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288)
흑백무제 1290화(1289/1320)
1290화. 전설이 되다 (15)
무자비한 도끼질로 구조를 죽인 연호정이 버럭 외쳤다.
“호종대는 뒤로 물러나라!”
“존명!”
성주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한중명을 위시한 호종대 일백 호위들이 일사불란하게 후방으로 물러났다.
화아아악! 퍼펑!
신화령들의 공세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 짧은 시간, 연호정의 권장에 목숨을 잃은 이들만 오십이 넘었다. 지금까지 그의 손에 죽은 사망자는 일백을 훌쩍 넘었다.
신화령 창설 이후, 한 개인에게 이 정도의 피해를 입은 적은 없었다.
그 사실이 신화령들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
콰콰콰쾅!!
염신검의 경력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무차별 폭격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염신검의 경력이 폭발하는 곳 구석구석에서 심상치 않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검진(劍陣)인가.’
구조와의 싸움으로 전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은 신화령 역시 마찬가지다. 아군의 장수가 싸우는데, 그 장수까지 죽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결국 구조는 주제를 모르고 싸우다 죽었고, 그의 죽음은 신화령의 잠력을 끌어내는 촉발제가 되었다.
“염(炎)!”
콰르르릉!
다시 대열을 맞추고 전진하는 신화령.
구조와 싸우며 틈을 보고 파고들었던 종전과 달리, 지금의 그들은 연호정의 눈에도 빈틈 하나 보이지 않았다.
‘과연 신화교 최강.’
그럴 때가 아닌데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진형은 물 샐 틈 없이 탄탄하고, 서로 간의 내공을 공유하기에 기의 흐름 역시 철벽과도 같다.
쏟아 내는 검경에 막강한 화력이 실려 있으니 어지간한 고수들도 접근 자체를 할 수가 없었다. 연호정 역시 황룡신왕공을 익혔기에 화상을 무시하고 싸우는 것이지, 성천의 어떤 고수라도 이 정도 근접전을 펼치긴 힘들 것이다.
“성주님!”
뒤에서 한중명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다! 조금만 버티면 돼!”
연호정이 백룡부를 휘둘렀다.
퍼퍼퍼퍼펑!
쏟아져 나오는 검경을 깨부수는 무적의 절기, 광룡공 폭우광룡(暴雨狂龍)의 초식이 불의 비를 박살 내고 신화령 둘을 죽였다.
고작 둘이다. 폭우광룡의 힘을 생각하면 지나치다 싶을 만큼 적은 사상자가 난 것이다.
‘완전히 하나가 됐군.’
이길 수 있다. 어떻게든.
하지만 전장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지금, 연호정은 쉽사리 모험을 감행할 수가 없었다. 힘으로 뚫고 들어가는 것은 가능하지만, 어느 정도의 피해를 입을지도 짐작이 되질 않았다.
그때였다.
훅!
저 머나먼 곳에서 무섭게 솟구치던 화기가 일순 쑥 꺼졌다.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승부가 났나?!’
기천웅과 기우환의 화기가 너무 닮아서 누가 이겼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둘이서 동패구상을 했는지도 모른다.
‘빌어먹을, 일단 전장 하나는 끝났고.’
후우우웅! 탁!
허공섭물로 멀리 떨어진 광룡부를 끌어온 연호정의 얼굴에 결심의 빛이 어렸다.
‘어쩔 수 없지. 어느 정도의 피해는 감수를…….’
그 순간, 연호정은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감각을 느꼈다.
‘화기?!’
화아아아악!
저 멀리 후방에서부터 무서운 화기가 휘몰아쳤다.
놀랍게도 그 화기의 물결 속에는 강력한 기파를 발산하는 초고수의 존재도 있었다. 분노와 초조함으로 치솟는 기도가 남궁승 이상이었다.
그제야 연호정의 얼굴에 여유가 깃들었다.
“참 빨리도 온다.”
후방에서 이곳으로 진격하는 일천의 병력.
그 선두에서 누군가가 분노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전원 목숨을 걸어라! 상대는 신화령이다!”
