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275)
흑백무제 1276화(1276/1280)
1276화. 전설이 되다 (1)
“우아아아아!”
“죽여! 죽여!”
“이 개 같은 오랑캐 놈들! 다 때려죽여 버려!”
광기도 이런 광기가 없었다.
고매하기로 이름 높은 화산의 검사들이 내리치는 검은 육도(肉刀)로 고기를 자르는 백정들의 칼질과 다르지 않았다.
무공 본연의 투로와 강력한 내공은 그대로 살아 있다. 하지만 너무 거칠고 난삽했다.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짐승을 죽이는 것 같았다.
행위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그들의 눈빛이, 기도가, 입에서 나오는 쌍소리가 들이닥치는 기마병들을 짐승으로 보는 것 같았다.
막원이 외쳤다.
“정신들 차리시오!”
쩌어어어엉!
천무신병기를 한껏 담아 외치니, 미친 듯이 기마병들을 베어 넘기던 용선진인이 움찔했다.
“사기(邪氣)에 홀리지 마시오! 정심(正心)을 되찾아야 하오!”
용선진인의 얼굴에 혼란이 깃들었다.
그때, 폭급한 성정의 용강진인이 외쳤다.
“누가 사기에 홀렸단 말인가!”
푸화아악!
말의 목과 기마병의 몸통을 통째로 날려 버린 용강진인.
핏발 선 그의 두 눈은 끔찍한 살기로 가득했다.
“이놈들은 적이다! 다시는 이 땅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완전히 박멸시켜 버려라!”
“우와아아!!”
스스로 사기에 홀렸다는 것도 모른다.
전장의 냉혹함은 수양 깊은 고승도 짐승으로 만든다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화산의 장로들이 이럴 수는 없는 법이다.
인성을 점차 상실해 가는 중이더라도 화산의 올바른 가르침을 되새겨야 할 그들이 지금은 완전히 살심으로 가득했다. 도가 비전 화산의 신공을 익히고도 더 강한 힘만을 추구할 뿐, 물러서고 밀어 내는 합(合)의 이치도 다 내려놓았다.
말 그대로 도살이었다. 적을 맞아 싸우는 투기(鬪氣)가 아닌, 사람을 죽이고 얻을 수 있는 쾌락에 젖어 흉흉한 기파를 드리우고 있었다.
막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갈(喝)!!”
백병신군의 엄청난 일갈에 화산 장로들이 화들짝 놀랐다.
“눈 크게 뜨고 똑바로 보시오! 그들은 사람이오! 적을 적으로서 상대하시오!”
사람이든 짐승이든 죽이는 행위에는 차이가 없다.
그러나 그들을 어떤 마음으로 대하느냐에 따라 승자는 사람으로 남을 수도, 짐승으로 남을 수도 있다.
막원은 그렇게 믿었다. 적을 섬멸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사기에 홀려 정심이 흔들린다면 이건 전쟁이 아니라 학살에 불과할 뿐이다.
우우우우웅!
용선진인의 몸에서 자색 기운이 구름처럼 일어났다.
그들 중 유일하게 막원의 일갈에 정신을 차린 사람이 그였다. 아직 침투한 사기를 다 벗겨 내진 못했지만, 자신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은 인지한 것이다.
그때, 천효락이 외쳤다.
“선배님!”
막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백뢰창을 휘둘렀다.
푸화아악!
손목 한번 틀어 내는 것만으로도 막강한 경파가 쏟아졌다. 그 일격에 기마와 기마병의 몸통이 산산조각이 났다.
일인 일마가 흘린 피를 고스란히 맞은 막원. 하지만 그의 눈에 흔들림은 없었다. 피범벅이 된 몰골은 섬뜩함 그 자체였지만, 두 눈은 언제나처럼 맑고 깊었다.
‘이제 느껴진다.’
치이이익!
막원의 몸에서 회색빛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언제나 전신을 융통무애하게 흐르던 천무신병기를 일부러 거두었다.
그러면서 피를 맞고 나니 알겠다. 저들의 육신에, 피에 지독한 사기가 가득하다는 걸.
그리고 그 사기에 오염되는 순간 중단전이 뻐근해진다는 것을.
천무신병기의 성질은 금(金)을 기본으로 하며, 탄탄하기 그지없는 방어력을 자랑한다. 잡스러운 외기(外氣)를 원천 봉쇄하거니와 그가 이룬 경지가 원체 높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놈들이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알겠어.’
금기(金氣)는 상단전과 어울리는 기운은 아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의 상단전은 방대한 위용을 자랑하며, 몰랐을 때는 몰라도 알게 된 순간 주변 모든 기운의 흐름을 인지할 수 있었다.
‘이건 진(陣)이다.’
