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270)
흑백무제 1270화(1265/1266)
1270화. 사신 강림(邪神降臨) (5)
번쩍!
연호정의 금안(金眼)이 휘황찬란한 빛을 발했다.
“교주만큼 대단한 화기로군.”
“그래, 나도 느끼고 있네.”
기천웅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마음의 준비는 진즉부터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격정이 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드디어, 이렇게 만나는구나.’
흔들리지 않을 줄 알았다. 오히려 그 자신이 품고 있는 불의 내공처럼, 만나는 순간 쌓아 둔 모든 분노를 폭발시켜 생사결을 벌일 거라 생각했다.
한데 막상 자신만큼 거대해진 아들의 기운을 느끼니 마음 한구석이 착잡해졌다.
‘네 녀석은 대체…….’
그때, 연호정이 말했다.
“정상이오.”
“……?”
“부모 자식 간은 하늘이 내리는 거라고 했소. 자식이 제아무리 죽일 놈이라도 부모 입장에선 애달프고 착잡할 수 있다는 것이오.”
기천웅의 눈이 흔들렸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연호정은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단순히 넘겨짚고 말하는 건 아닌 듯했다.
“하지만 당신이 흔들리면 당신과 함께한 두 화왕과 일천의 병력도 혼란을 겪을 것이오. 나아가, 신화교를 올바르게 세우겠다는 당신의 꿈도 순식간에 부서질 수 있소.”
“…….”
“마음을 다잡으시오. 당신의 목표가 그와 같다면, 상대가 자식이라 하여 흔들려선 안 될 것이오.”
이 말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는 연호정도 알고 있었다. 당장 연위나 연지평을 대입해 보면, 그 역시 진심으로 도끼를 휘두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반드시 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했고, 기천웅은 그의 말을 오해 없이 받아들였다.
“전심전력을 다해 싸울 것이네. 본교의 미래와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애초에 그럴 작정이 아니었으면 자네들과 함께 싸우러 오지도 않았지.”
“바로 그것이오.”
하지만 연호정도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기천웅은 단순히 아들이자 소교주, 기우환 때문에 이리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었다.
‘……여기 있었구나.’
기천웅은 느낄 수 있었다.
저 멀리 상상을 초월하는 격전장 속에서 또 하나의 천리(天理)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기우환처럼 강렬한 내공력도, 무시무시한 집착도 없다. 한데도 오히려 기우환 이상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강해서도, 신비해서도 아니다.
아들 이상으로 끈끈하게 느껴지는 천륜의 실. 제대로 돌봐 준 적이 없어서 더더욱 마음에 남는 또 하나의 자식이 그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다.
‘영원히 볼 수 없을 줄 알았건만.’
하늘의 뜻이란 참으로 묘한 데가 있었다.
기천웅은 혼란스러운 마음 사이에 기쁨과 설렘의 감정도 섞여 있다는 걸 깨달았다.
‘신화(神火)의 성력(聖力)이 느껴지는구나. 이렇게까지 대단한 성력으로 개화되었을 줄이야.’
기천웅은 잠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딸아이의 성력이 더더욱 선명해졌다.
깊고 맑으며 잡티 하나 없이 순수한 성력으로 가득한 상단전.
만약 자신이 신화교를 철저하게 정비하고 내부를 안정시켰다면, 역사상 최고의 영안(靈眼)을 지닌 성녀로서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아군이 후퇴하고 있는 것 같소. 속도를 높입시다.”
“……그러세.”
파파파파팡!!
산서를 수직으로 가르며 올라가는 두 사람.
황금빛 용과 함께하는 형체 없는 불은, 점점 물러지는 자신의 마음이 상극인 물처럼 출렁거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싸움이 우선이다.’
딸보다는 적을 막는 게 먼저다.
그래야 딸도 살 수 있을 것이다.
* * *
퍼펑!
사방에서 터지는 폭음과 기괴한 비명에도 기우희는 침착했다.
“각주님! 피하십시오!”
다급하게 외치며 달려오는 의생 뒤로 기마병 하나가 따라붙었다.
언제 대열을 이탈했는지 모르겠다. 아니, 저 부족 기마병들은 하나가 되었다가도 어느 순간 뿔뿔이 흩어져 적을 유린하는 데에 능했다.
