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272)
흑백무제 1273화(1273/1280)
1273화. 사신 강림(邪神降臨) (8)
그때, 기천웅의 입이 열렸다.
“오랜만이구나.”
기우희가 멈칫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예, 그렇습니다.”
기천웅은 여전히 등을 돌리지 않았다. 마주하며 웃는 얼굴로 대하지 못했다.
이 순간, 그는 당관을 생각했다.
‘그와 그의 아비도 이십 년간 서로를 보지 않았다고 했던가.’
사천 전투가 끝나고 당가에서 휴식을 취할 때, 당가 사람들 몇몇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광혈교의 책략으로 사천이 엉망진창이 되고 가문이 적의 손에 떨어질 때가 되어서야 두 부자는 화해했다고 들었다.
그리고 당형은 아들과 가문을 위해, 사천을 위해 광혈교주와 싸우다가 죽었더랬다.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들은 내용 중 절반만 사실이더라도 당관이 얼마나 슬퍼했을지를 알 수 있었다.
‘그렇게나 사랑하던 아비와 이십 년 동안 얼굴을 보지 않고 살았다. 자존심 때문이라고 들었지만, 그것은 단순히 자존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기천웅은 알고 있었다. 알 수밖에 없었다.
지금 자신이 제 딸을 대하는 심정이 그와 비슷할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당관은 그 자신의 딸과도 사이가 좋지 않다가, 무림맹에서 겨우 화해하여 여느 부녀지간과 같은 사이로 돌아왔다고 했다.
‘키워 준 부모와 기른 자식과도 척을 지며 살았던 그자는 지금, 부모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딸에게 가문을 이양할 정도로 변했다.’
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그는 그리 변할 수 있었던 것일까.
직접 만난 당관은 그가 봤던 어떤 사람보다도 자존심이 강하고 강단 넘치는 인간이었다. 어떤 의미로는 편협한 면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그는 멀리했던 아비와 딸을 받아들였다. 사과를 한 건진 모르겠지만, 그리 독한 사람도 제 혈육 귀한 줄은 알았단 말이다.
하면 자신은?
죄책감과 부끄러움이, 자존심과 두려움이 딸을 향한 애정보다도 더 크단 말인가?
나는 지금 신화교주인가, 기천웅인가? 아비인가, 딸을 버린 폭군인가?
대체 나는 누구인가?
“저는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
“싸움이 몹시 격정적입니다. 다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고민하며 우물쭈물하다가 겨우 뱉은 말이 그것이다.
기천웅은 눈을 감았다.
기우희가 고개를 숙였다.
“그럼…….”
“네 실력이 대륙을 진동케 할 정도로 대단하다고 들었다.”
“네?”
“너의 의술 말이다.”
“아…… 예에.”
기우희는 당황했다. 평소라면 그렇지 않다며 겸양이라도 떨겠는데, 너무 느닷없는 칭찬이라 그러지도 못했다.
그때, 처음으로 기천웅이 고개를 돌려 기우희를 바라보았다.
순간 기우희의 눈이 흔들렸다.
그저 마주하는 것뿐인데도 눈물이 차오르려 했다. 그리 거대하고 탄탄한 상단전을 지녔는데도 가슴을 턱 멎게 하는 감정을 막을 수가 없었다.
“보살펴 주지 못했는데도 이리 훌륭하게 컸구나.”
“……!”
“못난 아비 때문에 고생이 많았다.”
결국 기우희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기천웅의 얼굴 역시 절로 서글퍼졌다.
고작 고생했다는 말 한마디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어 버리는 딸이다. 그런 아이 앞에서 부끄럽다고, 위선자가 되기 싫다고 말 한마디 건네는 걸 고민했던 게 후회되었다.
그간의 고민은 어디로 갔는지, 말이 술술 나오기 시작했다.
“내 너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미안하다고 말하기엔 외면한 세월이 너무 길고, 잘 커 주어 고맙다고 하기에는 혈육을 신경 쓰지 않은 인생이었다. 무슨 말을 해도 너에게는 상처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버지.”
“못난 아비라, 네 앞에 이리 서 있는 것조차 다리가 떨리고 칼로 쑤신 듯 심장이 아프다. 미안함이 바다처럼 깊고 부끄러움에 고개조차 들 수 없거늘, 그래도 다시 만난 딸을 보며 기뻐하니 이런 위선자가 또 없을 것이다.”
