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274)
흑백무제 1275화(1275/1280)
1275화. 사신 강림(邪神降臨) (10)
사박.
땅을 딛는 발엔 중원에서도 보기 힘든 최고급 가죽으로 만든 신발이 신겨져 있었다.
그야말로 황족이나 신을 수 있을 법한 신발 위, 적당한 무게감으로 흔들리는 황포 자락은 황금빛으로 가득했다.
옷에 금칠을 해도 이렇게는 빛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원료를 썼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옷 스스로 빛을 내기라도 하는 양, 햇빛조차 밀어 버리는 광채가 보의(寶衣)에 가득했다.
“흐음.”
낮게 깔리는 목소리는 실로 용의 숨결과도 같았다.
치리링.
습관처럼 손가락을 움직이는데, 열 손가락에 끼워진 보석 박힌 반지들이 저마다 소리를 내며 천상의 음률을 전했다.
“이 감촉, 이 공기.”
크게 숨을 들이쉬니 안 그래도 거대한 몸이 더 크게 부풀었다.
“참으로 오랜만이도다.”
흡족함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위엄이란 말로는 부족하다. 그 목소리와 의관은 성스럽다는 표현 이외에 형용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이질적이었다.
그처럼 대단한 의관을 갖추었다면 의관만으로도 얼굴이 빛나 보여야 정상이었다. 한데도 그의 낯빛은 죽은 사람처럼 푸르딩딩했다.
피부는 매끈하지만 시체의 얼굴처럼 퍼렇다. 군데군데 회색으로 물든 피부를 보자면 정말 시체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깊은 눈두덩이는 서역인의 그것과 비슷했지만, 그보다 훨씬 더 깊고 또렷했다. 오뚝 솟은 코는 다소 넓적했으나 둔해 보이기보단 튼튼하고 강렬해 보였다.
칠 척에 이르는 장신에 길쭉한 팔다리, 황족 이상으로 고급스러운 의복에 산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얼굴은 기가 막힐 정도로 부조화를 이룬다.
하지만 그를 보는 이들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완벽하다고.
기괴하고 성스럽다. 위엄이 넘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자애가 엿보인다. 지옥에서 올라온 마귀 같으면서도 등 뒤에 후광이 번지는 듯했다.
무엇 하나 어울리지 않는 요소들이 하나로 뭉쳐져 완벽함을 자아냈다.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신선이 아니고서야 설명하기 힘든 그 분위기는 필경 불합리로 가득한 세상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중원의 공기는 독특하지. 날카롭거나 세차지 않아. 그러면서도 폭풍이 일면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거세다.”
낭랑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철썩이는 바닷소리와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저 영음산만큼 고요하지 않은 바람은, 신기하게도 어떠한 적막보다 깊은 적막을 선사한다. 그 단순하지 않은 공기는 마치 모순으로 가득한 인간을 상징하는 듯하다.”
후우우우웅.
바람이 불어왔다.
마치 그의 말에 호응이라도 하듯, 바람은 그의 의관과 머리카락을 희롱하다가 점차 잠잠해졌다.
“그래서 나는 이곳 중원이 좋았다. 세상의 중심이라 자처하는 오만무도한 인간들의 무지와 탐욕이 사랑스러웠다. 끝이 없는 천하에 스스로가 세상의 중심이라 생각한 자들은 많았지만, 이만한 광기를 보여 준 인간들은 드물어.”
남자는 하늘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저 멀리 하늘을 날던 새 떼가, 어인 일인지 비틀거리다가 힘을 잃고 떨어졌다.
“예정보다 너무 빨랐다. 본래라면 십 년, 아니 십오 년 뒤에나 이곳으로 왔어야 했다. 사음비록(邪淫祕錄)은 내게 그리 알려 주었다.”
투두두둑.
날갯짓을 멈춘 새들이 땅에 떨어지며 모조리 죽었다.
“하지만 비록은 틀렸어. 나는 지금 이곳에 올 수밖에 없었다. 비록을 따라 움직여도 아무 문제는 없었겠지만, 내 마음이 그리 시키지 않았으니 필경 비록을 적은 이도 나의 이러한 행동을 예측하지 않았을까.”
스륵.
남자의 뒤로 사괴술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신이시여.”
“하하하!”
느닷없이 터져 나오는 남자의 웃음.
