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276)
흑백무제 1277화(1277/1280)
1277화. 전설이 되다 (2)
“관망하려 했건만, 더는 안 되겠군.”
칠사왕(七邪王) 항무가 십사왕(十邪王) 혈린(血鱗)에게 말했다.
“광옥(狂玉)은 얼마나?”
혈린이 말없이 구슬을 내려다보았다.
탁한 옥색이었을 것이 분명한 구슬은 어느새 절반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구슬 안에 핏물이 들어찬 것 같았다. 실제로 찰랑거리는 형상을 보여 주는데, 아무리 봐도 단순한 핏물은 아니었다.
진짜 피에 사람의 원령(怨靈)을 섞어 담아낸 것만 같은, 기묘한 사기(邪氣)와 사기(死氣)가 공존하는 섬뜩한 물건이었다.
항무가 씨익 웃었다.
“좋군. 생각보다 훨씬 빨라.”
혈린은 대답 없이 광옥을 응시할 뿐이었다.
기묘한 표정이었다. 그 자신도 극사의 경지에 오른 고수임이 분명한데, 마치 광옥이라는 구슬 자체에 홀린 듯한 모습이었다.
“광옥이 완성되면 싸움을 중지할 것이다. 곧장 알리도록.”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혈린을 뒤로한 채, 항무가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허연 수염을 짧게 가다듬은 초로의 사내가 있었다.
항무가 조심스레 말했다.
“선배. 슬슬 우리도 움직여야겠소.”
초로의 사내, 명활(明猾)의 입이 열렸다.
“이제 간은 다 보았으니 제대로 투입해야겠군.”
“내 생각도 그렇소.”
“또 다른 고수들이 접근하고 있다. 극사의 경지에 오른 자들만 셋이야. 자칫 잘못하면 혈린까지 나서야 할지도 모르겠군.”
항무가 미소를 지었다.
“그럴 리가 있겠소. 선배의 무공이라면 둘은 상대할 수 있을 것이오.”
“싸움에 절대적인 건 없지.”
“또한, 우리는 놈들을 다 죽이는 걸 목표로 한 것이 아니잖소?”
“그래도 후환이 될 놈들이니 다 박살 내는 게 낫지.”
“교주님의 명령이 우선이외다.”
명활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갑시다! 황풍단(荒風團)은 철포를 장전하라! 공격에 들어갈 것이다!”
깃발이 펄럭였다.
일천에 이르는 황풍단이 항무를 따라 적의 측방으로 이동했다.
가만히 그들을 보던 명활 역시 등에 멘 대도(大刀)를 뽑았다.
“독풍단(毒風團), 전진하라.”
“존명!”
그렇게 사음 최고수들이라는 사왕 중 둘, 사사왕(四邪王) 명활과 칠사왕 항무가 병력을 이끌고 출진했다.
* * *
쩌정!
창과 창이 얽히며 매서운 굉음을 냈다.
항천의 눈이 붉어졌다.
‘강하다.’
비록 사왕 중 밑에서 네 번째 서열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무공에 강한 자신이 있었다.
권장(拳掌)이 장기였던 그가 창을 쥐게 된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사음의 절학을 배워 극사에 올라섰지만, 그래도 그는 강한 목마름을 느꼈다.
그때, 천운으로 소현립을 만났다.
소현립을 만나고 그는 깨달았다. 자신의 진짜 재능은 창에 있음을. 극한의 권장술로 거리 싸움에 능했던 자신의 무(武)는 창술의 대가가 되기 위한 발판에 불과했던 것임을.
오 년이었다. 불과 오 년 만에 그는 권장보다 창에 더 익숙해졌으며, 용황창을 대성하고 큰 깨달음과 함께 두 단계 이상 더 강해졌다.
자신보다 강한 사왕은 많다. 하지만 병장기술에 있어서만큼은 세 손가락 안에 꼽힌다고 자신했다.
한데 그런 자신감을 산산조각 내는 상대가 눈앞에 있었다.
파바바바박!
마치 꽃이 피는 것 같았다.
신병이기, 창대까지 강철로 주조한 창이 분명했다. 한데도 중단을 쥔 손을 중심으로 새하얀 창대가 휘어지며 수십 개의 잔상을 만들어 낸다.
단순한 허상이 아니었다. 너무 빨라서 진짜 잔상이 남는 것이다.
그 빠른 창격을 막느라 용황창의 파괴력 넘치는 초식을 구사할 수가 없었다.
쩌어어어엉!
