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262)
흑백무제 1262화(1257/1266)
1262화. 전면전(全面戰) (6)
“…….”
주위를 둘러보는 연위의 얼굴에 오만 감정이 깃들었다.
‘실로 오랜만이구나.’
가문 주변의 도시와 마을들은 여전히 생명력 넘치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단순히 사람이 많다고 해서 이런 분위기가 나올 수는 없다. 바닷가가 가까운 만큼 거친 기상을 지닌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 거친 성격 속에 깊은 정과 호호탕탕한 일면이 있어 목소리만 들어도 정감이 간다.
또한, 연가의 영향력 덕분에 유림의 학자들도 많아서 어릴 적부터 글을 배우는 아이들이 많았다.
‘얼마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와 보니 십 년은 떠나 있었던 것 같다.’
실제로 넓게 보면 크게 달라진 게 없지만, 길목 하나하나와 건물들은 소소한 변화를 맞고 있었다.
연위는 내심 씁쓸함을 느꼈다.
‘가신들에게 가업을 맡겼다고는 해도 가주가 되어서 이제야 돌아왔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대도, 참으로 부끄럽구나.’
그러나 부끄러움을 느끼기엔 그간 벌어진 일들이 너무 많았다.
“여기가 연가가 지배하는 곳이오?”
“지배라는 말은 당치 않습니다. 그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곡경이 씨익 웃었다.
황제의 최측근인 그에게 있어 무림 세력이 지역을 지배한다는 말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혹시나 해서 물어봤는데, 과연 연가는 지배자가 아닌 힘 있는 자의 자비와 능력으로 지역에 힘이 되어 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어찌 여기까지 동행하셨습니까?”
“빨리도 물어보시는구려.”
“어쨌거나 폐하께서 윤허하신 사안이니 떠날 때는 달리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곡경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동해 쪽에서 적이 몰아칠 거라 예상되는 지금, 일대 지형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확인해야 할 의무가 있소.”
연위의 눈이 커졌다.
“출정하시는 겁니까?”
“그렇소.”
끝까지 황제의 곁에 남아 천좌를 지키는 것이 그의 소임일 터, 한데도 이번 전쟁에 출정한다고 말한다.
“처음으로 폐하의 용포까지 부여잡고 반대했소만, 아무래도 적의 세력이 얼마나 될지 모르는 판국이라 나까지 나서는 게 나을 거라고 하셨소.”
곡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권신이 없었다면 목을 내놓는 한이 있어도 폐하의 곁을 떠나지 않았겠지.”
그렇다. 지금 황제의 곁에는 천하제일권 무허대사가 있었다.
호위와 살생은 다른 영역이라지만, 그래도 무허대사가 황제의 곁을 지켜 준다는 것만으로도 곡경에게는 큰 위안이 되리라.
“게다가 강소와 절강 사이를 지키는 해군(海軍)들에게 폐하의 칙령을 전달해야만 하오.”
연위의 얼굴에 걱정이 깃들었다.
“제국의 해군들이 강골들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괜찮겠습니까?”
강소성 내부 정보에 관해서는 모르는 게 없는 연가였다. 당연히 관군과 해군에 관한 정보도 알고 있었다.
절강의 해군과 달리 강소의 해군은 엄격한 규율과 뛰어난 전투 능력으로 이름이 높았다. 국력이 나빠진 당대에도 어떻게든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놀라울 정도였다.
하지만.
“폐하께선 수십 년간 인고의 시간을 보내며 스스로를 감추셨습니다. 그나마 육군이라면 몰라도 해군은…… 황궁에 대한 시선이 좋지만은 않을 겁니다.”
내륙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판국에 해군 병력에 신경을 썼을 리가 없다. 물론 황제는 모든 것을 다 보고 있었지만, 그냥 보고만 있는 것과 실제로 다스리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그래서 내가 가는 것이오. 서운한 게 있으면 풀고, 말을 안 들으면 족쳐야지.”
“전쟁을 앞둔 시점인데 괜찮겠습니까?”
“안 괜찮으면 어쩌겠소? 저들마저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강소성은 폐허가 될 수도 있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현 정세에 관해 대화를 나누며 연가까지 도달했다. 워낙 헌앙한 두 사람이지만, 삿갓을 쓴 채 존재감마저 완벽하게 감추고 있기에 시선은 쏠리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어인 일로 오셨는지요?”
