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290)
흑백무제 1292화(1291/1320)
1292화. 전설이 되다 (17)
‘안 좋군.’
찰극평과 신화교의 일천 병력이 나타난 순간 고마한은 이번 싸움이 지극히 어려워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아니, 어려운 수준이 아니라 패배가 확실시되고 있었다. 그의 민감한 감각은 저 멀리 떨어져 싸우던 새로운 교주 기우환의 생명력이 사라진 것을 포착했기 때문이었다.
‘역시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
친구와 달리 그가 새 교주와 함께한 것은 무료하기 그지없는 삶에 진이 빠졌기 때문이었다.
설령 결말이 죽음이라도 좋다. 그럴듯한 실력자와 싸워 젊은 시절의 피 끓는 열정을 다시 느낄 수만 있다면, 그는 무슨 짓이라도 벌일 수 있었다.
그렇기에 큰 아쉬움은 없었다. 이왕이면 새 교주와 함께 이 대륙 놈들과 원 없이 싸웠으면 더 좋았겠지만, 지금도 나쁘지 않았다. 상대 역시 경시할 수 없는 강자였기 때문이었다.
콰르릉!
얇은 검 한 자루로 어찌 이런 조화를 일으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중원의 검제 남궁승, 그의 검이 허공을 불사르며 발산하는 것은 수백 년 역사의 남궁세가가 쌓아 올린 검학의 극치였다.
때로는 제왕검형으로 짓누르려 들었고, 때로는 천풍검과 천뢰검으로 요혈을 노려 왔다. 때로는 섬전십삼검뢰(閃電十三劍雷)로 말도 안 되는 쾌검을 구사하는가 싶더니, 또 어느 순간 고독일검(孤獨一劍)의 살검으로 사정없이 베어 들어온다.
어느 것 하나 경시할 수 없는 최고급 무공들이었지만, 진짜 무서운 것은 그 무공들을 적시 적소에 펼치는 노무사의 경험이었다.
콰아앙!
염왕팔권을 기반으로 한 적룡십수(赤龍十手)의 발경이 막강한 검력을 뿌리부터 뒤흔들었다.
투로보다는 기(氣)의 맥점을 끊고 들어온다. 파괴력 높은 열양공을 지녔음에도 수공(手功)의 섬세함이 화산파의 검법을 보는 듯했다.
남궁승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실로 놀라운 강자다.’
천하는 대체 얼마나 넓기에 아직도 이만한 고수들을 속속들이 등장시키는 건지.
위력이면 위력, 섬세함이면 섬세함 뭐 하나 떨어지는 게 없는 무공이었다. 거기에 무시무시한 화기까지 뻗어 나와 쉽사리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완벽하다. 정말 완벽한 무공이야.’
이자보다 강한 사람은 존재한다. 하지만 남궁승은 고마한의 무공에서 자신의 무공이 도달해야 할 어떠한 지점을 보았다.
누가 더 위인가를 떠나 누가 더 자신의 무공을 완벽하게 가다듬었는가의 차이였다.
남궁승은 그 부분에서 고마한보다 한 수 아래였다. 그의 검은 한없이 높은 곳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있었지만, 모든 것을 품에 안는 단단함이 없었다.
‘어쩌면 나 역시 속세의 범부들처럼 강함에 집착하여 새롭고 더 강한 것에만 목을 맸던 것은 아닌가.’
콰쾅!
제왕검이 적룡십수의 장력을 맞고 튕겨 나왔다.
투로는 그대로인데 검이 밀려 나갔다. 힘에서 밀렸다는 소리였다.
치이익!
검 끝에 붙었던 화기가 순식간에 검신을 역주행하더니 칼자루를 녹이려다가 사라졌다.
‘놀라운 열양공!’
화기의 밀도만 본다면 저 기천웅 교주에 비할 바는 못 될 것이다.
하지만 화기의 운용 능력만큼은 능히 그에 비견될 만한 듯했다. 상대의 발경을 부수고 자신의 기운을 심어 적의 전투력을 끌어내리는 기공술, 감탄이 절로 나오는 깨달음이었다.
‘진즉에 당신과 같은 고수를 만났다면 좋았으련만.’
그랬다면 수도 없이 붙어 보고, 술도 마시며 서로의 무(武)를 더 높은 경지로 이끌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늘은 그에게 이와 같은 상대를 내려 주지 않았다. 심지어 지금은 전장이었다.
아쉬움은 접고 상대를 죽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야만 했다.
피슉!
고마한의 눈이 흔들렸다.
화기의 방벽을 중검(重劍)으로 뚫고 들어와 벼락과 같은 쾌검으로 볼에 상처를 냈다.
