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286)
흑백무제 1288화(1287/1320)
1288화. 전설이 되다 (13)
부글부글.
초고열의 화염에 녹아 버린 땅이 마구 끓었다.
천하 어떤 고수도, 설령 금강불괴를 이룬 고수라도 그곳에 발을 디뎠다간 무사하지 못할 것 같은 광경이었다.
그런 곳이 수십 곳이나 된다. 넓게 펼쳐진 개활지, 군데군데 뚫린 구멍에서 광물이 끓어오르며 비명을 질러 댔다.
그리고 그 사이, 두 화신(火神)이 상상 초월의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콰아앙!!
시퍼런 화염이 가득 담긴 주먹이 기우환의 가슴을 후려쳤다.
또다시 십여 장을 날아간 기우환, 안 그래도 하얀 그의 얼굴이 더더욱 창백해졌다.
하지만 기천웅의 얼굴은 그 이상으로 창백했다. 무섭게 소모되는 상단전의 신기로 인해 오감까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다시.’
훅!
전신을 뒤덮던 푸른 불길이 순식간에 금빛으로 물들었다.
청린신화공에서 금제순화공으로.
화르륵!
금빛 화염이 꿈틀거리더니, 어느새 불그스름한 잔불로 바뀌었다.
금제순화공에서 염인공(炎印功)으로.
염인공은 무공을 익히는 신화교도들이 최초로 접하는 기본공으로, 염인공을 대성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진입할 수가 없었다.
물론 교주나 선택받은 자들은 굳이 염인공을 연마할 필요가 없었다. 염인공은 신화교 열양공의 근본이지만 동시에 기본공인지라, 재능이 있는 자들은 괜스레 염인공으로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염인공을 삼 년 안에 대성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신화의 절정 무사가 될 수 있는지가 파악된다.
그런 기본공을 기천웅이 익히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무어냐!”
쾅!
진각과 함께 청린신화공의 기세를 더더욱 거세게 피워 올리는 기우환.
입은 내상은 무서운 속도로 치료되었고, 덕분에 그의 기세는 처음과 비슷할 정도로 올라왔다.
하지만 기천웅은 달랐다.
화정으로 몸을 회복하지 않는 그의 기세는 조금이지만 확실하게 줄어들어 있었다. 그러고도 아직 기우환에 비해 모자람이 없긴 했으나, 탄탄했던 내공력에 미세한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망가졌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까지 무너졌을 줄은 몰랐다! 그래도 교주였다는 작자가 천한 염인공을 익혀?!”
훅!
청린의 신법, 청린유공(靑燐游空)이 펼쳐졌다.
파공성이 울릴 정도로 빠르진 않다. 그런데도 빠르다.
마치 어두운 숲, 귀화(鬼火)가 떠돌아다니는 것처럼 기괴하고 신비로운 신법이었다. 상대하는 이로선 어느 방위에서 나타날지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후방.’
그런 신법을 대하고도 기천웅의 반응은 쾌속했다.
맨발로 바닥을 찍고 상체를 강하게 틀어 후방으로 염권팔세(炎拳八勢)를 펼쳤다.
퍼어엉!
기우환의 눈이 흔들렸다.
뒤를 노렸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다. 그것만으로도 놀랄 일이거늘, 내치는 무공은 염인공과 마찬가지로 신화교의 기본 권법인 염권팔세다.
염권팔세를 근본으로 각종 무리와 기공술을 담아 완성시킨 것이 염왕팔권이었다. 염왕팔권은 신화교를 대표하는 권법으로, 대성하면 권왕(拳王)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빼어난 절학이었다.
염왕팔권도 아니고 염권팔세라니, 자신을 우습게 보는 것이 분명했다.
“같잖구나!”
콰아앙!
청린소혼장(靑燐燒魂掌)에 기천웅이 십여 장이나 뒤로 날아갔다.
팔을 교차해 막았지만, 어느새 그의 양팔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미 상의는 전부 재가 되어 날아간 후였다.
“감히 그따위 무공으로 나를 상대하겠다는 것인가!”
훅!
또다시 청린유공이다.
기천웅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쾅!
기우환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좌측에서 나타난 자신을 향해 내친 무공은 화심장(火深掌)이었다. 이 역시 염권팔세처럼 기본공이었으며, 열화신장의 토대가 된 무공이었다.
‘어떻게?’
이 정도가 되니 기우환으로서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청린유공으로 움직이는 자신보다 반박자 빠르게 방위를 선점하는 것도 기가 막힌 일이다. 한데 신화교의 기본공으로도 몸 전체가 들썩일 만한 경력을 터트린다.