수문위들의 대처는 완벽했다.
적절한 긴장으로 경계 태세를 갖추면서도 묻는 목소리에는 친절함이 묻어 나온다. 상대의 경계심을 낮추면서도 절대 방심하지 않는, 수문위로서는 가히 모범적인 대처라 할 수 있었다.
연위가 웃으며 삿갓을 벗었다.
“오랜만일세, 곽표.”
순간 수문위, 곽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주님?!”
“그래, 날세.”
“가주님!!”
수문위들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태도에서, 그들이 가주인 연위를 얼마나 존경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하물며 자리를 비운 지 얼마인가. 곡경은 그들의 충성심을 지탱하는 근본에서 끈끈한 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연위는 오랜만에, 실로 오랜만에 가문으로 돌아왔다.
제대로 휴식조차 취할 수 없을 만큼 바빴지만, 집에 돌아온 것만으로도 연위는 심신의 피로를 모조리 날려 버릴 수 있었다.
* * *
실로 오랜만의 만남이다.
“여기가 흑제성인가.”
“그렇소.”
사방을 둘러보는 모용군의 눈빛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좋군. 무림맹보다 작지만, 그만큼 알차다는 느낌이 들어.”
놀랍게도 모용군은 혼자 왔다. 수행원 몇은커녕 언제나 그림자처럼 함께했던 언자방도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온 건 처음이오?”
“그렇지. 정보 교류야 활발했어도 안까지 들어올 일이 있어야지. 물론 성 밖에서 외관은 둘러보긴 했네만.”
“바쁜 분 모시고 시간 죽여선 안 되겠지. 안으로 드십시다.”
“쉴 시간도 안 주는군. 그러세.”
잠시 후, 두 사람은 군사부로 들어왔다.
그 안에는 소정광과 제갈아연이 있었다.
모용군의 눈이 반짝였다.
“제갈가의 장녀가 여기 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네만, 용케 이런 곳에서 잘 버티고 있군.”
꽤 가시 돋친 말이었지만, 제갈아연의 대처는 능숙하기만 했다.
“웃는 낯에 밝기만 한 곳이라고 어디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조금 어둡고 칙칙해도 나를 위해 주는 사람들이 가득하다면, 그곳이야말로 휴식처로 더할 나위가 없겠지요.”
“부친을 닮아서 말솜씨가 제법이군. 해서, 이 어두침침한 곳에 자네가 바라는 광명이 있던가?”
심상치 않은 말이었다. 그 말은 마치, 제갈아연의 속내를 훤히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제갈아연은 그 순간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빛은 어디에나 있는 법입니다. 손을 뻗는다고 닿을 수 있는 거라면 전쟁도 없었겠지요.”
“해서, 마냥 기다리기만 할 생각인가? 내가 말하는 광명이 그냥 광명이 아니라는 건 알 텐데.”
“손을 뻗기만 해서는 닿을 수 없다는 점은 같습니다.”
“애석하군.”
모용군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답답한 구석은 있었지만, 자네 부친은 본인의 이상을 위해서라면 어떻게든 아득바득 달려가서 거머쥐고자 노력했지. 설령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그 독기 있는 집착만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법이야. 그 대상이 이상이건 사람이건, 자네 부친은 끊임없이 움직일 줄 알았어.”
제갈아연이 싱긋 웃었다.
“움직여서 얻을 수 있다면 이미 천하가 제 것이겠지요. 때로는 포기하고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그 젊은 나이에 벌써 포기를 입에 담는가?”
“젊음은 상대적인 것, 가주님께서도 아직 무언가를 포기할 만한 나이는 아니시라고 생각합니다만, 분명 포기하셨지요.”
꽤나 위험천만한 발언이었다. 오죽하면 연호정이 힐끔 제갈아연에게 눈치를 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되레, 제갈아연의 그런 면모가 모용군에게는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엄격했던 모용군의 얼굴에 흐린 미소가 어렸다.
“깨달음이라고는 요만큼도 없이 말재주만 앞세운 책략가의 발언이었다면 겸상도 하기 싫었겠지만, 자네는 젊은이답지 않게 스스로에게 제법 솔직하군.”
