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271)
흑백무제 1271화(1266/1266)
1271화. 사신 강림(邪神降臨) (6)
야헌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말버릇이 고약하구나. 하긴, 계집이 그런 맛도 있어야지.”
차라리 화를 냈다면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예전이었다면 적이 방심한 게 오히려 좋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진짜 고수들은 방심한 척할 뿐, 빈틈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리고 이 금사 야헌은 진짜 고수였다. 단순히 이룬 경지가 높아서가 아니라, 전대 교주이자 그녀의 조부 밑에서 가장 전투적이고 파괴적인 면모를 갖춘 고수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여기까지 따라온 거겠지. 싸울 수 있으니까. 설마 여태 살아 있을 줄은 몰랐는데.’
신화교의 고수들은 나이를 먹으면 은퇴하거나 상단전 폭주로 인해 사망, 혹은 후인들에게 화정을 넘겨주고 폐인이 된다.
그 전통 아닌 전통을 온몸으로 거부한 사람이 지금, 기우희 앞에 나타난 것이다.
“당신 말고 또 전대 고수가 왔나요?”
방심하진 않았지만 이 또한 유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야헌은 솔직하게 답해 주었다.
“있지. 고마한(孤馬恨)이라고 기억하느냐?”
기우희가 이를 악물었다.
‘적룡(赤龍) 고마한.’
금사 야헌이 그 시대 가장 광기 어린 고수였다면, 적룡 고마한은 가장 냉혹한 고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금사와 적룡, 완전히 상반된 성격을 지녔음에도 이상하게 죽이 잘 맞았다. 그런 두 사람이 여태 살아 있는 것도 모자라 오라비와 함께 전쟁에 참가하다니, 재앙도 이런 재앙이 없었다.
야헌이 음흉하게 웃었다.
“뭐, 다른 사람은 생각할 필요 없다. 오랜만에 맡는 전장의 공기 덕에 한껏 달아올랐어. 지금부터 네 인생은 이 금사의 것이 되는 것이다.”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겠네요.”
기우희의 발이 땅을 박찼다.
피잉!
금줄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신형이 남쪽으로 향했다.
야헌의 눈이 반짝였다.
“제법!”
파아아앙!
엄청난 파공성과 함께 야헌이 순식간에 기우희에게 접근했다.
부동명왕신법에 강력한 상단전, 거기에 균형을 위해 배운 무당 비전 태음신공도 있었지만, 야헌 앞에서는 실력 좀 있는 어린아이에 불과할 뿐이었다.
기우희는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거대한 그림자가 자신의 몸을 뒤덮고 있었다.
“얌전히 어르신에게 잡혀…….”
그 순간, 팔을 접어 반대쪽 겨드랑이로 뻗은 기우희가 작은 원통의 격발추를 눌렀다.
퍼퍼퍼퍼펑!!
폭발과 함께 수많은 침(針)이 쏟아져 나왔다.
피하거나 막기에는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야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파바바박!
수십 개의 침이 야헌의 몸에 박혔다.
‘성공이다!’
사천당가의 폭우이화침(暴雨梨花針)에 영감을 받아 무림맹에서 자체적으로 개발한 호신용 암기, 의룡독침(醫龍毒針)이었다.
의선각 수뇌부들이 들고 다니는 호신 무기 중 하나로, 안에 내장된 침들에는 각자 효능이 다른 약물과 독이 묻어 있었다.
그 자체로는 인체에 별 해가 안 되지만, 그중 다섯 개만 몸에 박혀도 상승 작용으로 인해 체내에 극독이 형성된다. 초절정고수도 맞으면 중독으로 사망에 이를 수 있다는, 의선각에서 자체 개발한 합성독이었다.
파바바박!
서둘러 몇 발짝 거리를 벌린 기우희가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그녀의 눈이 커졌다.
파악!
어느새 접근한 야헌이 그녀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꽤나 깜찍한 짓을 하는구나.”
잔혹한 미소를 짓는 야헌.
중독의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의룡독침을 절반 이상 받아 냈는데도 불구하고 눈곱만큼의 이상 증세도 없었다.
‘어떻게?’
그때였다.
치이이이익!
그의 몸에 박혔던 침들이 모두 흐물흐물해지더니 땅으로 떨어졌다. 상처 자리에선 희뿌연 연기가 치솟았다.
“확실히 네년은 본교 사람이 아니야. 본교의 열양공은 천하 으뜸, 어떠한 독도 불살라 버릴 수 있는 최강의 양강 무공이라는 걸 모르는 것이냐?”
