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265)
흑백무제 1265화(1260/1266)
1265화. 전면전(全面戰) (9)
“아버님.”
가문의 무사들과 함께 여동(如東) 앞바다까지 온 연위는 느닷없는 호칭에 깜짝 놀랐다.
“비야?”
놀랍게도 그곳에는 정갈한 무복을 입은 일백 궁사들을 이끌고 온 묵비가 있었다.
“네가 어찌 이곳에 왔느냐?”
묵비는 말없이 품에서 서신을 꺼내 연위에게 보여 주었다.
서신을 읽은 연위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북부?”
“연 공자와 가득상 방주, 그리고 모용가주의 분석이라면 틀림없을 겁니다. 적들은 분명 북부와 동해로 나뉘어 중원을 공격할 겁니다.”
“허어.”
느닷없는 전략 변경이다.
하지만 연위는 총명했고, 사태를 파악하는 안목도 뛰어난 사람이었다. 무엇보다도 자식을 믿었다.
“호정은 어쩌겠다고 하더냐?”
“흑제성 총병력의 팔 할을 강소로 보냈습니다. 내일 아침, 늦어도 정오쯤에는 도착할 겁니다.”
“그래, 천만다행이구나. 흑제성의 병력이 움직이고 있으니 너도 이곳으로 올 수밖에 없었겠지.”
묵비가 무안한 듯 웃었다.
“물론 그것도 그렇습니다만, 정작 성주라는 사람이 부재해서요.”
“호정은 북부로?”
“그렇습니다.”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나을 수도 있지.”
동해에서 적습이 있을 거라는 예측도 쉽지는 않지만, 중원의 정보력에 지략가들의 힘이 더해지면 어떻게든 간파해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초원의 부족과 상인들의 관계까지 파헤칠 일은 없다. 사음교 역시 그것을 알고 있을 터, 최소한 절반에 이르는 병력을 떼어서 올 게 아니라면 그런 수고를 할 리가 없었다.
“초원의 부족들은 사음교에게 있어 교두보 역할을 하는 모양이다. 이삼 년 전에 부족 통합을 이뤄 냈다면, 삼교가 언제고 북부를 통해 남하할 것을 준비해 뒀다는 뜻이겠지.”
“그렇다고 하여 동해의 병력이 만만하진 않을 겁니다.”
“내 생각도 그와 같다. 강소에는 황궁이 있어. 어떻게든 이곳을 휩쓸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할 것이다.”
“다행히 사마현도 이곳으로 온다고 합니다.”
“사마현? 아! 그 오대신장 중 하나인…….”
“예. 암살에 있어서만큼은 중원 최고라 해도 무방할 실력자입니다. 조건이 맞으면 무극수도 암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그간 모은 자금과 흑제성의 도움으로 막강한 암살자들을 양성했으니, 이번 전쟁에 큰 역할을 할 것이다.
“든든하구나. 한데 네 뒤의 궁사들은?”
묵비가 쑥스러운 듯 웃었다.
“황궁의 궁사분들께서 가르침을 청하기에 어쩌다가 도움을 준 적이 있는데…… 이번 전쟁에 힘을 보태겠다고 해서요.”
연위의 미소가 짙어졌다.
“잘했다.”
“한 가지 문제는 무극수의 부재입니다. 아버님과 귀군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무극수가 없는데, 과연 동해로 얼마나 많은 무극수가 들어올까요?”
“그건 알 수 없다. 다만 해군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으니, 적의 병력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도 강소성 해군 제독은 유능한 사람이었다. 오랫동안 방치되다시피 했는데도 함포와 화약 관리를 철저하게 했고 병사들의 사기도 잘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보타암에서도 곧 도착할 것이고, 결정적으로 내일 중으로 부마께서도 이곳에 오신다고 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부마라 함은 바로 투왕 양천을 뜻했다.
현재 양천은 황궁에 있었는데, 황궁 자체가 워낙 넓다 보니 묵비와도 거의 만나질 못했다.
“한데 바다가 이렇게 넓은데, 하필 이곳으로 오신 이유가 있으신지요?”
“물론이다. 이곳이 황궁과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더하여 내륙으로 흘러가는 길도 있는 만큼 놈들은 무조건 이 길로 올 수밖에 없다. 혹시 몰라 해군 일부가 강소 해역 상부에서 진을 치고 있으니, 만에 하나의 사태에도 움직일 시간은 충분하다.”
