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291)
흑백무제 1293화(1292/1320)
1293화. 전설이 되다 (18)
전쟁, 그것도 혼전 중에는 어떤 장수의 외침도 병사들의 흥분을 잠재우지 못한다. 그것은 내공을 연마한 고수의 사자후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금, 기천웅의 외침은 피 터지게 싸우는 양군 모두의 정신을 일깨웠다.
궁극에 이른 내공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기천웅의 목소리엔 아들을 잃은 아비의 슬픔과 같은 교도들끼리 생사결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 대한 아픔, 알 수 없는 분노 등 온갖 감정이 가득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절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게 하였다.
화르르륵!
사방에서 타오르던 불꽃마저도 주춤하는 듯했다.
홀로 저벅저벅 걸어오는 기천웅의 등 뒤로 푸른 불꽃이 은은하게 새어 나왔다. 기우환의 청린신화기를 완전히 체화시키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 모습이 사람들에게는 묘한 충격을 주었다.
황금빛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걸어오는 거인의 모습이었다. 날아가 버린 상의 때문에 완벽하게 짜인 근육이 그대로 드러났다. 고수하던 맨발 역시 비범해 보였다.
거기에 푸른 화염까지 휘날리며 걸어오니, 진정 화신이 강림한 듯한 위엄이 흘러넘쳤다.
기천웅이 서글픈 얼굴로 말했다.
“내 아들은 죽었다.”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격양된 목소리로 외쳤다면, 어쩌면 코웃음을 치는 사람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모두가 직감적으로 느꼈다. 기우환이 정말 죽었다는 것을.
결국 교주 자리를 찬탈한 배교도가 죽고, 기존의 교주가 다시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을.
“신화령과 화룡대는 이만 뒤로 물러나라.”
신화령은 주춤했다.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그들이었다. 교주가 바뀌었다면 명령을 내리는 자도 바뀌었다는 뜻. 개개인은 과거를 그리워할지라도 부대로서 그들은 체제를 어기지 않았다.
그러나 기천웅의 말을 따르기에는 상황이 너무나도 복잡했다. 당장 기우환이 죽었다고 다시 기천웅을 교주로 모신다는 것 역시 그들이 정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기천웅의 말을 가벼이 여길 수도 없다. 그는 어쨌거나 정식으로 교주 자리를 넘긴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신화령이 갈팡질팡하던 그때였다.
“기우환 교주는 정말 죽었습니까.”
연호정과 싸우던 화룡대주의 목소리는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담담했다.
기천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렇다면 교주는 누구입니까.”
모두의 얼굴에 긴장이 떠올랐다. 화룡대주의 말은 그처럼 민감한 사항을 담고 있었다.
기천웅의 눈이 깊어졌다.
“새 교주가 누가 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
“하지만…… 너희가 이해해 준다면 내가 임시 교주가 되어 줄 수는 있다.”
되겠다도 아니고 되어 줄 수도 있단다.
어떻게 보면 나약하게 들리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오만하게 들리기도 한다.
화룡대주의 눈이 깊어졌다.
“아시겠지만, 교주 부재 시 임시 수장은 화왕과 화룡대주의 주관하에 결정합니다.”
“안다.”
“하지만 이곳에는 화왕이 없습니다.”
그때, 찰극평이 버럭 소리쳤다.
“어디서 그따위 망발을 지껄이는가! 내가 바로 화왕이다! 신화교의 첫 번째 화왕이 바로 나, 찰극평이니라!”
우렁찬 그 목소리엔 순도 깊은 분노가 함께했다. 기천웅와 함께하기로 마음먹었지만 화왕의 자리까지 내놓은 것은 아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런 자리에서 말하긴 좀 뭣하지만…….”
오화왕 철흠기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족하나마 나 역시 화왕이다. 아직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지만 말이야.”
화룡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은 비공식적으로 본교를 나선 배교도와 한배를 탔소. 고로 교의 배반자라 해도 옳으나, 기우환 교주는 두 분을 화왕 직위에서 내치지도 않았소.”
찰극평이 턱을 치켜들었다.
“당연하다.”
“하나 공식적으로 화왕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한들 기천웅 전대 교주와 함께한 시점부터 그 직위를 인정하기도 어려운바, 사심 섞인 결정을 내리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소이다.”
“네놈이 정녕 미쳤구나!”
찰극평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분노하고 있었다.
“그런 것은 네놈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화왕이야! 사심이든 뭐든, 임시 교주를 결정할 권한이 있는 사람들에게 내보일 언사가 아니다!”
“그렇소?”
“정히 우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맞서 싸워라! 우리는 결코 물러나지 않는다!”
“싸우는 것은 두렵지 않소. 두려운 것은 본교가 양쪽으로 찢어져 과거의 영광을 되찾긴커녕 흔한 군벌조차 되지 못하고 멸망해 버리는 것뿐.”
찰극평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분노에 눈이 뒤집혔지만, 동시에 그는 깨달았다. 화룡대주가 왜 저런 말을 했는지.
‘머리를 썼군.’
이곳에 있는 모든 신화교도에게 자신들의 권한을 각인시키고자 함이었다.
화룡대주가 말했다.
