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260)
흑백무제 1260화(1255/1266)
1260화. 전면전(全面戰) (4)
“후우, 후우.”
“헉헉!”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가원들의 모습은, 팽무강으로서도 꽤 낯선 것이었다.
팽가의 도객들은 타고난 강골에 극단적인 체력 훈련으로 몸을 완성시킨다. 팽가 내공심법들 하나하나가 폭발적인 공력을 쏟아 내기에, 지구력이 받쳐 주지 않을 시 적에게 반격당할 위험이 커지기 때문이다.
체력 소모가 심하다 한들 잠깐의 휴식만으로도 힘을 되찾는 녀석들이거늘, 아직도 호흡이 저리 거칠다.
‘내상이 제대로 치료되지 않았군.’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신화교의 무자비한 공세로 가문의 터가 박살이 났다. 재화(財貨) 따위야 아쉬울 게 없지만, 도객들을 위해 쌓아 둔 내상약과 영단 등의 소실은 참으로 뼈아픈 것이었다.
그것들만이라도 챙겼다면 좋았을 것을, 현장에 뒤늦게 도착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내가 잠시 번을 서겠다. 내상이 심한 자들은 지금 운기로 체력을 회복하라.”
언제나처럼 강인한 목소리였다.
도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리에 앉아 운공에 들어갔다. 평소라면 감사합니다, 말 한마디라도 했을 텐데 그럴 기운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북쪽 비탈길 앞으로 내려온 팽무강은 저 멀리 도시를 바라보았다.
야밤인데도 온통 환했다. 도시 하나가 불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으드득.
팽무강의 입에서 이 갈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본디 전쟁이란 이런 것이라지만.’
하북 무림의 문파 중 칠 할이 멸문했고, 남은 삼 할도 제구실을 못 할 만큼의 피해를 입었다.
팽가 역시 이 싸움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가문의 도객 중 육 할이 넘는 병력이 전사했으며, 남은 사 할의 병력 중에도 멀쩡한 도객은 십수 명에 불과했다.
그것만으로도 피눈물이 흐를 일이지만, 진짜 화가 나는 것은 무고한 민초들의 죽음이다.
신화교의 대대적인 공세 앞에, 하북 무림은 맞서 싸우는 것보다 민초들을 지키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신화교의 공격이 강해도 너무 강했다는 것이었다.
팽무강은 신화교도들을 떠올렸다.
‘도대체 그건 뭐였지?’
교의 총 전력을 파견한 건 알겠다. 그들 중 고수 아닌 자들이 없었고, 특히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진격하며 열양공을 있는 대로 구사하는 놈들의 무공은 가히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중 가장 기가 막힌 것은 바로 화기(火器)였다.
‘벽력탄과 비슷해 보였지만, 그것과는 또 달랐다. 그 정도 범위를 아우르는 유탄(榴彈)은 본 적이 없어.’
벽력탄보다도 작은 크기인데 그 위력은 황궁의 중형 화포에 준했다.
그만한 화탄을 맨손으로 던져 대니 막을 수가 없었다. 실제로 벽력탄 같은 물건인 줄 알고 도기(刀氣)를 써서 막으려 했던 팽가 장로 팽허군이 폭탄에 온몸이 걸레짝이 되어 즉사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거의 독에 가까운 화약 가루를 뿌리면서 열양공을 이용, 사방 천지를 폭발시키며 전진하는 신화교도들의 공세는 공포 그 자체였다.
심지어 팔이 날아가거나 심각한 외상을 입어도 두려움이 없었다. 화정을 이용해 상처를 치료하며 덤비니, 평범한 무림인으로서는 버티기가 힘들었다.
결국 하북 무림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손쉽게 패퇴했다. 만약 놈들을 하나라도 더 죽일 작정으로 싸웠다면, 신화교의 병력 중 이 할은 끌고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잘못된 판단이었을까.’
팽무강의 눈이 깊어졌다.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끝까지 남아 물고 늘어져야 했을까?’
민초는 민초대로 죽고, 문파 병력은 병력대로 산화했다.
덕분에 목숨을 건진 민초들도 있었지만, 그들만을 위해 움직였다고 하기엔 피해가 너무 막심했다.
팽무강은 눈을 감아 버렸다.