상처 자체는 대수로울 것이 못 된다. 그러나 방금, 자신의 호신강기를 깨부수고 머리통을 노린 한 수는 분명 대단했다.
호신강기가 부서진 순간 고개를 틀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다.
‘좋구나. 멋진 강자야.’
메말랐던 고마한의 두 눈에서 강렬한 열기가 새어 나왔다.
‘그래, 나는 이런 승부를 바랐다!’
화아아악!
적룡염화공(赤龍炎火功)이 한계까지 방출되며 그의 육신을 적룡화신(赤龍化神)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적룡화신은 적룡염화공의 비기로서, 가진 모든 기운을 각성시켜 화기 출력의 제한을 풀어 버리는 비술이었다.
남궁승의 눈에 놀라움이 어렸다.
번쩍! 퍼어어어엉!
번개처럼 거리를 좁혀 일장을 내뿜으니, 그 화기 가득한 장력에 휩쓸린 신화령 몇 명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신화령은 그 즉시 진을 조였다. 두 고수의 공방에서 더 이상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고마한은 그런 신화령의 대처 따위는 눈에도, 마음에도 담아 두지 않았다.
“이 싸움이 마지막이라면!”
화르륵!
고마한의 등 뒤로 시뻘건 불기둥이 치솟았다.
그 불기둥은 무겁고 둔탁해 보였다. 어떠한 형상조차 제대로 취하지 않았다.
하지만 심안이 열린 남궁승의 눈에 그 불기둥은 한 마리 커다란 화룡처럼 보였다.
“후회할 일 없게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겠지!”
쿵!
천지를 뒤흔드는 진각과 함께 고마한이 일장을 뻗어 냈다.
또다시 위력적인 장력이 뿜어져 나오는가?
그렇지 않다.
화아아아악!
엄청난 인력(引力)과 함께 남궁승은 자신의 몸이 상대에게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위험!’
저토록 무시무시한 화기로 가득한 상대에게 접근한다는 건 알아서 통구이가 되겠다는 뜻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남궁승은 중검의 묘리를 전신에 실어 움직임을 막았다.
그리고 그 순간, 인력이 사라지고 적룡십수가 터져 나왔다.
콰아앙!
남궁승이 울컥 피를 토하며 밀려 나갔다.
실전 경험이 있는 무사라면 누구라도 쓸 수 있을 법한 허초였다. 한데 그 허초를 이토록 고급스럽고 자연스럽게 구사하니 천하의 검제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보이는구나.’
피를 토하면서도 남궁승의 눈은 고마한의 움직임을 좇았다.
어느새 고마한은 측방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좌측 옆구리를 향해 휘두르는 손은 매의 발톱처럼 오므라져 있었다.
‘아쉬운지고.’
남궁승의 눈이 감겼다.
번쩍! 화르르륵!
고마한의 눈이 흔들렸다.
어찌어찌 막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절대 피할 순 없다. 그렇게 믿고 휘두른 일격이었다.
한데 상대가 사라져 버렸다.
‘어디로?!’
그때, 우측에서 날 선 예기가 느껴졌다.
서걱!
고마한이 이를 악물었다.
어깨부터 팔뚝까지 일직선으로 베고 지나간 검력, 침투한 검경이 근육을 파괴하고 뼈에까지 손상을 주고 있었다.
화르르륵!
순식간에 화정이 개방되며 상처를 치료했다.
“좋구나!”
쾅!
또다시 진각을 밟고 반대 손으로 남궁승을 노렸다.
그 탄력과 움직임은 실로 압도적이었다. 지금의 남궁승으로서는 반응하기 난감할 정도의 움직임.
그러나 남궁승은 또 한 번의 기적을 보여 주었다.
화르륵! 콰아앙!
적룡십수가 재차 빗나가 애꿎은 땅을 폭발시켰다.
서걱!
“크윽!”
고마한의 입에서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귀신처럼 그를 통과한 남궁승, 솔직하고 반듯한 일검으로 그의 복부를 베고 지나갔다.
화아아아악!
화정이 또 한 번 고마한의 복부 상처를 치료했다. 하지만 내장까지 훑고 지나간 일격인지라 빠른 치료가 불가능했다.
‘상관없다.’
이 상처, 이 고통.
그것이 고마한을 살아 있게 했다. 젊은 시절 피 터지게 싸우며 손에 넣었던 쾌락이 그를 환희로 이끌었다.
“이제야 제대로 할 마음을 먹었는가!”
피를 토하며 외치는 고마한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화아아아악!
거대한 불기둥이 그의 팔을 타고 흘러 남궁승을 향해 쏟아졌다.
그때였다.
퍼어어억!
비검(飛劍)에 가슴이 꿰뚫린 고마한의 몸이 십 장 밖으로 날아가 바위에 꽂혔다.
‘어?’