단순히 진형의 유연함만 따지면 중원 무림의 진법보다도 뛰어날 것 같았다. 각고의 노력과 이치를 두고 만들어진 것이 아닌, 태어났을 때부터 자연스레 몸에 붙은 전투력이 그들의 진짜 힘이었다.
“카아앗!”
북방 만도가 아닌 질긴 밧줄을 빙빙 돌린다. 목을 노리고 던져서 당길 속셈이었다.
기우희의 눈이 번쩍였다.
파팡!
단숨에 의생 근처로 달려간 그녀 앞으로 어느새 밧줄이 날아왔다.
그녀의 하얀 손이 원을 그리며 움직였다.
파악!
밧줄을 휘어잡은 손, 그대로 끌어당기니 기마병의 몸통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우두둑!
주인을 밟아 버린 기마가 놀라서 옆으로 도망을 쳤다.
결국 기마병은 제 애마한테 등을 밟혀 척추가 부러지고 고관절이 박살 났다.
기우희가 외쳤다.
“당황하지 말고 대열을 유지한 채로 물러나세요!”
좋은 수장은 위기의 순간 진가를 드러내는 법이었다.
기우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무공을 배워서가 아니라, 이토록 난잡하고 공포스러운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의원들을 챙기고 있었다.
“일꾼들은 부상자들을 조심히 이동시키세요! 맹원들이 우리를 보호해 줄 겁니다! 절대 죽지 않을 테니 흔들리지 말고 묵묵히 퇴각하세요!”
우우웅!
기우희의 몸에서 은은한 녹빛 광채가 흘러나왔다.
원무치상법으로 성벽처럼 단단해진 상단전이 그 거대한 성문을 활짝 열었다. 과거, 통제되지 않아 제멋대로 흘러나오던 영기가 이제는 그녀가 원할 때, 원하는 만큼 흘러나올 정도로 크게 성장한 것이다.
더하여 그녀는 타고난 영력의 소유자였다. 무공의 초고수가 상단전의 영력을 키운 것보다도 훨씬 더 깊고 방대한 양을 자랑했다.
그 영력이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 의원들의 가슴에 스며드니, 어느덧 의원들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사라지고 차분함만이 깃들었다.
‘안 좋아.’
의원들을 안정시켰지만, 정작 기우희는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적측에 새로운 고수가 출현했어. 아니, 애초에 우글거리고 있었지. 그중 하나가 튀어나왔으니 조만간 줄줄이 나올 것이다.’
기우희의 푸른 눈 주변으로 은은한 연녹빛 아지랑이가 번져 나왔다.
하북에서 산서까지, 무림맹 병력과 함께 이동하며 무수히 많은 환자를 살폈다.
그 과정에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만약 원무치상법으로 상단전과 중단전이 바로잡히지 않았다면 당황한 마음에 몇 번이나 실수를 저질렀을 것이다.
‘나는 의원이다.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지킨다.’
심지어 적은 신화교도들이었다.
물론 그녀는 자신이 있을 곳, 자신의 편을 정했다. 오히려 신화교에 대해서는 안 좋은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고향 사람들이라고 죽어 나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그들에게까지 손을 내밀 수는 없는 노릇.
‘나는 내가 있는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
그때, 저 멀리서 환자를 이송하는 의원들을 향해 수십 발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기우희의 몸이 번쩍였다.
파아앙!
원무치상법이 경지에 오르며 상중하, 모든 단전을 균형 있게 연마할 수 있도록 공공대사에게 따로 무공까지 배운 그녀였다.
지금 그녀가 펼치는 신법은 부동명왕신법(不動明王身法)으로, 공공대사가 소림 무공의 형(形)에 자신만의 깨달음을 녹여 만든 무공이었다.
소림 최고 비기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초일류의 신법인 것은 변함이 없었다. 더하여 무당 장문인 승현진인에게 받은 태음신공(太陰神功)은 상단전과 일체되어 그녀의 공력을 무서운 속도로 쌓아 두었다.
화아아악!
실제 박투 실력은 몰라도, 신법만큼은 절정고수 이상이라 할 만했다. 신(神)의 그릇, 상단전의 힘이었다.
‘태음이십팔수(太陰二十八手)로 휘감고.’
우우우우웅!
허공을 향해 뻗어 나간 공력이 넓게 퍼지며 화살들을 휘어 감았다.
‘명왕공(明王功)으로 뻗어 낸다.’