‘……아니다. 설사 우리 모두가 죽었다 한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육대세가의 가주라는 자신이 민초와 적의 말살을 두고 고민했다는 것만으로도 낙제점이다.
달리 말하면, 그 정도로 팽무강의 정신도 망가졌다는 뜻이었다. 가원들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팽가의 병력을 이리 허무하게 잃은 것도 모자라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후퇴까지 했으니 제정신이긴 힘들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답답하구나. 이대로 숨죽이고 있어야 한다는 현실이 참으로……!’
펑!
그렇게나 멀리 떨어졌는데 도시에서 뭔가 터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울렸다.
팽무강의 눈에 핏발이 섰다.
무슨 폭발일까? 저 폭발로 또 누가 죽은 것일까? 저 미친놈들은 대체 어찌하여 이런 무도한 학살극을 벌이고 있는 것일까?
‘잠시만 참자. 아주 잠시만.’
그때였다.
“가주님.”
“오셨는가.”
팽가의 삼장로 팽일교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번은 제가 서도록 하겠습니다. 가서 운기를 하십시오.”
“나는 괜찮네.”
“알고 있습니다만, 현재 본가 최대의 전력은 가주님이십니다. 무공 이전에 가주님께 문제가 생기면 저희도 다 죽는 거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휘권자가 목숨을 잃으면 제아무리 용맹한 군대라도 순식간에 와해될 테니까.
팽무강이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하네만 운공을 하고 싶어도 집중을 못 할 듯하네. 차라리 여기서 번을 서는 게 더 낫지 싶어.”
“하면, 저도 이곳에서 함께 번을 서겠습니다.”
유독 냉랭한 성격 때문에 냉혈도(冷血刀)라고까지 불리지만, 사실은 팽가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정이 많은 사람이 팽일교라는 걸 팽무강은 잘 알고 있었다.
슥.
팽가 특유의 거도(巨刀)가 아닌 적당히 묵직한 박도(朴刀)를 역수로 쥔 채 도시를 바라보는 팽일교의 모습은 비바람이 몰아쳐도 흔들림 없는 바위와 같았다.
가만히 그를 보던 팽무강이 툭 던지듯 물었다.
“내가 원망스럽지 않은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자네나 나나 본가 도객들의 성향을 잘 알지 않나. 이런 수모를 당할 바에야 시원하게 목숨 걸고 싸워 보는 쪽이 더 낫다고 여길지 모르네.”
“…….”
“그리고 그건 자네 역시 마찬가지겠지.”
“그렇습니다.”
잠시 침묵하던 팽일교가 더 딱딱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그러고 싶은 것처럼 가주님 역시 그러고 싶으셨겠지요.”
“…….”
“놈들이 부리는 화탄과 각종 화약은 머릿수로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칼 들고 덤빈다면야 누구라도 선봉에 서겠지만, 화기로 무장한 적에게 돌격하는 것은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입니다.”
“…….”
“그걸 모르는 도객은 없을 겁니다. 그저 작금의 상황이 비참하고 분할 뿐, 가주님의 판단을 의심하는 놈은 한 명도 없습니다.”
팽무강이 쓴웃음을 흘렸다.
“부디 그랬으면 좋겠네.”
“약해지지 마십시오.”
“…….”
“칼을 뽑아 들 때는 망설임이 없어야 하고, 뽑지 않았다면 끝까지 참아야 하는 법. 그것이 본가의 무사도(武士道) 아니었는지요.”
“그렇지.”
“지금 우리는 칼을 뽑지 않은 것입니다. 뽑을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
“뽑지도 못하고 산화해 버린 녀석들의 영혼은 누가 위로할까.”
“모두가 위로해야지요. 나아가, 뽑아야 할 순간에 그들 몫까지 힘을 내 적의 목을 치면 됩니다.”
감정이 섞이지 않은 목소리였기에 도리어 팽무강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한 가지 걱정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기천웅 교주가 데리고 온 신화교 일천 병력이 있어. 그리고 황궁 북부전에서 항복한 병력도 있지. 그들은 교주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철저히 싸움을 피할 걸세.”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더 후방에 주둔하고 있어. 만약 교주의 명령이 떨어진다면, 그 즉시 하북으로 돌격하겠지.”
팽일교는 팽무강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분노 때문에 적아 구분을 못 할 만큼 본가의 도객들은 멍청하지 않습니다.”
