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280)
흑백무제 1282화(1281/1320)
1282화. 전설이 되다 (7)
우회하여 섬서 무림 병력을 치려던 칠사왕 항무의 눈이 흔들렸다.
훅!
어느새 사라진 범음(梵音), 범음을 대체하는 강렬한 파공성이 항무의 귀를 울렸다.
“어딜 가.”
조금은 지친 음성이지만, 깊게 가라앉은 두 눈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맑았다.
새하얀 장창을 들고 곧장 전투태세로 들어간 막원이 거기에 있었다. 목소리에는 피로가 느껴졌지만,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파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항무의 눈이 깊어졌다.
“백병신군인가.”
“너희는 나에 대해 잘 아는군.”
“창왕, 그 망나니 같은 늙은이가 그리도 극찬을 하더니 과연 보통 기세가 아니로다.”
막원의 눈에 살기가 일었다.
조금 전까지 붙었던 항천 역시 소현립의 창술과 비슷한 무공을 익혔다.
‘사음과 한패가 아니라고 하더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작 이놈들은 소현립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며, 심지어 창술까지 전수한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사음교와 결탁했다고 봐야 했다.
‘비록 문파를 나왔지만, 무종의 이름을 더럽힌 네놈을 어찌 살려 둘 수 있겠느냐. 너는 반드시 내 손으로 처단해 주마.’
그 전에, 이놈들부터 막아야 했다.
파아앙!
백강비를 펼치며 접근한 막원이 일홍창법을 펼쳤다.
직선적이고 빠르다. 빠르니 강력하다. 창술의 기본기를 극한까지 다듬은 일홍창이 항무의 가슴으로 빨려들듯 나아갔다.
항무의 주먹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카아앙!!
막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강하다.’
창이 땅에 꽂혔다. 창대 전체가 진동하고 있었다.
이 한 수만으로도 알겠다. 눈앞의 이자는 항천보다 강자다.
“하긴, 병력의 머릿수를 줄이는 것보다 너 같은 놈 하나를 없애는 게 더 낫겠지.”
“할 수 있으면 해 봐라.”
“건방진!”
파파팡!
두 고수가 서로를 향해 살초를 날렸다.
막원과 항무가 생사결을 벌이던 그때, 사진의 사기를 몽땅 증발시킨 공공대사는 무섭게 달려오는 항천과 마주해야 했다.
‘강자로다.’
날이 긴 창을 쥔 채 달려오는데, 상당한 내상을 입은 듯한데도 움직임에 흔들림이 없었다.
공공대사의 눈이 가라앉았다.
하은교의 도움을 받았대도 쏟아 낸 내공량이 너무 많았다. 다만 상대 역시 내상과는 별개로 상당한 내공 소모가 있었던 듯했다.
“음제께서는 적들을 막아 주십시오.”
“맹주!”
“믿습니다.”
섬서 병력이 모두 전투 불능 상태가 된 이상, 이 많은 기마병과 적병들을 상대할 만한 사람은 하은교밖에 없다.
물론 하은교 혼자에게만 그 짐을 지게 할 수는 없었다.
공공대사가 소리쳤다.
“사기가 증발하였다! 무림맹 병력은 적들을 맞아 용맹하게 싸우라!”
우우우우웅!!
넘치는 공력으로 퍼져 나가는 권왕의 음성에 후방에서 대기 중이던 무림맹 병력의 사기가 무겁게 치솟았다.
“우와아아아!”
“적을 무찔러라!”
순식간에 전권으로 들어온 무림맹 병력은 섬서 병력 사이사이로 물처럼 스며들었다.
파아아앙!
하은교가 기마병들을 향해 날아가고, 공공대사는 항천을 향해 대력금강장 일격을 날렸다.
콰아앙!
항천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이런!’
장력을 막은 창이 부러질 듯 휘어졌다.
말도 안 될 정도로 묵직한 장력이었다. 보병(寶兵)이 아니었다면, 내공을 조금만 덜 실었다면 그대로 창대가 부러졌을 것이다.
“소림!”
“빈승은 공공이라 하오.”
훅!
그렇게 많은 내공을 소모했는데도 항천에게 따라붙는 속도가 벼락을 방불케 했다. 소림 비전, 금강부동신법이 발휘된 것이다.
“그대들을 무찌르겠소이다.”
담담한 목소리 안에 강력한 분노가 깃들어 있다.
부처를 내려놓고 명왕의 정체성을 끄집어낸 그였다. 단숨에 접근한 그가 좌우 쌍권의 아라한신권을 구사했다.
파파파파팡!!
소림의 거센 권법과 사음교 제일의 창술 용황창이 부딪쳤다.