훅!
단 일격에 심맥이 끊어졌다.
팔 전체를 휘감던 적룡십수 최강의 일격, 적룡토염(赤龍吐炎)의 기운이 사라졌다. 심맥이 끊어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오히려 심맥이 끊어졌는데도 즉사하지 않은 고마한의 생명력이 더 놀랍다.
물론 회생이 불가능한 중상이었지만.
“쿨럭!”
피를 토한 고마한의 몸에서 희뿌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적룡염화공이 깨진 것이다.
“승부는 끝났소.”
어느새 다가온 남궁승이 검 자루를 잡았다.
고마한이 쓴웃음을 흘렸다.
“제법 머리를 썼군. 이번 한 수를 위해 힘을 아껴 두고 있었나?”
“천만에. 당신이 약해진 것이오.”
“뭐?”
남궁승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 폭발적인 기공술을 쓰기 전이었다면, 어쩌면 내가 졌을지도 모르오. 당신의 완전무결한 무공에 어찌 대처해야 할지 몰랐으니까.”
“……?!”
“하지만 당신이 더 빠르고 강해진 순간, 그 완벽함도 깨졌소. 강유의 조화가 깨졌으니 살기와 움직임을 읽기도 쉬워졌소.”
“……그랬던가.”
“깨달음을 얻은 그 순간만큼은 고수도 약해지오. 탄탄히 쌓아 온 균형이 무너진 순간이니까. 당신의 그 힘도 마찬가지요. 애초에 완벽한 기공 증폭이 아니더군.”
“…….”
“빨라지고 강해졌다 한들, 한 수 앞을 읽을 수 있는 우리에게는 통하지 않소. 당신도 알지 않소?”
“알지.”
고마한이 미소를 지었다.
“내가 너무 흥분했던 모양이군. 자네 같은 강자를 만나서 말이야.”
“그리고 포기했겠지. 스스로의 삶을.”
“…….”
“남길 말은 있소?”
미소 짓던 고마한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자네와의 싸움, 그것이 내가 이 세상에 남긴 유언이라네. 더는 여한이 없어.”
“전쟁 중에 할 말은 아니지만…… 좋은 공부가 되었소.”
“하하하!”
“잘 가시오.”
남궁승이 힘차게 검을 뽑았다.
화르르르륵!
그 순간 고마한의 몸은 통째로 불타 사라졌다.
신화교의 전대 고수로서 스러져 가는 인생이 싫어 세상에 나온 고마한의 죽음이었다.
남궁승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대화는 끝났다. 아쉬움도 접었다.
지금은 전쟁 중이었다.
파아앙!
곧바로 몸을 날려 전권으로 들어왔다.
쿠르르르릉!!
어느새 신화령은 삼각(三角)의 진을 형성하며 새로이 등장한 일천 병력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기 교주와 함께 온 이들인가?!’
남궁승의 눈이 흔들렸다.
‘위험하다.’
그렇게 많은 사상자가 났는데도 아직 칠백은 족히 남은 듯했다.
그 칠백이 하나가 되어 돌진하는 위세가 엄청났다. 기파만큼은 남궁세가의 총 전력을 쏟아부어야 겨우 막을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압도적이었다.
더는 볼 것도 없었다.
‘후미를 노린다!’
그가 신화령의 후미를 향해 돌진하려는 그 순간이었다.
콰콰콰쾅!!
굉음과 함께 신화령 우측에서 커다란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그 불꽃과 함께 번져 나온 황금빛 기운은 안개처럼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연 성주?!”
홀로 도끼를 휘두르며 일백의 고수와 싸우는 연호정.
남궁승은 경악했다.
‘고수들이?!’
하나같이 심상치 않은 기파를 발하는 고수들, 그들은 바로 신화교주의 직속 호위인 화룡대였다.
‘저만한 고수들을 내가 읽지 못하다니?’
오직 신화령만을 처리하기 위해 돌진했다. 하지만 막상 화룡대의 면면을 보니, 개인 기량이 신화령 이상이었다.
교주의 호위라서 그렇다. 그들 역시 흑제성의 호종대처럼 최고급의 은신술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위험하다. 제아무리 연 성주라도 저런 부대와의 싸움은……!’
콰콰쾅!!
그야말로 난전이다.
어느새 신화령과 신화교 일천 병력이 부딪치며 엄청난 피 보라를 일으켰다. 심지어 측방에서 대기 중이던 기존 신화교 병력까지 끼어들어 혼전이 유발되고 있었다.
어디로도 끼어들기가 쉽지 않은 상황, 그래도 남궁승은 연호정에게로 가려 했다. 그게 이치에 맞았다.
그때였다.
“모두 멈추어라!!”
돌아온 화신의 음성이 전장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