기우희는 대답 없이 고개를 저었다. 입이 잘 열리지 않았다.
기천웅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대륙으로 들어온 후, 언제든 너를 찾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널 찾지 않았다. 당면한 과제들이 너무 많았다고 변명하기엔 시간 또한 제법 많았다.”
“…….”
“결국 나는 너를 만나기가 무서웠던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만나기 무서웠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진심이 아니라면 이런 말도 할 수 없다. 그 말만으로도 기우희는 아비에 대한 두려움과 섭섭함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는 것을 느꼈다.
대단한 말이나 행동을 해 줄 필요는 없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진심 어린 말 한마디다. 그것은 관계가 깊어질수록 진리에 가까워진다.
비록 오랜 세월 서로를 신경 쓰지 않았지만, 천륜으로 맺어진 관계처럼 가까운 사이는 없다. 기천웅의 진심 어린 말에 기우희가 대답도 못 하고 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물론, 그만큼 기우희의 천성이 순하고 선하기 때문이기도 할 테지만.
“이렇게 너를 보니, 왜 진즉 찾아오지 않았는지 또 후회가 된다. 네가 아비를 용서치 않더라도, 나는 누구보다 먼저 너를 찾아왔어야만 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앞으로 시간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번 싸움이 끝나면, 그때는 내 다시 너를 찾아갈 것이다.”
“…….”
“생에 처음으로 하는 이 약속만큼은, 몸이 부서지더라도 꼭 지킬 것이다.”
딸을 향한 애정과 미안함, 위험한 지역에서 빨리 벗어나게 해 주고 싶은 다급함과 그런 상황에서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다 느껴지는 말이다.
눈물을 훔친 기우희가 기천웅을 바라보았다.
웃거나 슬퍼하지 않는 얼굴, 강단 있는 눈매에 한 사람의 성인으로 성장한 결기 있는 딸의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아버지와 회포를 풀기에는 적당한 장소가 아닌 듯합니다. 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으니, 저는 이만 물러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부디 다치지 마세요. 결코 무리하지 마세요. 만약 다쳐서 돌아오시더라도 제가 꼭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기천웅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 말해 주어 고맙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몸을 돌린 기우희는 서둘러 의원들이 퇴각한 곳으로 달렸다.
달려 나가는 딸의 등을 보는 기천웅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이렇게 듬직하게 컸구나.’
어떤 모습으로 컸는지 궁금했다. 한데 이렇게까지 든든한 성인이 되었을 줄은 몰랐다.
그래서 더 아쉽고, 기특하고, 또 미안하다.
‘내 모든 것을 걸고 대륙으로 왔다. 하나 이렇게 너를 보니, 이기적이게도 십 년, 이십 년을 더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기천웅은 애써 고개를 돌렸다. 멀어지는 딸의 뒷모습을 계속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따라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만나지 못했던, 만나고 싶었던 딸과 드디어 만났다.
이제는 기억에 선명한, 만나야만 하는 또 다른 자식을 향해 나아가야 할 때였다.
번쩍!
기천웅의 두 눈에 푸른 화염이 넘실거렸다.
야헌의 머리가 부서진 시점에서 삼단폭화공의 힘은 절반 이하로 줄었다. 나아가 야헌의 순정한 화기를 빨아들여 일시적으로 체력까지 회복한 그였다.
‘이번 싸움의 결착은 내 손으로 짓겠다.’
기천웅이 전장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리고 십 리 밖 산길.
기천웅과 함께 대륙으로 넘어온 일천 병력의 장(將)인 구마하가 찰극평과 접선하여 진군을 시작했다.
* * *
“뭐 이런 미친놈이……!”
콰아아앙!
내리찍는 도를 막은 철목후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기공으로 먼저 막고 찰나의 빈틈을 이용해 물러났기에 망정이지, 그냥 힘으로 밀고 들어갔으면 머리통이 잘려 나갔을 것이다.
“이것밖에 안 되는가!”
화아아아악!
대단한 기백이었다.
창백한 안색, 코와 입에서는 핏물을 쏟아 내고 있다. 그런데도 패왕도를 휘두르며 전진하는 종리백의 몸에선 불꽃 같은 패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치리리리링!
철목후의 좌우를 오가며 기마병들을 학살한 남궁승이 외쳤다.
“종리 무상! 뒤로 물러나시오! 어서!”
“으하하하!!”
남궁승의 말도 듣지 않는다.