“감사합니다.”
“그런 면모는 내 딸도 배웠으면 할 정도야. 과연, 제갈 군사가 자식 농사도 그럴듯하게 지었구나.”
날카로운 함의로 가득하던 대화가 순식간에 화기애애하게 변했다.
모용군이 어깨를 으쓱였다.
“귀계(鬼計)가 가득하대도 여물지 못한 주둥이에서 나오는 책략이라면 길가의 돌멩이만도 못한 하책일 뿐이지. 흑제성 인사들이 이 중요한 곳에 자네를 붙인 이유가 궁금했거늘, 지금은 이해하네.”
제갈아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뭐가 말인가?”
“흉악한 속내를 감추고 최고가 되기 위해 선악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효웅과 한자리에 있고 싶은 마음은 저도 없습니다.”
“……오호?”
“여기 성주님과 소 신장께서 가주님을 이 자리에 부른 이유를, 저는 아직 모르겠군요.”
제갈아연의 미소는 언제나처럼 싱그러웠다.
“부디 제 조막만 한 머리에도 흑도를 이끄는 두 거인분의 생각을 받아들일 만한 이해력이 있기를 바랍니다.”
되로 주려다가 말로 받았다.
가만히 제갈아연을 바라보던 모용군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다 크긴 했어도 아직은 잡목인 줄 알았더니, 이미 잎과 가지를 풍성하게 드리운 거목이었군. 이거 내가 몰라봤네.”
이런 경우 스스로를 낮추고 인정하는 게 더 무섭다.
제갈아연이 고개를 숙였다.
“괜한 말로 가주님의 정신을 흐트러트린 점, 사과드리겠습니다.”
“그 정도로 흐트러질 만큼 만만한 세상을 살아온 적 없다네. 다만, 사과를 했으니 내 사심 없이 받겠네.”
그렇게 두 사람의 기 싸움은 막을 내렸다. 무림맹에서는 서로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던 두 사람은, 이제 서로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해서, 날 여기까지 데리고 온 이유가 무엇인가? 성주께서도 알겠지만 나도 꽤 바쁜 몸이라네.”
“그걸 알고도 불렀으니, 최고로 바쁜 일이라고 생각해 주시오.”
“그걸 아니까 왔지. 술 한잔 내올 거 아니면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세나.”
연호정이 소정광에게 턱짓했다.
소정광은 한옆에 고이 놓아둔 서신을 모용군에게 건넸다.
“얼마 전, 개방의 용두방주에게서 온 서신입니다.”
“용두방주? 설마 가득상을 말함인가?”
“예.”
“방주위에 올랐었나?”
“다들 인정하는 분위기이니 저희도 그냥 용두방주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위험한 친구로고.”
모용군이 혀를 차며 서신을 펼쳤다.
잠시 후.
“……이것 보게?”
모용군이 대놓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러면 판을 다시 짜야 하는데?”
제갈아연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리고, 소정광의 두 눈에도 이채가 떠올랐다.
오직 연호정만이 모용군의 그 통찰력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떻소? 당신을 부른 것, 이해하겠소?”
“이해하다마다.”
모용군의 안목이 연호정에 육박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중요했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모용군이 강서 상무 연합의 실질적인 지도자였기 때문이었다.
“성주께서도 아시겠지만, 상무 연합은 장강 이남 쪽 정보에 능통할 뿐 북부 쪽의 정보에는 상대적으로 취약하다네.”
“알고 있소.”
“하지만…… 같은 상계에 나도는 정보에 한해서는 흑제성이나 개방보다도 앞서 있다고 자부할 수 있지.”
모용군의 눈이 깊어졌다.
“시간이 없어. 신화교는 이미 하북 무림을 점령한 상태야. 무림맹이 공격하고 있다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이지.”
“맞는 말이오. 사음교 쪽에서 신화교를 미끼 삼아 공격한다면, 이르면 내일 중으로 모습을 드러낼 것이오.”
“바닷길은 육지와 달라. 내일이 될지 열흘 후가 될지 아무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게 철두철미한 놈들이 이 정도 변수도 염두에 두지 않았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렵군.”
모용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거, 외통수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