그렇게 동해의 방비는 착착 진행되어 갔다. 연가를 필두로 묵비와 황궁 궁사들, 그리고 강소 문파들이 줄을 지어 해상을 봉쇄했다.
하루가 지났다.
민간인들을 최대한 내륙 안쪽으로 보내고 남은 곳은 무림인들로 채운 강소성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두두두!
저 멀리 서쪽에서부터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
묵비의 얼굴이 밝아졌다.
“흑제성입니다. 흑제성의 용아철기대가 오고 있어요.”
그때였다.
쿵!
저 멀리 바닷가 동북 방향에서 무시무시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모두의 얼굴이 굳어졌다.
“시작됐군.”
연위가 턱을 치켜들었다.
“해군의 함포 소리다. 놈들이 오고 있어.”
* * *
후우우우웅!
불어오는 바람은 건조했지만 어쩐지 습하게 느껴졌다.
저 머나먼 섬서 북쪽의 대지를 바라보는 막원의 얼굴은 꽤 지쳐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천효락의 질문에 막원이 피식 웃었다.
“괜찮아. 너는 어떠냐?”
“제가 문제가 될 게 뭐가 있습니까.”
“문제가 될 게 왜 없어. 광혈교 병력이랑 싸우면서 상처깨나 입었잖냐.”
“다 나았습니다.”
실제로 그때 입은 상처는 전부 나았다. 중왕마공의 성취가 쉴 때도, 싸울 때도 끊임없이 발전했기 때문이었다.
가만히 천효락을 보던 막원이 고개를 저었다.
“무리하지 마라.”
내공과 체력은 괜찮을지 몰라도 정신이 흐트러지면 말짱 꽝인 법이다.
“광혈교 병력은 그날 거의 다 몰살했어. 들리는 말에 의하면 사천으로 침투한 소교주 측 병력도 죄 날아갔다고 하더라. 너도 들었지?”
“…….”
“이제는 너만의 길을 갈 때가 됐다.”
중원의 전장에서 저들을 막지 말고 여동생을 찾으러 가라는 말이었다.
천효락이 웃으며 말했다.
“전에 말씀드렸지요? 여동생은 멀쩡할 거라고.”
“그래.”
“괜찮을 겁니다. 전쟁이 다 끝난 뒤 찾아가도 괜찮을 거예요.”
“그래, 네 여동생은 괜찮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네가 괜찮지 않잖냐.”
말은 저리해도 근심과 걱정이 얼굴에서 떠나질 않는다.
차라리 광혈교가 멀쩡했을 때가 더 나았을 지경이었다. 광혈교 병력이 공중 분해된 상황이라 오히려 여동생의 안위도 걱정스러워했다.
“마음 같아선 나도 함께 가고 싶다만…….”
막원은 말끝을 흐렸다.
그렇다. 천효락과의 인연은 단순하면서도 단순하지가 않았다.
함께 싸워 왔든 그에게 창을 받아서든, 어떤 이유라든 좋다. 지금 막원에게 있어 천효락은 연호정 못지않은 인연으로 얽힌 사람이었다.
천효락이 고개를 저었다.
“전쟁이 끝나면 찾아가겠습니다.”
“정히 그렇다면, 다시는 네 여동생에 관해서 말하지 않으마.”
“감사합니다.”
다른 건 몰라도 천효락이 이리 믿는 이유 하나만큼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막원은 애써 쾌활하게 말했다.
“옛날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그때 생각이 나지 않느냐?”
“예?”
“이쪽으로 들어왔을 때 말이다. 삼교 측이 보낸 보급 부대를 우리가 먼저 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지.”
그때는 몰랐지만 지나고 보니 섬서 전투의 시작을 알렸던 싸움이었다.
천효락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그때만 해도 넌 엉망진창이었다. 타고난 재능이야 말할 나위가 없지만, 그렇게 엉성하게 싸울 줄은 몰랐어.”
“하하, 덕분에 선배님께서 고생이 많으셨지요.”
“그랬던 놈이 이제는 백전을 겪은 장수와도 같은 기세를 뿜어내는구나. 아무리 재능이 특출나더라도 그 짧은 사이에 이렇게까지 발전하다니…… 정말 놀라워.”
그때, 한옆에서 듣고 있던 화향이 말했다.
“주인님의 재능은 하늘이 내린 것이라고 했습니다. 조만간 연호정 그 사람의 뒤를 이어서 성마의 경지에 오르실 겁니다.”
