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289)
흑백무제 1291화(1290/1320)
1291화. 전설이 되다 (16)
살벌하기 그지없는 전투 속에서도 두 사람의 싸움만큼은 별세계에서 벌어지는 일 같았다.
실제로 이곳에 모인 고수 중 누구도 둘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돕지도 않았고, 후퇴나 진격을 종용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의 싸움은 점입가경으로 흘러갔다.
콰아아앙!
폭음을 내는 도격이 실로 막강했다.
철목후는 이를 악물었다. 목구멍에서 울컥 올라오는 핏물을 일부러 삼켰지만, 기어이 입가가 핏물로 젖었다.
‘괴물 같은 늙은이.’
무서운 도법이었다.
내공과 체력 소모가 극심한 상태라는 건 처음 보자마자 알았다.
심지어 화기가 심맥 근처에서 불타오르고 있었다. 사실상 움직일 수 없는, 움직여서는 안 되는 상태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찍어 내는 칼에는 생기가 넘쳤다. 몸은 죽었는데 칼만 살았다. 저 혼자 저절로 움직이는 듯했다.
“좀 죽어라!”
부우웅!
머리카락을 베고 지나간 패왕도 밑, 종리백의 빈틈을 발견한 철목후가 열화신장을 쏟아부었다.
퍼엉!
종리백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옆구리를 타고 오르는 무시무시한 경력에 내장이 통째로 익는 듯했다. 어차피 버린 목숨이라 생각하니 통증이 통증으로 느껴지지 않았는데도 이번 일격은 무시할 수가 없었다.
“끄응.”
무시할 수 없다면 받아들이며 싸운다.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상반신을 회전한 그가 철목후의 목을 향해 패왕도를 휘둘렀다.
콰앙!
일격, 일격을 휘두를 때마다 엄청난 경력이 폭발했다.
철목후의 얼굴에 질린 기색이 떠올랐다.
“뭐 이런 괴물이!”
괴물이라니, 말이 심하군.
싱거운 생각과 함께 또 한 번 패왕도를 휘두른다. 뻗어 나가는 도신(刀身) 위로 벼락불 같은 진기가 위협적으로 넘실거렸다.
참혼교도의 십도(十刀) 뇌락(雷落)이었다.
번쩍!
실제 벼락이 쏟아지는 듯 환상처럼 나뉜 두 자루 칼이 철목후를 향해 내리꽂혔다.
퍼버버벅!
칼이 닿지도 않았는데 철목후의 몸 여기저기에서 피가 터졌다. 칼의 압력이 그 정도로 강했던 것이다.
철목후는 다친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두 주먹을 마구 휘둘렀다. 염왕팔권의 절기로 도격을 막으려 드는 것이다.
콰쾅! 퍼어어어엉!
확실히 철목후는 강자였다.
한시도 쉬지 못하고 쌓아 온 피로, 엄청난 내공 소모로 제 역량을 낼 수 없다지만 그래도 상대는 중원 천하에서 최강의 도객(刀客)이라 불리는 종리백이다. 위력이 떨어졌다고는 해도 파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 도법을 힘으로 밀어 내고 맥점을 끊어 초식의 위력을 절반 이하로 낮춰 버렸다. 그가 괜히 화왕이 된 것이 아닌 것이다.
쿵!
뇌락의 힘을 소실한 패왕도가 땅에 꽂혔다.
서걱!
뇌락의 힘은 사라졌지만, 칼 특유의 예기는 끝까지 남았다. 칼끝에 걸린 철목후의 상반신에 예리한 상처가 생겼다.
철목후가 이를 악물며 돌진했다.
콰앙!
종리백이 피를 토하며 날아갔다.
칼을 세워 충격을 막았다지만, 염왕팔권의 침투경이 너무 강했던 것이다.
“사부님!”
적들을 베어 넘기면서도 스승의 싸움을 지켜보던 오구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쿵쿵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간 종리백. 기어이 땅에 칼을 꽂고 몸을 일으켰지만, 한층 흐트러진 기도는 그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사부님!!”
콰쾅!
오구문이 앞을 막는 적들을 베어 넘기며 돌진했다.
종리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오지 마라.’
이건 내 싸움이다.
죽어도 그냥 죽지는 않겠다는, 천하를 호령한 도제답게 고수와 싸우다가 죽겠다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지금’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게 얼마나 큰 폐인지는 종리백도 잘 알고 있었다. 한데도 연호정은 그가 죽을 자리를 제대로 만들어 주었다.
자리까지 깔아 줬는데 칼춤도 제대로 못 추고 비명횡사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늙은이의 고집을 받아 주어 고맙네.’