흔들리던 기우희의 눈이 금세 본래의 빛을 되찾았다.
“그럴 리가요.”
“……다른 건 몰라도 그 태도는 참 신기하군. 이 정도 되었으면 겁을 먹든 화를 내든 뭔가 반응이 있어야 하는데 뭘 믿고 그리 여유롭지?”
“여유가 아니라 체념이죠.”
“하하하! 체념이라? 그것도 좋지. 날 만족만 시켜 준다면야 내 첩으로 남은 생을 편히 보낼 수 있을 게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네요.”
껄껄껄 웃음을 터트리던 야헌의 얼굴이 순식간에 냉정해졌다.
기우희는 가슴 한편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미친 듯이 웃다가 정색을 하고, 음충맞게 웃다가 귀신처럼 화를 낸다.
종잡을 수가 없는 성격이다. 대외의 평가 이전에, 적으로 마주한 야헌은 꿈에서라도 보기 싫은 인간이었다.
“마음이 바뀌었다. 본디 소교주에게 허락부터 받아야 하지만…… 어차피 전리품인데 언제 취하든 무슨 상관인가.”
야헌의 입꼬리가 양쪽으로 올라갔다. 금색 사자라는 별호가 무색한 표정이었다.
“이 자리에서 즐겨 보자꾸나.”
그때였다.
번쩍!
기우희의 두 눈에서 진한 녹광(綠光)이 번져 나왔다.
당장이라도 그녀의 옷을 잡아 뜯을 것처럼 손에 힘을 주던 야헌의 몸이 덜컥 멎었다.
“놓아라.”
“……?!”
“이 손을 놓아라.”
우우우우우웅!!
그녀의 음성은 전장의 비명도, 창칼 소리도, 대지를 울리는 말발굽 소리도 지워 버렸다.
야헌의 귀에는 오직 기우희의 목소리만이 가득했다. 그녀의 곱고도 위엄 가득한 목소리가, 마치 막힌 공간에서 화약을 터트린 것처럼 끊임없이 울리며 머리를 옥죄었다.
“놓아라!”
야헌의 이마에 혈관이 불거졌다.
치이이이익!
그의 몸에서 희뿌연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상단전을 직접적으로 공략하는 성녀의 명령이다. 그 무서운 영력을 차단하기 위해 금사신공의 힘을 한껏 끌어올린 것이다.
‘이게 무슨?’
신공을 개방하여 상단전을 활성화해 그 언령(言令)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게 잘 되질 않았다. 계속 멱살을 쥐고 있긴 했지만, 당장이라도 손을 놓고 물러나고 싶었다.
상대가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이유도 없이 말을 따라야 할 것 같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우우우우웅!!
야헌의 몸에서 금빛 불꽃이 넘실거렸다.
신화교의 금제순화공에 자신의 깨달음을 녹여 만든 것이 금사신공이었다. 바탕이 금제순화공인 만큼 뿜어져 나오는 진기에 무시무시한 열기가 담겼다.
치이이이익!
기우희는 이를 악물었다.
태음신공으로 열기를 막고 있었지만, 조금씩 파고드는 열기가 지독한 고통을 선사했다. 당장이라도 온몸이 불타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녀가 더 강한 목소리로 외쳤다.
“놓으라고 하지 않았느냐!”
쩌어어어엉!
수저로 놋그릇을 때리면 이런 소리가 날까.
한순간 정신이 멍해지는 소리에 야헌의 오른손이 절로 벌어졌다.
기우희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떠오른 그때.
콰앙!
폭음과 함께 그녀의 몸이 십여 장 밖으로 날아갔다.
“쿨럭!”
안 그래도 하얗던 그녀의 피부가 아예 백지장처럼 변했다.
코와 입으로 토해 낸 핏물의 양이 상당했다. 온몸의 기혈을 뒤집어 놓은 공력, 실로 무시무시한 화기였다.
“이…… 빌어먹을 요녀(妖女)가!”
오른손을 뻗은 채 왼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비틀거리는 야헌.
신화교의 성력, 혈통으로밖에 얻을 수 없는 지고의 영력에 정신이 큰 타격을 받은 것이다.
기실 수양이 제대로 되었다면 아직 여물지 못한 기우희의 성력으로 이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다. 육체의 수련과 욕망에 사로잡혀 막강한 힘을 손에 넣었지만, 정작 정신의 수련이 부족했던지라 혼신을 다한 언령에 타격을 입은 것이다.
“위험한 년이구나! 너 같은 년을 데리고 가 봐야 내 몸이 남아나질 않겠다!”
우우우웅!