“우와아아!!”
기천웅과 함께 중원으로 들어온 신화교의 일천 병력이 찰극평을 따라 마침내 전장에 도달한 것이다.
* * *
스르륵.
쓰러지는 아들을 양손으로 받아 든 기천웅의 얼굴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치이이이익!
기우환의 몸에서 허연 연기가 일었다.
지독한 열기였다. 하지만 그 열기는 내공으로써 뿜어지는 화기가 아니었다.
몸 전체가 불덩이가 된 것 같았다. 창백했던 피부 곳곳이 붉게 달아올랐고, 뜨거운 호흡에선 불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
기천웅 역시 관수로 복부가 뚫렸다. 내공이 알아서 복벽을 조이고 있지만 중상 중의 중상임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그럼에도, 천천히 아들을 땅에 내려놓는 기천웅의 얼굴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고통으로 얼룩져 있었다.
“우환아.”
코와 입으로 피를 흘린 기우환이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한 눈은 지독하게 탁했다. 광기로 얼룩진 그때의 눈이 아니었다.
“……아버지.”
“그래, 나다.”
기우환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 눈빛만큼이나 흐릿한 미소였다.
“역시…… 아버지는 강하군요.”
“…….”
“이기는 자가 정의라던데, 결국 나는 정의가 아니었던 겁니까.”
기천웅은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았다.
꼭 이기는 자만이 정의인 건 아니라고, 그런 식이면 세상에는 도적들밖에 없었을 거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었다.
“쿨럭! 커헉!”
또다시 피를 토하는 기우환. 그의 주위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기천웅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화정이…….’
화정이 깨졌다.
화정은 신화교 무공의 핵심이다. 익히면 익힐수록 밀도를 높여 가며 종국에는 생명의 원천, 원정과 하나가 된다.
즉, 화정이 깨졌다는 건 원정이 깨졌다는 것. 깨진 원정을 돌이킬 방법은 없다.
죽음이 찾아온 것이다.
본래라면 즉사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터, 기우환이 이룬 경지가 높아 아직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간은 소중하다.
서로를 원망하고 증오했지만, 결국 죽음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 이렇게 마주하여 대화할 시간이 조금이라도 있다는 것만으로도 축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비록 욕과 비난이라 할지라도.
“저는 아버지를 증오합니다.”
“…….”
“싫습니다, 아버지가.”
“그래, 안다.”
“왜인 줄은 아십니까?”
기천웅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기우환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뜻밖의 대답이었다.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보면 동경하거나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
“저에게 아버지는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이해하지 못할 아버지를 동경하기보단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
“껄끄러웠습니다, 아버지가.”
“그랬느냐.”
“예. 두렵고 껄끄러웠습니다. 그래서 미워했습니다.”
“…….”
“신화교의 차기 교주가 되어서 누군가를 두려워해선 안 되지 않습니까.”
기천웅은 탄식을 토했다.
자식이 부모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한다.
세대가 다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기천웅의 책임이 막중했다.
그 역시 선대의 가르침을 받고 신화교를 반석 위에 올리고 싶었다. 그에게는 오직 신화교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다른 두 교와는 공존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더 일에 매달렸고 수련에 집중했다. 오직 신화교, 신화교를 위해서.
하지만 정작 조직에 신경 쓰느라 자식들과 살가운 대화 한마디 나눈 적이 없었다.
자식에게 자신은 언제나 바쁘고, 언제나 냉엄하고, 또 언제나 무서운 존재였을 것이다.
그렇게 신경 쓰지 못했던 자식 중 하나는 세상을 나돌게 되었고, 다른 자식은 한과 분노에 미쳐 아비를 축출하는 괴물이 되어 버렸다.
다 자신의 잘못인 것이다.
“하긴, 이런 말이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결국 제가 진 것을.”
“…….”
“아버지.”
“말해라.”
“고통스럽게 사십시오.”
기천웅의 눈이 흔들렸다.
“고통스럽고 또 고통스럽게 사셔야 합니다.”