막원은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고, 천효락은 무안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소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주인님.”
“그래, 내 유일한 친구의 믿음을 저버려선 안 되겠지.”
화향의 입이 떡 벌어졌다.
“허억! 주, 주인님! 감당키 힘든 말씀입니다!”
“어릴 적부터 나를 지켜 준 호위이자 친구가 아니었더냐? 새삼 그리 놀랄 필요가 있는가 싶다.”
“저, 저는 그저…….”
그때였다.
막원의 눈빛이 달라졌다.
“뭔가가 오는군.”
두 사람의 기도가 첨예하게 날이 섰다.
그들의 기도를 읽은 용선진인이 빠르게 다가왔다.
“적이 오고 있소?”
“그렇소.”
막원이 백뢰창으로 북쪽 너머를 가리켰다.
“저곳이오. 저 작은 야산 뒤쪽에서 돌진하고 있소.”
우우웅!
용선진인은 황급히 내공을 끌어올렸지만, 그의 안력으로는 그 야산조차 보이지 않았다. 새삼 막원의 내공이 얼마나 심후한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적들이 오고 있다! 화산의 검사들은 전원 검진을 펼치고 대기토록 한다!”
스르륵.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화산의 장로들도, 남은 검사들도 넓게 퍼져 매화검진을 형성했다.
육성이 아니라 눈빛과 행동으로 대답을 한다. 전의로 들끓는, 아니 전의 이상의 살기로 가득한 그들의 두 눈은 마주하기 힘들 정도로 강렬했다.
그리고 그 뒤.
또다시 모인 섬서 무림 병력이 제각기 소수로 삼재진을 펼쳤다.
삼재진은 단순하지만 효율적인 진법으로, 무가(武家)나 문파에서 기본적으로 가르치는 대인 진법이었다. 진기를 공유하여 진세 자체를 증폭하는 힘은 없지만, 움직임이 유연하고 반응하기가 쉬워서 초보 병사나 손발이 맞지 않는 무림인들이 구사하기에는 제격이라 할 수 있었다.
각 문파에서 내려오는 비전 진법들을 포기하고 삼재진을 채택한 것.
살아남은 그들이 실전에서 체득한 무리(武理)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지극히 실용적인 마음가짐이었다.
그렇게 섬서의 병력이 준비를 마친 순간.
번쩍!
막원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사음교?’
아니다.
야산을 끼고 빙 돌아서 달려오는 이들은 기병 무리였다.
한데 은호마병 같은, 귀기(鬼氣)를 발산하는 마병들이 아니었다.
거친 기세는 실로 무림의 군대 못지않지만, 다소 작은 기마들이 제각기 유동적으로 움직이며 돌진하는 모습이 유연하면서도 어딘지 어색해 보였다.
그 어색함은 저들이 못나서 그래 보이는 게 아니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기마진이라서 그렇다. 강철 투구와 경갑을 입고 한 손에는 북방식 만도(彎刀)나 활을 들고 돌진하는데, 그 모습이 실로 자유분방한 바람을 보는 듯했다.
초원에서 불어온 바람.
“부족 기마병?!”
막원은 깜짝 놀랐다.
“저들이 왜?”
사음교의 병력이 일차로 휩쓸고 지나가면, 뒤이어 부족 기마병들이 약탈과 방화로 섬서를 초토화시킬 줄 알았다.
한데 시작이 초원의 기마병이다. 실로 알 수 없는 일, 막원은 전투 시작부터 기묘한 불길함을 느꼈다.
하지만 적이 오고 있는 걸 빤히 보고도 그냥 보내 줄 수는 없는바.
“가자!”
파아아아앙!
막원과 천효락, 화향 세 사람이 삼재진을 구축하며 나아간다.
그들 역시 예전과 같지 않았다. 각자가 따로 떨어져 싸우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 고수가 첨병이 되어 나아가니, 그 속도가 기마보다 두 배는 더 빨랐다.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막원 일행과 기마병들.
끝이 보이지 않는 초원의 기병을 맞이하며, 막원은 막연하게 느꼈던 불안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기마병들의 두 눈에 어린, 숨이 막힐 것만 같은 사기(邪氣)였다.
“쳐라!”
백뢰창이 불을 뿜었다.
콰르릉!!
폭음과 함께 뿜어져 나온 용수창의 비기가 삽시간에 기마병 세 기를 갈기갈기 찢어발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