본격적으로 실력을 드러내는 막원, 신병인 백뢰창이 그의 재능에 호응하며 막강한 힘을 선사했다.
휘두르는 창대에 만근의 힘이 실렸다. 피할 수 없어 막았지만, 항천은 막은 자세 그대로 옆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말도 안 되는 힘이다. 완력이 달라.’
항천은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껏 전력을 낸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막원은 전장의 장수로서 이 전투에 나섰다. 장수로서 아군의 안전은 물론, 어떻게 해야 적을 효율적으로 섬멸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였다.
문제는 그것이 그에게 익숙하지 않은 행위라는 것이다.
그는 한 명의 무인일 뿐, 사람들을 거느리며 적과 싸우는 장수형 전사가 아니었다. 언제나 최선을 다했지만, 상황에 따라 집중도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달랐다.
후방에서 막강한 원군들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달은 그였다. 게다가 그 원군 중에는 무극에 이른 초고수가 셋이나 끼어 있다.
장수의 역할은 그들에게 맡겨 두면 된다. 이제 그도 한 명의 당당한 무인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그 마음가짐 하나가 막원의 진짜 실력을 드러내 주었다.
번쩍!
용수창법과 일홍창법(一紅槍法)으로 항천을 밀어붙이던 막원의 백뢰창에 일순 선명한 백광이 어렸다.
순간 항천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위험!’
상체를 튼 채 오른손 하나로만 백뢰창을 쥐었다. 전방으로 뻗은 좌수에선 무형의 기운이 올올이 풀려 나와 항천의 몸을 옭아매고 있었다.
거미줄과 같은 진기의 막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단박에 쏘아 낸 일격으로 끝장을 볼 요량.
우우우우웅!
극한까지 내공을 끌어올린 항천이 먼저 용황창을 뻗었다. 피하기가 애매하니 선공으로 투로의 맥점을 끊어 버릴 요량인 것이다.
쿵!
진각과 함께 막원의 상반신이 엄청난 탄력으로 회전했다.
번쩍!!
한줄기 섬광이 되어 나아간 백뢰창에 무종문의 창술, 낙뢰창(落雷槍)의 힘이 담겼다.
‘……!’
항천의 눈이 부릅떠졌다.
선공으로 찌른 용황창의 용섬(龍閃)의 투로와 발경이 미친 듯이 흔들리고 부서졌다. 낙뢰창 일격의 힘이 용섬보다 더 강한 것이다.
‘이렇게까지 차이가……!’
찰나지간, 항천은 볼 수 있었다.
막원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불꽃처럼 위험하게 넘실거리는 것을.
거세기 짝이 없는 기파였다. 순간적으로 상위 사왕을 상대하는 듯 전신의 뼈마디가 어긋나는 기분이었다.
천무신병기, 천무병장공(天武兵將功)이었다. 약식으로 찰나만 개방한 힘, 한번 펼치면 힘이 소진될 때까지 멈추지 못했던 병장공을 원하는 만큼만 구사하는 그였다.
드높아진 깨달음, 스스로 창안하고도 제대로 연마하지 못한 무공을 완벽하게 다스리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막원이었다.
무(武)를 향한 구도자. 전투와는 어울리지 않는 성정이지만, 온전한 무(武)를 좇은 그의 인생은 그를 전투의 달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항천의 몸이 이십여 장 뒤로 날아갔다.
“커헉!”
그나마 좌우로 길을 열었기에 다행이지, 휩쓸렸다면 족히 기마 열 기는 피떡이 되었을 것이다.
피를 쏟으면서도 기어이 일어나 자세를 잡는 항천을 보며, 막원 역시 숨을 가다듬었다.
‘역시 강하다.’
무종문의 고위 창술은 하나같이 초일류의 무공들이었다.
하지만 상대의 창술은 그런 고급 창술들의 장점만을 취하고 단점은 과감하게 버린, 천하제일을 다툴 만한 무공이었다.
그 투로와 발경 구결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주인을 보호해 준다. 승부를 볼 요량으로 내지른 이번 일격에도 상대가 죽지 않은 이유였다.
‘단순히 무학 때문만은 아니다. 저놈의 내공은 탄탄하기가 금성철벽과도 같아. 저 창술을 연마하지 않았더라도 이번 일격으로 죽진 않았을 거야.’
냉정하기 그지없는 판단이었다.
그렇다고 실망하진 않는다. 죽이지 못한 적의 존재에 안타까워하는 것보단, 그 찰나의 순간마저도 적을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게 낫다.