사사왕 명활은 당관과 생사결을 벌였고, 하은교는 무림맹 병력과 함께 흐트러진 기마병들과 사음의 병력들을 상대했다.
다시금 재개된 싸움, 그러나 아직도 사음교의 주요 병력은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상해.’
탄금수와 피리로 기마병들을 쓰러트리면서도 하은교는 저 멀리 사음의 깃발이 나부끼는 곳을 바라보았다.
‘왜 전력을 퍼붓지 않지? 무엇을 위해서?’
이 정도 싸움이라면 총공세를 퍼부을 만도 한데, 사음의 병력은 끝까지 사태를 주시하는 것 같았다.
하은교의 눈이 깊어졌다.
‘한 명이 더 있다.’
심상치 않은 사기다. 굳이 스스로의 기도를 갈무리하지도 않는, 공공대사와 막원 그리고 당관과 싸우는 고수들과 동급인 고수가 후미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왜 싸우지 않는 거지?’
전략 전술에 문외한이라지만, 그것이 하은교가 멍청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오랜 강호 경험과 몇 차례 싸움으로 그녀의 안목 역시 크게 증대된 상황. 적어도 직감에 있어서만큼은 남들 못지않았다.
‘이 상태에서 그대로 밀고 들어오면 난전이 벌어진다. 난전 중에 중앙을 돌파하기만 하면 무림맹 측을 큰 혼란에 빠트릴 수 있어. 당연히 우리가 그걸 두고 보진 않겠지만, 놈들 입장에선 어떻게든 노려 볼 만한 선택지일 터인데.’
그때였다.
번쩍!
한 줄기 시뻘건 광채가 하늘 위로 솟구치는 것이 하은교의 눈에 보였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공공대사는 사기에 민감한 항마신공으로, 당관은 극단적으로 발달한 상단전 덕분에 심상치 않은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콰아앙!
폭풍 같은 도격으로 당관을 날려 버린 명활이 외쳤다.
“혈옥이 완성되었다!”
그의 음성은 널리 널리 퍼져 항천과 항무의 귀에도 선명하게 들렸다.
“드디어!”
항천이 씨익 웃었다. 피투성이가 되었음에도 얼굴에 득의양양한 빛이 가득했다.
“광옥이 혈옥으로 화했구나!”
쩌저저정! 콰앙!
막원을 튕겨 낸 항무가 외쳤다.
“후퇴한다!”
“어딜!”
튕겨 나간 막원은 곧장 항무를 향해 짓쳐 들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몰라도 전장의 상황을 예민하게 읽고 있는 그였다.
화아아악!
천무병장공을 해방하니 일순간 내력의 밀도가 두 배로 올라갔다.
항무의 얼굴이 굳어졌다.
콰아앙!
백뢰창의 위력은 산봉우리를 뒤흔들 정도로 막강했다.
창격이 날아오기도 전에 피한 항무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비탈길을 타고 오른 창력으로 인해 십여 장 길이의 땅이 갈려 나가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용이 땅을 파고 움직인 듯한 흔적이 생겨났다. 이 정도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 냈다간 자신도 무사하지 못할 것 같았다.
“역시 강하구나! 하지만 늦었다!”
파파파파팡!
단숨에 황풍단원들의 어깨를 밟으며 후미로 날아가는 그였다.
막원은 곧장 그를 쫓아가려 했지만, 어느새 황풍단 일부가 그를 향해 금사철포를 쏘았다.
콰콰쾅!
화탄이 터지며 시뻘건 불꽃과 유탄 조각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백뢰창이 그리는 원은 완벽한 방어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범위가 너무 넓었고, 유탄 조각은 지나치게 많았다. 창격의 방어 바깥으로 쏘아진 유탄 조각들이 그대로 막원의 몸을 휩쓸었다.
따다다당!
황풍단원들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몸이 걸레짝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다. 어떤 고수라도 맨몸으로 유탄을 감당할 순 없다.
한데 막원의 몸에 맞은 유탄 조각이 모조리 튕겨 나가는 게 보였다. 드러난 막원의 몸은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천무신병기, 천무강체공(天武鋼體功)이었다.
소림의 금강불괴신공에도 뒤지지 않는 강철의 경기공이었다. 내공 소모는 극심하지만, 그 어떤 공격도 허용하지 않는 무적의 방패였다.
막원의 상반신이 탄력적으로 돌아갔다.
콰아아앙!
용수창법에 의해 황풍단 십여 명이 그 자리에서 피떡이 되었다.