우웅!
막원의 눈이 형형해졌다.
드넓은 지역에서 몰아치는 거대하고 탁한 기운의 흐름이 보였다.
기마병들이 뿜는 사기는 생생했고, 시체에서 풍겨 나오는 사기는 지독했다. 왜 이제야 알았나 의문이 들 정도로 선명한 기운이었다.
‘뒤는 더하다!’
죽은 기마병들의 피를 뒤집어쓴 섬서 무림 병력의 사기는 그보다 훨씬 더 심해 보였다.
애초에 탁한 물에 진흙 한 줌 던져 봐야 거기서 거기지만, 하얀 종이 위에 먹물 한 방울을 뿌리면 티가 확 나는 법이다.
당연히 오염도도 훨씬 심하다. 그게 지금 무림 병력의 상태였다.
퍼퍼퍼퍽!
용수창법으로 반경 오 장을 아우르는 창격을 뽐냈다. 수십 기의 기마가 다리를 꺾고 쓰러졌다.
그 즉시 천효락과 화향의 도검이 병사들의 목을 쳐 냈다.
‘문제는, 지금은 이미 늦었다는 것이다.’
막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기로 물들기 전이라면 모를까, 화산파 장로 수준의 무인들까지 제정신이 아닌 상황이었다.
저들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는 도가 비전의 청정기(淸淨氣)를 기반으로 한 술법이나 불가 비전의 법언(法言)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도 지극히 수준 높은 공부로.
안타깝게도 지금의 막원에게는 없는 공부였다. 격체전력으로 몇몇 고수의 정신을 일깨울 수는 있지만, 전투 중에 언제 그들의 정신을 바로 세운단 말인가.
설령 틈과 시간이 있어 몇몇을 정상으로 만들어 놓는다 치더라도, 다시 전투를 감행했을 때 사기에 오염되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다.
‘빌어먹을!’
스스로에 대한 무력감, 알 수 없는 분노로 인해 그의 창격이 더 거세졌다.
퍼퍼퍼퍼펑!!
꿰뚫어 죽이는 것이 아니라 터트려 박살 낸다.
조금이라도 후방으로 보내지 않겠다는 의지까지 담긴 그의 창술에 자극받은 천효락과 화향의 무공 역시 무서운 위력을 발했다.
하지만 그들의 힘은 한계가 있었다.
적의 수가 많기도 많거니와 이젠 사음의 병력이 전권에 들어올 정도로 가까워졌다.
“대단하군.”
혼란스러운 전장에 울려 퍼지는 기괴한 목소리.
“우리가 아는 창왕이 아니야. 그런데도 이 정도 창술을 구사한다면 그의 사제인 백병신군 정도밖에 없겠지.”
파아아앙!
기마병들의 어깨를 밟아 가며 날아오는 한 명의 고수가 있었다.
막원의 눈이 흔들렸다.
‘초고수다!’
훅, 하고 끼치는 사기의 폭풍이 실로 무시무시했다.
삼군(三君)급을 넘어가는 고수다. 막원 역시 오랜 전투와 깨달음으로 수년 전보다 큰 발전을 이루었지만, 상대 역시 그 못지않은 무공의 소유자인 듯했다.
“그의 사제라면, 대륙 식으로는 나의 사숙이라고도 할 수 있겠군. 나이는 내가 더 많아도 말이다.”
지이잉! 지이잉!
사내의 손에 들린 것은 육 척 길이의 장창이었다.
중원의 장창보다 창날 길이가 두 배는 더 길었다. 찌르는 걸 넘어 베는 것에도 특화가 된 병기로, 창날의 두께와 너비도 상당했다.
사내의 창이 섬광을 뿜었다.
번쩍!
엄청난 속도로 쏘아지는 경풍에 막원의 좌권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콰앙!
강력한 폭발력에 기마 다섯 기가 쓰러지고 천효락과 화향 역시 주춤했다.
“용황창(龍荒槍)을 주먹으로 막아? 과연!”
감탄이 가득 실린 목소리였다.
광기로 가득한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였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목소리이기도 했다. 호적수를 만난 무인의 음성,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파에 흡족함이 가득했다.
막원이 버럭 소리쳤다.
“넌 또 뭐야!”
“킥!”
순식간에 막원 앞까지 날아온 사내가 힘차게 창을 휘둘렀다.
마치 커다란 칼로 내리치듯, 창대를 잡고 태산압정의 기세를 뿜는다.
막원 역시 양손으로 쥔 백뢰창을 횡으로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두 자루 창대가 부딪치며 사방에 폭풍을 일으켰다.
막원의 두 발이 복숭아뼈까지 땅을 파고들었다. 사내는 뒤로 튕겨 나갔다가 가볍게 땅으로 내려섰다.