아니,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탄력 넘치는 보법으로 철목후를 쫓아가며 종횡으로 패왕도를 휘두르는 그의 모습은 만부부당의 역사를 보는 듯했다.
“사부님!”
기겁한 오구문도 종리백을 쫓았다.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사방이 불바다가 되었다.
철목후의 열양공도 대단했지만, 측면에서 사선으로 치고 들어오는 신화교도들의 공세도 대단했다. 이제는 굳이 화기를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건지 각종 권장과 병기를 휘두르며 전진하는데,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위협이 되었다.
오구문이 이를 악물며 칼을 휘둘렀다.
퍼버벅! 쩌저저저정!
손목 세 개가 잘려 나가고 병장기 다섯 개가 부서졌다.
전투를 치르며 무섭게 성장하는 무(武)였다. 아직 스승의 발끝에도 이르지 못하지만, 활짝 개화한 재능은 그 역시 훗날 스승 못지않은 위대한 무사가 될 것임을 만천하에 알려 주고 있었다.
하지만 오구문으로서는 그런 사실 따위 아무 의미도 없었다.
“사부님!!”
퍼퍼펑!
기백만으로 상대를 몰아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기어이 패왕도를 뚫고 들어온 철목후의 주먹이 종리백의 가슴을 후려쳤다. 종리백이 피를 토하며 뒤로 날아갔다.
콰드드득!
그 상황에서도 패왕도를 땅에 꽂아 속도를 조절한다.
투지 넘치는 노무사의 행동에 철목후의 얼굴이 굳어졌다.
‘도대체가.’
씨익 웃는 종리백의 얼굴은 누가 봐도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의 그것이었다.
한데도 기백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살기가 짙어지고 존재감이 거대해졌다.
지금 이 자리, 이 전장에서 제 몫을 하고 가겠다는 진짜 도객의 기파였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이미 화기가 심맥까지 파고들었는데 그걸 무시하고 싸운단 말인가.’
쾅!
땅을 박차고 돌진한 종리백.
어느새 그의 몸에 화살 세 대가 박혔다.
한낱 기마병들의 화살에 당할 그가 아니었다. 전신을 융통무애하게 지배하는 내공이 끊어지고 있다는 증거, 그런데도 휘두르는 칼에는 만근의 힘이 담겨 있었다.
콰아아앙!!
천지를 뒤흔드는 일격에 기마병 다섯 기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직접 타격이 아닌 충격파만으로 기마병들을 쓰러트렸다. 괴물과도 같은 무력, 광기로 물든 기마 부대 선봉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종리백의 힘에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는 안 돼.’
그나마 저 노검사가 끼어들지 않아서 다행일까.
하지만 그것도 전국(全局)을 보면 썩 좋다고 할 수 없었다.
노검사가 기마병들과 교도들만 골라서 쓰러트리는 건 후퇴하는 병력과의 거리를 넓히기 위함이다. 자칫 잘못하다간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칠 것이다.
‘빌어먹을! 왜 지원이 오지 않지?!’
저 멀리 후방에 새로운 교주와 화왕, 그리고 전대 고수인 적룡이 있다.
그들 중 하나만 참전해도 싸움이 이렇게까지 어렵진 않을 것이다.
‘증명하라는 것인가. 전장이 이 꼴이 나고 있는데도!’
철목후가 입술을 짓씹었다.
‘참으로 속 편한 것들이…….’
그때였다.
화아아아악!!
저 멀리 남쪽에서부터 엄청난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을 맞은 모든 사람의 몸이 굳어졌다. 이 바람이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부아아아앙!!
질풍처럼 공기를 찢고 날아오는 누군가가 있었다.
한 자루 거대한 도끼를 어깨에 걸친 채, 비행(飛行)이라도 하는 양 질주하는 한 남자.
“전열을 정비해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오십 장 밖인데도 이곳에 있는 모두가 귀를 막을 정도였다.
“더 이상의 후퇴는 없다! 너희는 보호받으려고 온 게 아니야! 돌진해!”
엄청나게 커다란 목소리엔 듣는 이의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는 격정과 신뢰가 가득했다.
흑제성의 주인, 흑백무제 연호정이 마침내 전장에 진입한 것이다.
“내가 너희와 함께할 것이다! 진군하라!”
우와아아아!!
힘찬 함성과 함께, 무림맹 병력이 홀린 듯 눈을 빛내며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