청린신화공만 한 공격력은 아니지만, 일타 일타가 묵직했다. 청린의 화기로 기천웅의 화기를 흡수하지 않았다면 벌써 몇 차례나 내상을 입었을 것이다.
‘감히!’
쿵!
강한 진각으로 대지가 쩍 갈라졌다.
지기를 모조리 끌어 올려 일권을 내치니, 시퍼런 화기가 소용돌이치며 기천웅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갔다.
그때, 기천웅의 몸이 사선으로 틀어졌다.
‘……?!’
기우환의 표정이 돌변했다.
직선으로 날아가는 주먹, 그 주먹에 휘감긴 청린신화기.
그 푸른 화기가 스치듯 피한 기천웅의 얼굴과 목, 어깨 부위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번쩍!
기천웅의 몸에서 강력한 기파가 터져 나왔다.
한껏 힘을 모은 그가 기우환의 품으로 파고들어 몸통 그대로 후려쳤다.
콰아앙!
일찍이 겪어 본 적 없는 충격이었다.
허공을 훨훨 날아가는 기우환, 그는 이번 일격으로 흉골 대부분이 으스러졌음을 깨달았다.
끔찍한 고통과 함께 숨이 턱 막혀 왔다. 전신을 융통무애하게 흐르던 화기가 중간중간 끊어지며 신체의 자유까지 박탈했다.
‘화정!’
우우우우웅!
찰나지간 발동한 화정이 전신을 휘감으며 진기를 인도하고 부러진 뼈를 붙였다.
파바박!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으스러진 뼈가 거의 다 붙었다. 청린신화공으로 자극받은 화정이 극성으로 힘을 발산한 것이다.
순간 기우환은 시야가 흐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활력이 넘치는데도 시야가 어지러웠다. 화정의 화기가 옥침혈을 넘어 두뇌까지 침투했다가 내려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이미 기천웅은 그의 코앞까지 다가와 염권팔세를 펼치고 있었다.
“하아아압!!”
기합과 함께 청린용백권(靑燐鎔魄拳)을 펼쳤다.
쾅! 콰콰쾅! 퍼어어엉!
염권팔세의 일화(一火), 측소(側燒), 납중자(納重刺), 경장진중(輕掌進中)의 사초식이 청린용백권의 폭산출화(爆山出火)의 권력을 두들기고 부수며 폭발했다.
기우환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청린소혼장과 청린용백권은 청린신화공의 화기를 극한까지 구사하는 최고급 권장술이었다.
제아무리 그 무공의 창안자라 해도 극성으로 개방된 화정의 힘까지 받은 청린의 무공을 고작 염권팔세로 막을 수는 없다. 그것은 무리(武理)와는 상관없는 힘의 문제였다.
단 일초식이라고 해도 바위조차 끓게 만들 힘을 소멸시켰다. 믿을 수 없는 대처 능력이었다.
“이!”
곧장 후속타를 전개하려던 기우환.
기천웅의 자세가 낮아졌다.
파팡!
자연스레 벌어진 두 다리 안쪽을 쾌속한 각법으로 후려쳤다.
순간 기우환의 주먹에 모인 청린신화기가 제멋대로 튀며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들었다.
‘뭐야.’
곧장 내리꽂혀 머리통을 날려 버렸어야 할 힘이다. 한데 두 다리를 얻어맞은 걸로 주먹에 모인 화기가 완전히 흩어질 뻔했다.
‘도대체 왜?!’
의문을 가진 채로 주먹을 휘둘렀다. 의문은 의문이고 공격은 공격이었다.
그때였다.
훅!
기천웅의 몸에서 푸른 화염이 넘실거렸다가 다시 붉게 변했다.
그 짧은 순간, 내리꽂힌 청린용백권의 화기가 또다시 기천웅의 얼굴과 목덜미로 흡수되었다. 고개를 틀어 반 치 차이로 피했기에 화기가 스며드는 부위도 목 위일 수밖에 없었다.
기우환은 그게 의문이었다.
화정이 다 망가진 인간이 어떻게 청린신화기를 빨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제아무리 같은 무공을 익혔대도 화정이 멀쩡한 자와 망가진 자의 차이는 큰 법이었다.
퍼어어억!
하단에서 올려 찬 각법이 기우환의 목덜미를 후려쳤다.
순간 기우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채찍처럼 후려친 각법의 위력이 실로 거셌다. 본능적으로 청린신화기를 끌어 올려 경부를 보호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목이 부러졌을 만큼 위력적인 각법이었다.