“…….”
“왜요? 그건 싫습니까?”
솔직하게 말하는 아들을 두고, 기천웅 역시 솔직하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건 싫구나.”
“역시 그렇군요. 하긴, 세상에 어느 누가 고통스러운 삶을 바라겠습니까.”
기우환의 두 눈이 점점 맑아졌다.
회광반조의 현상이었다. 기천웅의 두 눈에 눈물이 어렸다.
“하지만 저는 깨달았습니다. 삶은 그 자체로 고통이라는 걸.”
“…….”
“사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밥을 먹고 수련하고 자는 것조차도 다 고통입니다. 저는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는 말일 것이다. 아들이 어떤 심정으로 세월을 보냈는지 알 것 같아서 기천웅은 눈물을 흘렸다.
또한 아들은 말하고 있었다.
사는 게 고통이라도 살라고. 결국 마지막에 와서야 아들은 자신에게 오래오래 살아가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후회는 없습니다. 신화교의 차기 교주로 태어나 제 마음껏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습니다. 그 끝이 죽음이라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사람은 죽습니다.”
기천웅은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엄한 얼굴로 말했다.
“너 때문에 죽지 않아야 할 사람도 많이 죽었다.”
“압니다.”
“그래도 후회가 없느냐?”
“그렇습니다.”
“그래…….”
닦은 눈가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
“그럼 그 죄, 다 내가 이고 가겠다.”
“…….”
“나 때문에 네가 이렇게 컸다. 나 때문에 신화교가 이 지경이 되었어. 모든 죄는 나의 것이다. 너는…….”
“틀렸습니다.”
기우환의 얼굴이 굳어졌다.
“사문향이 저를 이용해 먹으려 한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사문향을 이용하려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
“비록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는 하나, 저는 저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만약 제가 저지른 짓들이 진정 죄라면, 그 죄는 제가 이고 가야지 아버지가 책임져야 할 것이 아닙니다.”
“…….”
“그러니 그런 오만한 말씀은 마십시오.”
기천웅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을 앞에 두고도 자존심을 얘기하는 아들이다. 하지만 그 자존심은 광기가 유발한, 질투로 인한, 자격지심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아들은 지금 다른 방식으로 사람의 도리를 말하고 있었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저 무당파 도사들의 말처럼 돌고 돌아 다시 원이다. 아들은 누구보다 죄 많은 삶을 살았지만, 죽음을 앞에 두고 그만의 깨달음을 얻었다.
스르륵.
기우환의 몸에서 점점 힘이 빠졌다.
기천웅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우환아.”
“편안하군요.”
“…….”
“왜 한 번도 이렇게 안아 주지 않으셨습니까.”
“…….”
“제정신은 아니었지만, 저는 느끼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주먹질과 발길질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습니다.”
생사를 두고 싸운 부자지간이다. 아들은 지금 그 싸움에서 아버지에게 맞고 차였는데도, 그 주먹질과 발길질이 괜찮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평생 아버지와 제대로 소통하지 못한 아들. 폭력과 죽음으로 얽힌 마지막 싸움에서, 기우환은 비로소 아버지의 걱정과 분노를 알았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보여 준 감정, 그 관심.
그것만으로도 기우환은 좋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결국 기천웅은 오열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아버지.”
기우환의 웃음이 다시 흐릿해졌다.
“고통스럽게 살고 싶지 않다면, 제 몫까지 잘살아 보십시오.”
“…….”
“이승에서 배우지 못한 삶, 저승에서라도 보면서 배우겠습니다.”
“우환아!”
기우환의 눈이 감겼다.
감긴 그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불이 없군요. 춥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기우환의 호흡이 끊어졌다.
푸스스.
기우환의 몸이 조금씩 조금씩 재가 되어 흩어졌다.
극한의 열양공으로 대지 곳곳이 녹아 눌어붙었는데도 아들은 춥다고 했다. 춥다는 아들에게 옷 하나 둘러 주지 못했다.
그렇게 기천웅은 아들을 잃었다.
그리고 자신의 일부분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