막원의 눈이 흔들렸다.
‘이 초식은?!’
단순한 일격이었지만 그 안에 실린 경력에 복잡한 구결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이건 무종문 청룡호춘창(靑龍呼春槍)의 춘우환룡(春雨喚龍)과 지극히 유사했다. 내공을 있는 대로 끌어올려 내리치면 반경 오 장을 초토화시킬 수 있는 무공, 폭우와 같은 창격의 투로였다.
“네놈이 어찌 청룡호춘창을?!”
“청룡?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용황창은 백창(百槍)의 장점을 모은 무공이니까!”
씨익 웃는 사내, 사음교의 구사왕(九邪王) 항천의 얼굴에 귀기(鬼氣)가 담겼다.
“창왕 사문 최고의 천재라는 백병신군 막원의 무공이 얼마나 대단한지 볼까!”
“너!”
백뢰창이 일직선으로 쏘아졌다.
콰아앙!
창격을 막은 항천의 몸이 밀려나며 기마 세 기를 날려 버렸다.
막원의 얼굴에도 항천과 비슷한 귀기가 어렸다.
“소현립 그놈에게 무공을 사사했나?!”
“하하하! 좋은 위력이다! 내 상대로 부족함이 없어!”
파파팡!
파공음이 날 정도로 빠른 몸놀림이지만, 와중에 뱀의 움직임처럼 부드럽다.
순식간에 다가와 내치는 삼창(三槍)에 치명적인 사기가 깃들어 있었다. 한 방만 허용해도 저 불길한 기운이 중단전과 상단전을 뒤흔들 것만 같은 위기감이 들었다.
쩌저저정!
항천의 창을 쳐 낸 막원은 더 분노했지만, 그만큼 걱정도 커졌다.
‘이 싸움은 대체……!’
항천 못지않은, 아니 그 이상인 기척이 세 개나 느껴졌다.
항천까진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어도, 하나만 더 합세하면 무조건 밀릴 것이다. 무극수들의 싸움에선 하나의 가세가 치명적이다.
심지어 하나도 아니고 셋이라면 이 싸움의 승패는 이미 결정 난 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도!’
쾅!
힘찬 진각과 함께 용수창법이 사위를 휩쓸었다.
조금 전보다 더 넓은 범위를 아우른다. 거리를 벌리지 못한 기마 네 기가 갈기갈기 찢어졌다.
항천의 얼굴이 굳어졌다.
쩌저저저저정!
신들린 창술로 용수창법을 막았지만, 옆구리와 어깨에 두 줄기 상처를 입었다.
얕다고는 하나 초식 하나에 상처를 입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항천의 얼굴에 질린 기색이 떠올랐다.
막원의 눈에 결심이 섰다.
‘이곳에서 죽더라도 막을 만큼은 막겠다!’
그때였다.
두두두두.
무서운 집중력으로 항천을 밀어붙이던 막원은 문득, 저 멀리 후방에서 들불처럼 일어나는 거센 기운을 느꼈다.
‘……?!’
막원의 눈이 흔들렸다.
‘이 기운은?’
군기(軍氣)다.
목숨을 던져 싸우는 와중이라 그런지 상단전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예민해졌다.
그래서 느낄 수 있었다. 아직 한참 남은 거리에서부터 전해지는 강자의 기운을.
그리고.
뭉클뭉클.
저 멀리 남서쪽에서부터 올라오는 불길한 기운도.
불길하지만, 동시에 친숙함이 느껴진다. 향긋하면서도 불쾌한 냄새가 코끝을 맴도는 듯했다.
남쪽에서 올라오는 군기보다 훨씬 더 가깝고, 훨씬 더 빠르다.
반 각도 되지 않아 이곳에 도착할 것 같은, 아니 그보다 더 빨리 도달할 거라 확신이 드는 두 개의 기운이었다.
쩌어어엉!
항천의 창에 밀린 막원이 미친 듯이 뒤로 물러났다.
“이놈! 집중력이 떨어졌구나!”
“그러게나 말이다.”
입가에서 흐르는 피를 닦으며 씨익 웃는 막원의 얼굴에 무서운 투기가 어렸다.
“이제는 제법 해볼 만하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안심이 된 모양이다.”
남쪽에서 올라오는 맹렬한 군기, 남서쪽에서 쏘아지는 독음(毒音)의 살기.
화아아악!
언제부터였는지 서쪽 일대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핏빛 소용돌이로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만류귀원의 힘, 사천의 패자 당관과 음제 하은교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러면 막는 선에서 끝내지 않아도 돼.”
콰쾅!
근접하여 백뢰창을 휘두르는 막원이 하얗게 웃었다.
“이제부터는 잡아먹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