막원의 선택은 단순했다.
콰아앙!
백강비로 쏘아진 그가 곧장 일홍창법을 펼쳤다.
파바바박!
직선적이고 빠르지만 변초에는 취약한 창법이었다.
하지만 어인 일인지 항천은 그 창을 피하기가 어려웠다.
쩌저저저정!!
피하기도, 반격하기도 어려워 막았는데 막을 때마다 상반신에 엄청난 충격이 가해졌다.
‘더 무거워졌다.’
그냥 피하면 그만일 것 같은데도 피하지 못한 이유는, 상대의 진기가 일대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장악력이 심리적인 위축을 불러일으킨다. 항천은 이를 악물었다.
‘용황창은 사음교 제일의 창술이다. 용황창의 첫 계승자로서 이놈에게는 질 수 없어.’
퍼어엉! 퍼퍼퍼펑!
뻗어 나간 백뢰창 끝에 있는 모든 외물이 파괴된다. 겨누는 곳이 땅이면 땅거죽이 뒤집히고, 기마병이면 기마와 병사의 육신이 통째로 찢겨 날아갔다.
철벽같은 천무신병기는 사진의 사기를 조금도 침투시키지 않았으며, 덕분에 막원은 차가운 이성을 유지한 채 항천을 몰아붙일 수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선배님!”
막원의 눈이 번뜩였다.
저 멀리 뒤쪽, 천효락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러나십시오!”
극도로 몰입하며 항천을 몰아붙이느라 몰랐던 것일까.
어느새 강렬한 사기를 지닌 고수가 철포를 지닌 병력과 함께 측방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항천 뒤, 항천보다 훨씬 위험한 기파를 뿜는 고수가 또 다른 사음의 정예와 함께 진군하고 있었다.
‘드디어.’
사음 병력의 총출동이다.
“카앗!”
피투성이가 된 항천이 거칠게 창을 휘둘렀다.
쩌어어어엉!
항천의 창을 막아 낸 백뢰창이 강하게 진동했다.
후방에서 아군의 기척을 느끼곤 모든 것을 내려놓았던 막원처럼.
막무가내로 밀렸던 항천의 마음 역시 바뀌었다. 비로소 선배들이 출진했다는 것, 그 단순한 사실 하나가 그의 사기를 무섭게 끌어올린 것이다.
“죽인다!”
막원의 눈이 냉정해졌다.
‘밀리면서도 치명상은 하나도 입지 않았다. 더 강하게 몰아친대도 저 고수가 올 때까지는 죽이기 힘들어.’
천효락이 왜 불렀는지 알겠다. 막원은 미련을 버렸다.
파아아앙!
그대로 후방으로 물러나는 막원을 향해 항천이 악을 질렀다.
“이놈! 어딜 도망치느냐!”
그때였다.
위잉.
시끄럽기 그지없는 전장인데도 그 작은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항천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본능이었다.
그 순간, 사사왕 명활이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피해라, 이 멍청아!”
항천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무언가가 그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퍼어어엉!
호선을 그리며 날아온 작은 비수 하나가 기마의 몸체에 부딪혀 폭발했다.
한데 그 폭발의 힘이 실로 엄청났다. 수십 개로 흩어진 비수 조각이 순식간에 주변으로 퍼져 기마병 십여 기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는데, 본능적으로 창을 휘둘러 막지 않았다면 항천의 팔 하나도 걸레가 되었을 것이다.
무시무시한 광경에 입을 떡 벌리던 항천이 고개를 틀었다.
화아아아악!!
어두운 하늘, 귀신이 날아오는 것 같았다.
등 뒤에 불그스름한 기운을 흩뿌리며 날아온 한 중년 사내, 어느새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엔 방금 날렸던 싸구려 비수들이 삐죽 솟아 있었다.
‘초고수!’
당황한 항천 뒤로 명활이 벼락처럼 날아왔다.
당관의 좌수가 부드럽게 휘둘러졌다.
피피피핑!
네 자루 비수가 호선을 그리며 항천을 향해 날아갔다. 당가 비전, 추혼비접(追魂飛蝶)의 암기술이었다.
“막지 마라! 비켜!”
퍼어엉!
장력으로 항천을 날려 버린 명활이 대도를 휘둘렀다.
퍼퍼퍼펑!!
폭발과 함께 가루가 된 비수들.
당관의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어렸다.
“제법이군.”
“애송이가 감히!”
파파팡!
두 고수가 서로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