순간 해안가 일대의 햇빛이 모조리 어둠으로 물드는 것 같았다.
그 웃음소리를 들은 사괴술사도, 그를 모시고 온 두 명의 사왕(邪王)도 몸을 움츠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들 앞, 교선(敎船)에서 미리 내려 좌우로 도열한 일천의 호법사제(護法司祭)들도 공포에 질려 고개를 숙였다.
한참이나 웃음을 터트리던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신이라…… 참으로 기가 차는 호칭이로다.”
“……!”
“그래, 나는 곧 신이 될 남자이지. 그러나 아직은 씨앗일 뿐이니, 부르기 좋도록 교주라 칭하면 될 것이다.”
사괴술사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영음산에 있을 때, 교주는 항상 신을 자처했고 휘하의 사왕은 물론 사제와 교도 모두가 그를 사신(邪神)이라 불렀다.
한데 지금은 자신을 교주라 칭하라고 한다. 아직은 씨앗일 뿐 진짜 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예전부터 느꼈지만…… 도무지 한 사람과 대화하는 것 같지가 않구나. 때에 따라 전혀 다른 사람을 대하는 듯하다.’
고래로 신은 괴팍하고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을 지녔다고 했다.
어쩌면 이 사람, 아니 이 존귀한 분도 그와 비슷할지 모른다.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평범한 인간이라서 그런 것일 뿐, 진짜 신의 경지에 달한 자에겐 저러한 모습이 올바른 것일는지도 모른다.
뭐가 되었든 신께서 명령하셨으니, 교도로서 마땅히 따라야만 했다.
“교주님.”
“말씀하시게, 사괴술사.”
이 또한 다르다.
한낱 종처럼 대하던 이전과 달리 지금은 충분한 예의를 차려 준다.
대륙 땅을 밟으며 크게 흥이 올랐기 때문일까? 그렇다고 보기엔 영음산에서도 세상 모든 쾌락을 손에 넣고 주무르던 분이었다.
사괴술사는 괜스레 치솟는 궁금증을 애써 억누르며 말했다.
“광옥(狂玉)이 핏빛으로 물들었습니다. 해로(海路)로 향한 삼만의 음황군(陰荒軍)이 교전을 시작한 듯합니다.”
“허허, 그러한가.”
“빛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불신자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은 모양입니다.”
남자가 해맑은 얼굴로 말했다.
“언제나 그러했지. 백 년, 아니 삼백 년 전에도 이들의 저항은 처절하고도 격렬했다. 쉬이 밟힐 듯하면서도 믿을 수 없는 저력으로 일어나 끝끝내 본인들의 땅을 사수했더랬다.”
사괴술사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삼백 년 전이라니? 그렇다면 이 사신께선 그때도 대륙에 들어와 본 적이 있다는 뜻이 아닌가?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 수 없었다. 사괴술사는 당대 사신의 젊은 시절을 익히 알고 있었다.
물론 당시에는 대화조차 나눠 본 적 없었지만, 드넓은 황야를 오간 적은 있어도 대륙 땅을 밟은 적은 없다고 알고 있었다.
‘도무지 모르겠구나.’
억지로 이해하려 들 필요는 없다. 어쩌면 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의 눈은 시공조차 넘나드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삼만의 음황군은 기필코 대륙의 동부를 장악할 것입니다.”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확신하지 말게, 사괴. 이 세상의 이치는 복잡다단하면서도 선명한 구석이 있어. 그러면서도 또 기가 찰 만큼 어지러운 변덕 또한 부리는 법이지.”
“……!”
“그 어떤 일이건 확신하는 일은 없도록 하게나.”
“며, 명심하겠습니다!”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절대적인 자신감을 보여 주던 분이, 지금은 또 확신하지 말라고 하신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예전 모습과의 괴리를 느끼게 된다. 사괴술사는 또 한 번 자신을 억눌렀다.
“그나저나…….”
화아아악!
남자의 몸에서 알 수 없는 기파가 흘러나왔다.
그 기파는 참으로 오묘했다. 빛을 집어삼키는 어둠과 같지만, 그 기괴한 기파가 또 마냥 공포스럽지만은 않았다.
어딘지 모르게 포근하고 안락하다. 도열한 호법사제들과 사왕들, 사괴술사의 얼굴에 드리워진 긴장이 옅어졌다.