태음수를 따라 측면으로 호선을 그리던 화살들이 팍! 소리를 내며 힘을 잃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힘도, 기교도 부족하지만 완전무결에 가까운 방어 무공이었다. 정작 그 무공을 구사한 기우희 본인이 놀랄 정도였다.
실전에서 두 무공을 처음 써 본 그녀였다. 발달된 상단전으로 힘의 흐름을 읽고 필요한 무공들을 즉각 조립해 펼쳤지만, 이렇게까지 놀라운 위력을 발휘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놀라움도 잠시.
“남은 의원들은 선두로 달리세요! 환자들이 쉴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합니다!”
제대로 된 판단, 멋진 안목이었다. 이런 혼잡한 전장에 처음 나온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침착함을 보여 주고 있었다.
홀린 듯 그녀의 말을 따르는 의원들의 얼굴에도 강력한 의지와 결심의 빛이 떠올랐다.
어느덧 공포가 완전히 사라진 그들의 뜀박질은 직전보다 한층 유연했다. 긴장으로 몸이 굳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던 기우희가 저 멀리 전장을 바라보았다.
상단전 용량이 저 무극수에 달하는, 혹은 그 이상을 넘보는 그녀의 안력(眼力)은 상상을 초월했다.
‘어렵구나!’
무림맹 병력이 자꾸만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작전상 퇴각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힘에서 밀리는 것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고수층은 물론 온갖 화기(火器)를 장착한 것도 모자라 일만이 넘는 기마 부대가 화살까지 쏘고 있는데 물러나지 않을 방도가 없을 것이다.
기우희의 얼굴에 서글픔이 어렸다.
‘어떻게 하지? 나는 마냥 물러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의선각주라고는 하지만, 그녀는 그저 한 명의 의원일 따름이었다. 사람의 육신을 고치는 것이 일이지, 전쟁은커녕 무공의 전문가도 아니었다.
‘기운들이 많아. 다 읽히지만, 동시에 하나도 모르겠다. 너무 혼잡하게 뒤섞여 있어.’
어쨌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걱정해 봤자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면, 지금은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에 집중하는 게 옳았다.
그렇게 그녀가 몸을 돌리던 순간이었다.
훅!
기우희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왜 몰랐을까? 저 멀리 호선을 그리며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던 불꽃이 무섭게 방향을 꺾어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사방 천지에 기운이 가득하고 살기를 넘어 광기까지 가득한 전장이라, 그녀의 예민한 감각도 위기를 읽지 못한 것이다.
‘천화지경!!’
화아아악!
밀려드는 뜨거운 바람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쿵!
묵직한 발소리가 대지를 울렸다.
“이거, 심상치 않은 영력이 느껴져 여기까지 파고들었더니만 이런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을 줄이야.”
우렁우렁한 목소리.
노랗고 희끗희끗한 수염을 코밑에 가득 기른 거대한 덩치의 초로 사내가 있었다. 서역인 특유의 깊은 눈매와 오똑 솟은 콧날, 사자의 갈기처럼 퍼진 머리카락이 진정 야수를 보는 듯했다.
기우희의 눈이 흔들렸다.
“금사(金獅) 야헌!”
“천한 반쪽짜리 계집년이 감히 어르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구나.”
언뜻 초로의 연배로 보이지만 이미 여든을 바라보는 신화교의 전대 고수.
기천웅이 교주가 되고서 일선에서 물러난, 전대 교주와 함께 이전 세대 신화를 지탱했던 노고수 중 하나인 야헌의 등장이었다.
야헌이 비릿하게 웃었다.
“제대로 날뛰어 보자 해서 따라왔거늘 뜻밖의 대물이 걸렸구나. 천한 몸뚱이라도 제법 아름답게 자랐으니, 당분간 계집 걱정은 없겠다.”
팔십을 바라보는 노인의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천박했다.
기우희는 크게 놀랐지만 절망하지 않았다. 함께 오겠다고 했을 때부터 죽음을 각오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간 없던 독기도 올라왔다.
기우희의 얼굴에도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그 어린 나이에도 알았지요. 당신이 신화교에서 제일가는 소인배에 쓰레기라는 걸.”
“뭐라?”
“주인이 죽었다고 소교주에게 꼬리를 흔들다니, 키워 줄 주인이 없으면 제대로 살지도 못하는 개새끼인 줄은 알았습니다만, 이렇게까지 추한 사람이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