하지만 이미 항무는 수십 장 밖으로 물러난 뒤였다. 지금 쫓기에는 거리가 너무 벌어져 버린 것이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퍼퍼퍼펑!!
놀랍게도 황풍단은 코앞에서 독탄을 터트렸다.
황풍독탄이 터지며 사방으로 지독한 독연을 피워 올렸다. 제아무리 천무신병기가 외기의 침습을 허용하지 않는다지만, 수십 발의 독탄이 터진 곳에서 멀쩡하긴 힘들 것이다.
훅!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난 막원. 그 틈을 타 황풍단도 항무와 함께 후퇴했다.
황풍단만이 아니었다.
기마병들도, 그들의 뒤에 도착한 독풍단도 일제히 후퇴했다.
공공대사가 외쳤다.
“적들을 쫓아라!”
“와아아아!!”
전쟁에서 양 병력의 수가 가장 많이 줄어들 때가 후퇴하는 적을 잡아 죽일 때다.
사음교 병력은 전격적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힘의 열세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실제로 독풍단은 기마병들과 함께 후퇴하며 무림맹 병력을 향해 온갖 독장을 쏘아 내고 있었다.
당상아 앞에서나 잡술 취급을 받았지, 그들의 독공 역시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게다가 이런 난전에서 독공은 낮은 수준으로도 큰 효과를 발휘한다.
그 많은 독풍단원이 각종 독공을 쏟아 내며 후퇴하니, 무림맹 병력으로서도 쉽사리 그들을 뒤쫓을 수가 없었다. 섣불리 쫓아가다간 개죽음을 당할 것이 뻔했다.
문제는 기마병들이었다.
“크으으윽!”
“아아악!”
남은 기마병들이 중독되어 하나같이 끔찍한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그것은 기마도 마찬가지였다. 중독된 기마들은 주인의 명령을 따르지도 않았다. 마구 날뛰다가 주인을 밟기도 하고, 무림맹 병력을 향해 마구잡이로 발길질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기마들 역시 비틀거리다가 거품을 물고 쓰러져 버렸다.
쓰러진 기마들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저 미친놈들이!”
그 하은교의 입에서 쌍소리가 튀어나왔다.
아무리 적이라지만, 저놈들 입장에서는 아군이 아닌가? 한데 아군인 기마병들에게도 독탄을 터트리며 추격을 막고 있었다.
전쟁에 도리 따위는 없다지만, 어찌 이럴 수 있는지 모르겠다. 하은교가 분노한 얼굴로 피리를 불었다.
삐이이이이이!!
음화제무신공, 그 음선(音仙)의 공부로 집약된 피리 소리가 후퇴하는 독풍단원들을 휩쓸었다.
독풍단원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쓰러진 그들의 눈, 코, 입, 귀에서 진득한 핏물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이미 독은 퍼질 대로 퍼졌다. 계속 적들을 추격하기보단 살아남은 아군들을 수습하는 게 나았다.
“음제께서는 더 이상 적들을 쫓지 마십시오!”
“하지만!”
“늦었습니다!”
그렇다.
이미 항무와 항천, 그리고 당관을 튕겨 낸 명활까지도 한데 뭉쳐 후퇴하고 있었다.
쫓아가 싸운다면야 싸울 수 있겠지만, 섬서 병력 모두가 전투 불능이 되었다. 교전을 이어 가기보다는 아군을 추스르는 것이 옳았다.
그때였다.
스스스.
사왕단 후방, 길게 늘어진 숲에서 수많은 병력이 후퇴하는 사음교 병력을 따라 전진했다.
당관의 눈이 번뜩였다.
“그만! 쫓지 마라!”
그들은 바로 사천에서 모은 병력이었다. 그들 중 일부가 사음교 병력을 따라 측면에서 돌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는 함께 섬서로 온 강량과 진양이 있었다.
“멈춰! 개죽음당한다!”
그때, 강량이 뒤따르는 병력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그들과 함께 움직이던 사천의 병력이 점차 속도를 줄였다. 하지만 강량과 진양은 달랐다.
그들은 오히려 속도를 올려 사음의 병력을 쫓았다.
‘저 바보들이?!’
멈추지 않으면 무력으로라도 막아야 한다.
당관이 추뢰신법을 펼치려던 그때였다.
‘……?!’
그 먼 거리를 격하고 마주친 눈.
강량의 눈동자는 모종의 결심으로 굳어져 있었다. 무언가 명확한 목적이 있는 듯했다.
최소한 죽음을 각오한 눈은 아니었기에, 당관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렇게 섬서 전투는 기묘한 순간, 기묘한 형태로 마무리가 되었다.
강량과 진양, 두 고수만이 사음교의 병력을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