번쩍!
종리백의 눈이 위험한 광채를 발했다.
핏발 선 두 눈에서 화기가 쏟아져 나왔다. 심맥을 타고 흐른 화기가 두뇌까지 침범한 것이다.
그래도 그는 정신을 잃지 않았다.
상단전의 용량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최후를 직감한 노무사의 정신력이 화기가 주는 광기마저 억누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덤비거라!”
쩌렁쩌렁하게 외치며 달려드는 종리백.
철목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죽은 놈이 왜 자꾸 움직이는 거냐!”
“닥치거라!”
번쩍!
사선으로 쪼개어 오는 칼날에 살벌한 살기가 어렸다.
위력이 이전보다 더 떨어졌다. 그래도 위협적이다. 실제 무공의 위력보다는 그에 담긴 살기가 훨씬 위험했다.
철목후의 좌권이 도신을 후려쳤다.
콰앙!
폭음을 내며 튕겨 나간 패왕도가 땅에 꽂히고.
그 틈을 노린 철목후의 우권이 종리백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
“죽엇!”
당연히 죽는다, 이놈아.
불꽃 가득한 주먹이 무섭게 확대되는 것을 보며, 종리백은 생각했다.
이렇게 가는구나.
생각해 보면 나쁜 인생은 아니었다. 성질머리 더러운 스승을 만나 죽도록 고생하며 도법을 익혔고, 평생 배운 게 칼질뿐이라 강호에 나서서도 싸움밖에 할 게 없었다.
그러다가 천하제일도(天下第一刀)라는 명성도 얻었고, 그보다 더 소중한 제자도 만났다. 그리고 그 제자에게 칼을 가르쳤다.
칼, 칼, 칼.
그의 인생은 온통 칼로 가득했다.
스승 따라 성질머리도 괴팍해서 그럴듯한 친구 하나 사귀지 못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에게는 칼이 친구였으니까.
명성보다, 심지어 칼보다 더 소중하다고 생각한 제자를 만났지만, 잠을 잘 때면 언제나 칼이 생각났다.
진짜 팍팍하게 살았군.
남들은 벗을 사귀며 술도 마시고 여우 같은 마누라에 토끼 같은 자식들을 주렁주렁 달고 산다. 그게 사람다운 삶이라고 하면서도 눈 밑이 시커먼 걸 보며 코웃음을 쳐 댔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그런 놈들 얼굴이 피곤해 보일지언정 행복해 보이기도 했다.
그게 진짜 사람다운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한다. 일하면서 자식을 낳고 키우는 것만큼 생산적인 일이 또 없을 것이다.
자신은 달랐다.
생산은커녕 사람 목이나 뎅강뎅강 잘라 내는 삶을 살았다. 세상을 위해 뭐라도 한 게 없이 오히려 사람을 죽이는 삶만 영위했으니, 염라대왕도 혀를 찰 인생을 산 것이다.
그런 자신에게 남은 건 칠십이 넘도록 학대하듯 다뤄 온 몸뚱이뿐이다. 세상을 위해 죽어서 거름이 되는 것 이외에는 할 게 없단 말이다.
그래도 나쁘지 않은 인생이었다고 생각하는 건 지나친 자신감일까? 아니면 잘못된 삶을 외면하고자 하는 변명 비슷한 주장일까?
쩌어어어엉!
강렬한 진동과 함께 짧고도 긴 상념이 끝이 났다.
“뭐?!”
철목후의 눈이 흔들렸다.
다 죽어 가던 늙은이가 어느새 칼을 세워 자신의 주먹을 막은 것이다.
‘잘못된 삶이라…… 그래도 괜찮잖아.’
종리백은 무의식적으로 칼을 휘둘렀다.
수십, 수백만 번 휘두른 참혼교도의 일도(一刀) 단악(斷岳)의 초식이었다.
왜 갑자기 칼질을 시작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휘두를 수 있으니까 휘둘렀을 뿐이다.
‘어라.’
칼끝에 걸리는 느낌이 제법 묵직했다.
‘오호, 이제야.’
몸이 이 꼴이 났는데도 집중해서 휘두르는 것처럼 칼의 정수가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 한 번의 참격으로 상대의 팔이 잘려 나갔지만, 그건 그에게 큰일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이 느낌이었다. 칼이 주는 느낌, 칼끝에 걸리는 묵직한 느낌.
‘다시 해 볼까.’
손목이 돌아가고 어깨가 출렁거렸다.
쾅!
