어했지만 이런 식의 모욕은 참을 수가 없었다.
“죽일 놈이……!”
“기천웅의 아들놈이 왜 사음교주에게 놀아났는지도 모르겠지! 그건 그놈이 멍청해서가 아니다! 그게 당연한 순리이기 때문이야!”
“무슨 개소리냐! 순리라니?!”
“집 지키는 개가 주인에게 꼬리를 흔드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닥쳐라!”
그때였다.
“재미있는 말을 하는구나.”
어느새 하은교의 부축을 받고 다가온 기천웅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역천의 화신과도 같은 자가 순리를 말하다니, 부끄러운 줄 아시게.”
“기천웅!”
“네놈이 간사하기 그지없는 언사로 여기 모인 사람들을 뒤흔들려 해 봤자,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지친 얼굴, 안 그래도 하얀 피부가 분을 덧칠한 듯 백지장처럼 변했다.
그 창백한 얼굴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청안(靑眼) 앞에, 혈존대사는 입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자네는 끝이야.”
“닥쳐라, 배신자! 이 내가, 혈교의 제사장이 이런 변방의 오지에서 죽을 것 같으냐!”
당관이 차갑게 말했다.
“죽어야지.”
혈존대사가 움찔했다.
비난과 살기가 가득한 사람들의 눈빛과 달리, 당관의 눈빛에는 아무런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증오와 분노, 한과 슬픔 그 모든 것을 초월했다. 움직이기도 힘든 몸이지만 정신력만큼은 넘치도록 왕성한 그였다.
“네놈이 말한 그 변방 오지의 땅에서, 혈교 제사장은 죽는 것이다.”
“나는 죽지 않는다! 이 역겨운 땅에서……!”
“그 역겨운 땅을 한 줌이라도 얻으려고 이 난리를 친 네놈들의 행태를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 똑똑히 알아 두거라.”
훅.
당관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이 땅, 이 사천이란 땅은 수많은 사람이 지켜 온 천하 명지다. 본가는 사천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으며, 지금껏 단 한 번도 사천을 외세에 빼앗긴 적이 없느니라.”
“……!”
“이 땅은 불괴(不壞)의 땅. 무너트릴 수도, 훔쳐 갈 수도 없는 우리의 터전이다. 네놈들이 다시 발호하여 사천을 넘본대도, 설령 수천 년을 노력한다 해도 그 야망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당관이 턱을 치켜들었다.
특유의 오만한 자세가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걱정하지 마라. 남은 잔당도 모두 네놈의 곁으로 보내 줄 테니까.”
혈존대사가 버럭 소리쳤다.
“네 아비의 원수는 광혈교주다! 광혈교주의 아들은 이미 저 멀리 사라졌어! 나는 네놈의……!”
“내 아버지의 원수는 광혈교주지만, 사천의 원수는 너희 전부다.”
우우웅.
모이지 않는 진기를 기어이 끌어모아 삼양신장의 경력을 만들었다.
“놓친 먹잇감을 어떻게 잡을지는 네놈이 고민해 줄 바가 아니야.”
혈존대사의 얼굴이 무너져 내렸다.
당관의 말을 듣는 순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생에 대한 집착마저 뭉개지는 것을 느꼈다.
화아악!
모든 것을 포기하니 그제야 끔찍한 살기를 발한다.
당관은 당가주로써 분노와 증오, 살심을 모두 내려놓았지만, 혈존대사는 개인으로써 분노와 증오, 살심에 사로잡혀 끔찍한 기분에 휩싸여 버렸다.
그것이 두 사람의 차이였다.
진정한 왕과 결코 왕이 될 수 없는 마졸의 차이인 것이다.
“나는 또 다른 육신을 거머쥐고 이 땅을 유린할 것이다. 지금 날 죽였다고 기뻐하지 마라! 나는 반드시 되돌아온다!”
그때였다.
-말했지? 죽을 거라고.
혈존대사의 눈이 흔들렸다.
또 다른 나, 통천진인의 목소리가 예언처럼 들려왔다.
-내 몸으로 받아들인 천기(天氣)의 밀도는 약하지 않아. 그 천기로 인해 너는 피폐해졌고, 결국 이렇게 죽는 것이다.
혈존대사가 부르르 떨었다.
“네놈이…… 스스로의 목숨을 바쳐 나를 죽이려 했단 말이냐?”
-수백 년을 살아온 귀(鬼)가 이 정도로 소멸하진 않겠지. 그러나 너는 결코 예전과 같을 수 없어. 귀로 돌아간다 한들, 다른 사람 육신에 들어간다 한들 제사장의 자격을 얻을 순 없을 것이다.
통천진인의 목소리가 다시 아득해졌다.