남자가 의아한 얼굴로 저 멀리 서쪽을 바라보았다.
“저 방향은 섬서인가……? 그렇군. 그 녀석, 사진(邪陣)을 꾀하고 있었던가.”
사괴술사의 눈이 깊어졌다.
‘그 녀석이라니? 누구?’
사진이라 함은 곧 사기로 일대를 오염시켜 아군과 적 모두를 광기에 빠트리는 술법진의 일종이었다.
머릿수가 적으면 제대로 된 효능을 뽑아낼 수 없지만, 천 단위부터는 효과가 확실하다. 만 단위가 되면 상단전이 극도로 연마된 자가 아니면 모두 미쳐 날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산서 역시 마찬가지. 초원의 기마병들을 숙주로 사진을 개진(開陣)토록 하여 섬서와 산서 두 지방을 초토화시키는 게 북부 공략의 골자였다.
그리고 그 계획을 세우고 명령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사신(邪神), 교주였다.
남자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섬서의 사진은 참으로 잘 개화했군. 얼룩지다 못해 점점 검어지는 저 기운…… 저 광기로 갈변한 피의 전장을 얼마 만에 보는 것인지.”
심지어 이토록 먼 거리에서 섬서의 전장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실제 육안으로 보이는 건지, 느끼는 건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건 이 불세출의 사신이 수천 리 밖에서 벌어지는 일까지 꿰뚫어 볼 수 있을 만큼 무궁무진한 능력을 지녔다는 것이다.
웃으며 서북을 바라보던 남자의 시선이 미세하게 내려왔다.
동시에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산서…… 산서라.”
남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묘한 바람이야.”
사괴술사는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다.
“교주님, 산서의 전투에 혹 어떤 문제라도 있는지요?”
“문제랄 것은 없는데…… 잘 모르겠네.”
“……?”
“차근차근 내려오고 있기는 한데…… 저곳으로 올라가고 있는 바람이 하나 있어. 그 옆에 익숙한 불꽃도 엿보이는데, 그건 기천웅 같네.”
사괴술사의 눈이 번뜩였다.
‘전대 신화교주!’
화정의 폐해를 이기지 못해 무너져 버렸지만, 모든 힘을 개방하면 거의 광혈교주에 육박하는 무력을 선보일 수 있다는 또 하나의 절대자다.
남자의 얼굴에 묘한 불쾌함이 어렸다.
“이상하구나. 자연에 녹아들어 가는 듯한 저 바람은 필경 그 광인의 것과 비슷한데 또 많이 달라. 하기야, 광인의 그 무공은 전수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으니 그자의 후예일 리는 없을 테고.”
고민하는 듯하던 남자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미 맡겨 둔 전장이니 더 이상 영력을 소모하면서까지 봐 줄 필요는 없겠지.”
“예, 교주님. 옥체에 해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남자가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장관이로고.”
해안가에 정박한 배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크기를 자랑했다.
인간의 솜씨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거대한 그 배는 화포로도, 초절정고수의 무공으로도 흠집 하나 내기 힘들 만큼 튼튼해 보였다.
사괴술사가 고개를 숙였다.
“이곳 산동(山東)은 예로부터 좋은 술이 나기로 유명했다 합니다. 살기도 좋아서 여러…….”
“산동분주라 하면 천하에서도 알아주는 명주지.”
“……!”
“그래, 사괴 말대로 오랜만에 분주 맛이나 보고 싶구먼.”
“모,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굳이 모실 필요가 있겠나.”
씨익 웃은 남자가 다시 서쪽을 바라보았다.
산동 전체가 그의 눈에 훤히 담겼다.
“산동의 모든 무(武)를 지우고, 모든 웃음을 누르고, 모든 절망을 일으키다 보면 분주보다 맛난 눈물과 듣기 좋은 신음 소리를 두 귀에 담을 수 있을 것이네.”
시체처럼 푸르스름한 남자의 얼굴이 점점 귀신처럼 사이해졌다.
사괴술사는 생각했다. 그렇게나 여러 모습을 보여 주지만, 사신의 본질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고.
죽음, 광기, 능욕.
그리고 그 속에서 새로운 혈신(血神)의 교단을 찾는 것이야말로 사신의 일생일대 목표였다.
“자, 가 보자꾸나. 태산의 봉신 절경이 그립다.”
사음교주 사문향.
그가 지금 산동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