금사신공을 한계까지 발산하니 온 천하가 불꽃에 뒤덮이는 것만 같았다.
“죽여 주마!”
으르렁거리며 다가오는 그 모습이 진정 거대한 사자를 보는 듯했다.
일어나려다가 다시 쓰러진 기우희는 차츰, 발끝부터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끝이구나.’
상단전이 위험을 포착하자 저도 모르게 태음신공과 태음이십팔수로 방비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반드시 죽었을 것이다. 당장 지금만 해도 온몸의 기혈이 들끓고 심각한 내상을 입은 것은 물론, 발을 삐어 일어나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이것이 바로 무극수…….’
전력을 다한 것도 아니요, 진기가 담긴 손을 아무렇게나 휘둘렀을 뿐인데도 이 정도다.
기우희는 눈을 감았다.
‘그래, 이런 최후도 나쁘지 않지.’
저런 미친 작자의 노리개가 되느니 깔끔하게 죽는 것이 만 배는 더 나을 것이다.
‘지나온 생에 후회가 많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 지금껏 열심히 잘 살아왔어.’
덤덤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녀.
모든 것을 포기한 그녀를 향해, 야헌이 괴성을 지르며 일장(一掌)을 휘둘렀다.
콰르릉!
폭음과 함께 금빛 불덩이가 날아왔다. 단단한 바위도 단숨에 녹여 버릴 것 같은 초고온의 불꽃이었다.
‘죄송합니다, 맹주님.’
그때였다.
훅!
기묘한 소리와 함께 온몸으로 퍼져 나가던 열기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
열기가 사라지자 그 자리로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쳤다.
갑작스러운 온도 변화에 기우희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볼 수 있었다.
자신의 앞에 선 누군가의 등을.
키가 무척이나 큰 남자였다. 산처럼 크고 넓은 등에 잡티 하나 섞이지 않은 황금빛 머리카락이 늘어져 살랑거리고 있었다.
조금은 펑퍼짐해 보이는 의복. 중원의 것 같기도 하고 새외의 것 같기도 했다.
그 아래로 드러난 새하얀 맨발에는 흙도 묻어 있지 않고 상처도 없었다. 손도 마찬가지로 새하얗기만 했다.
마치 자신의 피부처럼.
후우우우웅!
사내의 발밑에서 올라오는 바람이 은은한 열감을 전해 주었다.
야헌이 발산하던 거친 열기가 아니었다. 뜨거웠지만, 또한 포근했다. 차가운 땅에 은은한 온기를 더해 주는 기묘한 열기가 바람과 함께하고 있었다.
스륵.
멍하니 사내의 등을 보던 기우희는 문득 느껴지는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헉! 성주님?!”
선비와도 같던 인상도 이제는 많이 옅어졌다.
한층 날카로워진 인상, 숱한 전투로 변해 버린 그 얼굴에는 황금빛 용의 축복을 받은 투신(鬪神)이 살고 있었다. 어깨에 걸친 거대한 도끼는 예전보다 더 커 보였고,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는 기파는 진정 신(神)이 강림한 듯 대단한 위엄을 자아내고 있었다.
“오랜만이다, 기우희.”
“여, 여기는 어떻게……?”
“상단전이 그렇게나 연마되었음에도 나와 교주의 등장을 모르고 있었나?”
“예?!”
“역시나 아직 부족하다. 너의 그 힘은 허투루 다룰 만한 것도, 썩힐 만한 것도 아니야. 앞으로 부단히 노력하여 제대로 써먹길 바란다.”
언제나처럼 부족함을 말하며 질책하는 그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등장과 질책보다, 교주라는 단어에 더욱 놀랐다.
‘그럼……?!’
기우희의 시선이 다시 황금빛 머리카락의 남자에게로 향했다.
그때, 남자가 말했다.
“금사.”
나직하게 깔리는 목소리에 숨이 막힐 듯한 분노가 가득했다.
“네놈이 감히 그 추한 눈과 혓바닥으로 내 딸을 희롱했으렷다.”
기우희의 입이 쩍 벌어졌다.
화아아아악!!
순간 엄청난 돌풍과 함께 남자, 기천웅의 몸에서 시뻘건 화염이 솟구쳤다.
핏발 선 눈과 살기, 중원에 와서 가장 크게 분노하는 화신(火神)이었다.
야헌의 얼굴에 공포가 깃들었다.
“네, 네놈이……!”
“죽어!”
콰아앙!
폭음을 내며 달려 나간 기천웅이 야헌의 얼굴을 붙잡고 그대로 땅에 처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