-너를 너답지 못하게 만드는 것, 그것만으로도 나는 내 천명을 다했다. 오직 그것만을 위한 인생이었대도 나는 좋아.
점점 사라져 가는 목소리.
그제야 혈존대사는 알 수 있었다. 이 육신의 본래 주인, 통천진인이 혈신지기를 받아들인 것은 오직 자신을 무너트리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강호 최고의 기인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만인의 존경을 받았던 한 도사는 그렇게, 주변의 오욕을 뒤집어써 가면서까지 천명을 이룬 것이다.
혈존대사의 얼굴에 씁쓸함이 어렸다.
“……빌어먹을 대륙 놈들.”
당관의 손이 냉정하게 휘둘러졌다.
퍼억!
혈존대사의 머리통이 그대로 부서졌다.
피와 뼛조각, 뇌수를 쏟으며 쓰러진 혈존대사의 몸은 어느새 허연 연기를 피워 올렸다.
치이이이익!
지독한 냄새였다. 단순히 살이 부패해서 나는 냄새가 아니었다.
죽음의 냄새였고 허무의 냄새였다. 이 세상 모든 악취를 똘똘 뭉쳐 놓은 듯한, 악(惡)의 정수와도 같은 냄새였다.
“후우.”
비틀거리던 당관이 그제야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가주님!”
“괜찮으십니까?!”
다가오는 가원들을 제지한 당관이 하은교를 바라보았다.
“고생하셨습니다, 선배님.”
“고생은 자네가 더 했지. 그리고…….”
하은교가 기천웅과 찰극평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큰일 날 뻔했네.”
“그렇군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당관은 두 사람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조양진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조양진인의 표정은 지극히 온화했다.
억지로 다시 일어선 당관이 조양진인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무당의 선배님 덕분에 기어이 이놈을 잡아낼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당가주.”
“말씀하십시오.”
“덕분에 이제야, 먼저 간 사형제들을 쫓아갈 수 있겠소. 고맙소.”
직접 혈존대사를 죽이진 못했지만, 혈존대사를 사로잡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거면 된 것이다. 먼저 간 사제들도 잘했다고 손뼉 정도는 쳐 줄 것이다.
조양진인이 눈을 감았다.
“한마디만 하겠소.”
“말씀하십시오.”
“괴물을 잡으려다가 괴물이 되지는 마시오.”
“……알겠습니다.”
조양진인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푸스스스스.
그의 몸이 가루가 되어 휘날렸다.
부패하듯 썩어서 문드러진 혈존대사의 육체와는 달리, 그의 몸은 등선이라도 한 듯 깨끗한 재가 되어 흩어졌다.
조양진인이 남기고 간 옷을 가만히 바라보던 당관이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다들 몸을 보해야 할 터이니 본가로 가시지요. 본가에는 최고의 의원들이 있으니, 회복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기천웅의 눈이 깊어졌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은…….”
“알고 있소.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더더욱 잘 쉬어 둬야지.”
당관이 저 멀리 동쪽을 바라보았다.
“마땅히 스러져야 할 전장의 피 냄새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진해지고 있소.”
* * *
“형님. 정말 이대로 가실 겁니까?”
팽만호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모두의 얼굴이 그러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좋지 않다. 너희도 어서 무림맹으로 돌아가.”
“그래도 오랜만에 뵈었는데 한 번쯤 맹으로…….”
“속 편한 소리는 그쯤 해라. 지금은 전시다. 그리고 나는 흑제성의 성주야.”
“흑백의 연합이 끈끈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대로 할 일이 있다. 너희도 너희 나름대로 할 일이 있을 것이다. 의정군은 대단한 전력이야. 섣불리 움직이지 말고 무림맹의 명령을 기다리도록 해라.”
“정히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그때, 연지평이 말했다.
“형님.”
“너도 의정군과 함께 돌아가라.”
“싫습니다.”
“이놈아.”
“무림맹에는 있을 만큼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뵈었으니, 형님이 주인으로 계신 흑제성 구경을 해 볼까 합니다.”
연호정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정 그러고 싶다면 그래라.”
연지평은 무림맹에서 딱히 직책이라는 것이 없었다. 하물며 흑제성의 평판이 좋아진 지금, 성으로 가도 가문의 명성에 흠이 되진 않을 것이다.
그렇게 무림맹 인사들과 짧게 인사를 나눈 연호정은 연지평과 함께 곧장 호남으로 진입했다.
알 수 없는 불길함은 어느새 실체를 갖추고 그의 마음을 사정없이 뒤흔들고 있었다.
‘불길하다. 전장의 공기가 더 짙어지고 있어. 하루빨리 정비하고 황궁으로 가 봐야겠다.’
이틀 후.
신화교의 전 병력이 하북을 휩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