알 수 없는 충격에 온몸이 바스러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이게 아니야. 팔이 아니라 허리다, 허리. 스승님이 봤으면 온종일 욕먹을 칼질이었다고, 방금은.’
다시, 그리고 다시.
으스러질 것 같은 육신을 휘돌려 패왕도를 휘둘렀다.
‘옳지.’
공기와 함께 또 무언가가 베여 나갔다.
칼이 점점 무거워졌다. 그런데도 휘두르는 속도는 빨랐다. 온몸의 힘이 칼에 실렸다는 방증이었다.
‘나쁘지 않지만 좋지도 않아. 이게 극의는 아닐 것이다.’
다시.
부드럽게 발을 뻗어 사선으로 올려 쳤다.
순간 칼끝에 폭풍이 휘감기는 듯했다. 발에서부터 올라온 강한 힘이 허리와 가슴을 지나 어깨, 손목을 통과하고 손가락 끝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이거다.’
칼이 생명을 얻는 순간이었다.
나의 힘이, 의지가 칼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이 정도가 되어야 경지(境地)에 올랐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칼 스스로가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가는 것, 그러면서도 칼자루와 칼끝 전체에 힘이 가득하여 물과 공기도 벨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
부드럽고 부드럽다.
온몸에 힘이 빠지니 뼈와 근육도 흐물흐물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칼의 생기는 강해졌다. 그 짧은 사이, 무려 스물네 번이나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은 칼에 나를 녹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이 나는구나.’
절로 탄성이 나오는 듯했다.
‘그래, 이런 재미지.’
스승에게 칼을 배웠다? 헛소리다.
태어났을 때부터 그는 운명처럼 칼을 쥐었다. 그 순간 이미 그는 진리에 닿아 있었다.
하지만 스승에게 사사한 후 점점 진리를 잃어 갔다. 힘이 강해지고 싸움 실력이 늘었지만, 정작 진리에선 멀어져만 갔던 것이다.
왜일까?
‘자만했구나.’
절대의 내공심법, 무적의 도법, 타고난 재능.
그 모든 것이 그의 눈을 가렸다.
‘이제야 나는 처음 칼을 쥐었던 그 순간 만났던 진리를 되찾았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또다시 칼을 휘둘렀다.
이미 상대는 인간의 형체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패왕도에 실린 거력과 날카로움을 피하지 못하고 죽어 버린 것이다.
상대는 죽고 칼은 살았다.
오히려 더더욱 힘차게 살아나고 있었다. 맥동하고 있었다.
‘미안하다.’
진리에서 멀어졌으니 사람 목이나 썰고 다니는 백정으로 살았던 것이다.
칼은 언제나 나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조금 더 힘을 주라고, 조금 더 힘을 빼라고.
조금 더, 조금만 더 잘 다뤄 주라고.
그렇게 하면 세상천지 베지 못할 것이 없을 거라고 말을 걸었다. 미몽과 번뇌마저도 벨 수 있을 만큼 나는 강해질 수 있다고 줄곧 소리쳤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목이 터져라 외치면서도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종리백은 칼의 진정한 목소리를 들었다.
‘죽어서도 너와 함께할 것이다.’
마지막 일도.
스승에게 배웠던, 그리고 자신이 정립한 일도가 세상을 갈랐다.
번쩍!!
빛의 칼날이 일직선으로 뿜어져 나가며 신화령 수십 명을 베고 사라졌다.
종리백은 그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생명이 가득 깃든 칼을 본 것만으로도 족했다.
‘어?’
웃으며 칼을 내려다보려는데, 어느새 칼은 땅에 꽂혀 있었다. 칼을 쥘 힘이 없어 놓친 것이다.
그 순간 종리백은 세상이 낮아지는 것을 경험했다.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이다.
우우웅!
칼이 울었다. 슬피 울었다.
‘슬퍼하지 마라.’
종리백이 미소를 지었다.
‘미안했다. 그리고 난 후회하지 않는다.’
진리와 만난 것을, 칼과 만난 것을.
‘다음 생에도 너와 함께할 것이다.’
칼, 칼, 칼.
천하제일도라는 허명도, 천하를 위진하는 권력도 필요 없다.
그에게는 칼이, 칼만이 소중했다.
“사부님!!”
저 멀리서 망할 제자 놈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게 보였다.
순간 탄성이 나왔다.
‘있었어. 칼보다 소중한 것이.’
눈물을 쏟아 내며 달려오는 제자의 얼굴이 참으로 웃겼다.
‘그래서 난 칼과 죽는다. 너와는 죽지 않아.’
종리백의 눈이 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