그는 다시 한번 청린용백권을 펼쳤다.
콰아앙!
대지를 뚫은 주먹 주위로, 녹아내린 땅이 부글부글 끓었다.
어느새 기천웅은 기우환의 삼 장 밖으로 물러나 있었다. 귀신처럼 빠른 속도였다.
“너……!”
기우환의 눈에 핏발이 섰다.
“무슨 사술을 부리고 있는 것이냐!”
기천웅은 아무 대답 없이 깊은 눈으로 기우환을 바라보았다.
아들은 모를 것이다. 지금 제 모습이 어떤지를.
붉게 충혈된 눈, 선명한 화기가 눈가 주위에서 넘실거리고 있다. 화기가 상단전을 마구 망가트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또한, 아들은 모를 것이다. 왜 본인이 자꾸 당할 수밖에 없는지를.
기천웅은 어릴 적부터 신화교의 장로들과 피 터지는 싸움을 매일 감행했다. 교주위에 오르고서도 찰극평을 위시한 몇몇 전대 화왕들과 내공 없이 생사결에 가까운 싸움을 벌였다.
교도들은 그것이 교주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만류했지만, 기천웅의 생각은 달랐다.
교주든 교도든 익힌 무공의 근본은 같다. 또한 최초의 무(武)란 기(氣)를 쓰지 않는 박투술과 병기술에 기초했으며, 나아가 짐승들의 움직임을 따라 하며 나름의 특성과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진정 무(武)를 이해하기 위해선 몸을 움직일 줄 알아야 하고, 진정 무의 끝을 보기 위해서는 기(氣)를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기천웅은 신화교의 모든 무공의 끝을 본 자다. 그 끝을 보기 위해서 가장 존귀한 신분으로 진흙탕을 구르며 스스로의 무공을 발전시켰다.
제대로 된 실전을 겪은 지 오래되었지만, 그나마 중원에 들어와 여러 고수와 싸웠다. 잊었던 경험을 체득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 경험, 그 노력.
하루하루를 충실히 닦아 온 무(武)가 있었기에 지금의 그가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청린신화공을 만들지도 못했을 것이며, 설령 만들었다 한들 진즉 폭사해 죽었을 것이다.
기우환이 청린유공을 한계 없이 구사한다 한들, 상대의 습관과 무공의 특성을 다 꿰고 있는 기천웅으로선 미리 대응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기우환은 달랐다. 그는 더 뛰어난 무공, 더 위대한 절기를 익히는 데에만 급급했으며, 교도들을 교주를 위해 죽고 사는 물건 취급이나 하는 인간이었다.
무공이든 치세든 근본이 중요한 법. 무공의 근본이 동작이라면 치세의 근본은 백성이다.
기우환은 그러한 근본의 중요성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나아지고 있다.’
광혈의 소교주 일행과 싸울 때는 상단전을 완전히 개방하여 청린신화공을 극한까지 구사했다.
그때의 경험 역시 큰 공부였다. 상단전의 신기가 소모되는 무공이지만, 반대로 찰나지간만 개방하면 중요한 순간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다.
이전에도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지만, 이전에는 불가능했다.
그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뀐 것은 바로 탁무자에게 전수한 원무치상법 덕분이었다.
‘순간의 개방이라면 상단전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
원무치상법은 상단전의 신기를 다스리고 단전 자체를 철벽처럼 단단하게 만드는 영혼의 공부다.
이미 오랫동안 원무치상법을 익혀 단단해진 그의 상단전은, 청린신화공의 순간 개방만으로 흔들리지 않는다. 자주 쓴다면 또 모르겠지만, 부족하기 그지없는 아들놈을 상대로는 이대로도 충분한 것이다.
“점점 익숙해지는구나.”
염인공, 염권팔세, 화심장.
기본공이라고는 하나, 담고 있는 물이 천하에서 가장 맑고 깊은 물이다. 기우환의 절대적인 화력에 대응할 수 있는 진짜 이유도 결국 그의 깊은 내공 덕분인 것이다.
“슬슬 끝내도록 하자.”
“물론 끝내야지!”
화르르륵!
기우환의 두 눈이 귀신처럼 쭉 찢어졌다.
충혈되었던 두 눈이 파랗게 물들었다. 눈에서 불이 쏟아지고, 호흡에도 시퍼런 불길이 섞여 나오고 있었다.
순간 기천웅의 눈이 흔들렸다.
“너……?!”
“한 줌 재로 만들어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