아군이 되었다지만, 한때나마 한솥밥을 먹던 놈들에게 무참하게 깨져 버렸다.
팽무강은 그 분노가 기천웅을 따르는 일천 병력에게 향하진 않을까 걱정인 것이다.
“저도 하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무언가.”
“무림맹이 병력을 파견한다고 했는데, 언제쯤 도달할지 알고 계십니까?”
팽무강이 힐끔 남쪽을 바라보았다.
“사흘 전에 연락이 왔으니 지금쯤 가까이 왔을 걸세.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어.”
“그렇군요.”
“지원 물자도 함께 이송한다고 했네. 빠르면 내일, 늦어도 사흘 안에는 도달할 거라고 생각하네.”
“이틀이면 몰라도 사흘이면 힘들어질 겁니다.”
“내 생각도 그러하네.”
팽무강의 눈에 불이 붙었다.
“그래도 버텨야만 하네. 지금 진격하는 건 절대 안 될 일이야.”
“물론입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벽곡과 사냥해서 얻은 고기로 배를 채운 팽가 병력은 식사 때를 제외하면 여전히 고요했다.
고요했지만, 그 분위기는 폭발 직전의 화탄과도 같았다. 그들은 앞으로 펼쳐질 싸움을 위해 몸을 정비했고, 터질 것 같은 분노를 꾹꾹 압축시켜 적을 향한 살의로 제련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루가 지나 태양이 중천에 떴을 무렵.
화아악!
심상치 않은 공기가 밀려왔다.
팽무강이 어깨에 칼을 걸쳤다.
“전원 전투 태세로.”
치리링.
제각기 칼을 뽑고 진을 형성한다.
이틀 동안 몸을 관리해 봐야 얼마나 관리했겠는가. 하지만 팽가 병력의 기세는 이틀 전보다 훨씬 더 날카롭고 묵직했다.
“적입니까?”
“적이겠지.”
팽일교의 눈이 차가워졌다.
“우리를 치겠다는 건, 하북을 넘어 하남으로 진격하겠다는 의미로군요.”
그때였다.
피이잉! 퍼어엉!
북쪽 도시 앞에서 날아오른 폭죽이 커다란 폭음을 일으켰다.
우와아아아!!
무서운 함성과 함께 숲이 흔들렸다.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먼지 너머,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열기가 대단했다. 신화교 병력 일부가 이쪽을 향해 진군하고 있는 것이다.
팽무강이 외쳤다.
“전원 패왕진(覇王陣)을 펼쳐라! 한 놈도 이 산등성이 너머로 보내서는 안 될 것이다!”
“존명!”
오백여 명의 도객들의 몸에서 찬란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이각 후.
와아아아!!
산등성이 아래에 주둔하고 있던 하북 문파 몇 곳이 방진을 짜며 화살을 쏘고 투창을 날렸다.
퍼버버벅!
화살과 투창에 맞은 적들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하지만 그도 잠시, 쓰러졌던 놈들은 다시 일어나 창과 화살을 뽑고 재차 달렸다.
다시 봐도 기가 질리는 광경이었다. 머리가 날아가거나 심장과 폐장에 구멍이 뚫리지 않는 한 전진을 멈추지 않는다. 마치 전설상의 강시들을 보는 듯했다.
팽무강의 눈이 번뜩였다.
“삼장로는 정예 일백을 데리고 문파들을 지원하라!”
“존명!”
팽일교가 도객들을 이끌고 빠르게 산등성이를 내려가고 있을 때였다.
훅!
등 뒤에서 느껴지는 무지막지한 기파.
한번 그 존재를 느낀 순간, 모두가 미칠 듯이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군기(軍氣)에 비틀거렸다.
‘이건?!’
팽무강이 뒤를 돌아보았다.
쿠르릉.
저 멀리서 먼지구름이 일었다.
족히 일만이 훌쩍 넘는 대군이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군보다 한참 앞쪽에서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도객이 보였다.
허연 수염,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거도를 어깨에 걸치고 질풍처럼 산을 오르는 고수.
팽무강의 얼굴에 격정이 일었다.
“종리 무상님!”
“표정들이 어찌 그리 심각한가!”
천하제일도(天下第一刀)라 불리는 전설의 도객이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칼을 들어라! 그리고 공격해! 지키지 말고 깨부술 각오로 나아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