“당장에 교주가 될 사람은 없소. 이유인즉, 기우환 교주는 후계자를 세운 적이 없기 때문이오. 이런 상황에서 전대 교주가 임시 교주직을 맡는 것은 타당해 보이나, 당대 교주와의 싸움으로 교를 배반한 전력이 있기에 덥석 맡길 수도 없소.”
“틀렸다.”
기천웅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나는 교를 배반한 것이 아니다.”
“…….”
“교주가 교를 배반하는 것은 곧, 교를 돌이킬 수 없는 내홍에 휩싸이게 하거나 교도들을 핍박하여 교에 씻을 수 없는 타격을 주는 경우뿐이다.”
“…….”
“나는 교주였다. 본교를 배반할 필요가 없는 위치였다.”
기천웅이 눈을 감았다.
“진정 배반자를 논하고 싶거든, 내 아들과 손을 잡고 멋대로 교주 자리를 찬탈하려던 자들을 데리고 오너라.”
그 말이 정답이다.
힘이 강하든 약하든, 양위 절차를 밟지 않고 교주가 된 사람이야말로 배반자다.
성공하면 혁명이요, 실패하면 역모라던가? 결국 기우환은 교주 자리를 거머쥐는 데에 성공했지만, 만약 기천웅이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다면 그게 가능했을 리가 없다.
“나는 교주로서 본교가 둘로 쪼개지는 것을 염려하여 대륙으로 건너왔다. 부족한 나를 따르는 일천의 교도들과 함께.”
“…….”
“내, 이제 와서 추하게 교주의 권한 운운할 생각은 없다. 뭐가 되었든 내 아들은 새로이 교주 자리에 올랐으니, 더는 배반자를 논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겠지.”
“…….”
“그러나 내 아들은 죽었고, 나는 이렇게 살아 있다. 후계자는 아직 없으며, 신화교는 두 패로 나뉘어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이려 한다.”
기천웅이 다시 눈을 떴다.
지독한 슬픔으로 가득한 얼굴과 달리 그의 눈은 맑았다.
“나는 교주의 자격을 상실했다. 하여 능력 있는 새 교주가 나타나기 전까지 임시 교주직을 맡으려 한다.”
“…….”
“적어도 내 대(代)에, 그리고 다음 대에도 본교의 교도들이 패를 나눠 싸우는 일은 없도록 만들 것이다.”
화룡대주가 말했다.
“두 분 화왕께서는 기천웅 전대 교주를 당대 임시 교주로 추대하는 데에 동의하시오?”
찰극평과 철흠기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럼, 내 결정만 남았구려.”
화룡대주가 기천웅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깊은 눈으로 화룡대주의 얼굴을 보던 기천웅은 순간 주먹을 움켜쥐었다.
무뚝뚝한 얼굴, 무심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를 발하던 화룡대주의 두 눈은 감격과 죄책감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기천웅은 이를 악물었다.
못난 스스로가 정말 여러 사람을 힘들게 했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서글펐다.
쿵!
화룡대주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현 시간부로 화룡대주는 임시 교주님을 위해 몸과 영혼을 바칠 것을 다짐합니다.”
그러자 화룡대원 전원이 무릎을 꿇었다.
“교주님을 뵙습니다!”
“교주님을 뵙습니다!”
전장을 울리는 충성 가득한 목소리.
비록 일백 밖에 되지 않지만, 형언할 수 없는 감정으로 가득한 그들의 목소리는 어떠한 화탄보다 강렬하고 폭발적이었다.
뒤이어 신화령주가 앞으로 나섰다.
“현 시간부로 신화령은 전투를 종료하고 시신을 수습하라.”
그 역시 기천웅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임시 교주님의 새로운 불이 된 신화령주의 명령이다.”
“존명!”
신화령까지 무릎을 꿇자 화탄을 들고 대기하던 신화교도들도, 기천웅과 함께 중원에 들어온 일천의 교도들도 모두 무릎을 꿇었다.
“임시 교주님을 뵙습니다!”
피비린내 자욱한 전장임에도 그들의 모습은 장엄하기 그지없었다.
기천웅이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백룡부를 집어넣고 광룡부도 어깨에 걸친 연호정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시간부로 흑도 무림 연맹은 신화교와 우호 관계를 맺을 것을 천명할 것이오. 흑도 무림 연맹 흑제성의 성주로서 약속하오.”
기천웅이 미소를 지었다. 고마움의 미소였다.
그 즉시 남궁승이 외쳤다.
“무림맹 병력은 신화교도들을 도와 시신을 수습하라! 산서 전쟁은 끝났다! 이들은 더 이상 적이 아니야!”
“우와아아!”
지옥 같은 전투로 피로가 극에 달했던 무림맹 병력은 있는 대로 함성을 질렀다.
그렇게 산서 전쟁은 양쪽 중 하나가 전멸하는 일 없이 끝이 났다.
* * *
싸움은 끝이 났다지만 정리할 게 태산이었다.
“죽여 주십시오.”
암무단주 허백은 곧장 무릎을 꿇었다.
“소신이 미흡하여 전장에 늦게 도착했습니다.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습니다.”
연호정은 평소처럼 농담을 뱉지 않았다.
“일어나게.”
손수 허백을 일으켜 세운 연호정이 그의 어깨를 털어 주었다.
“부족한 성주를 위해 중원을 종횡하며 고생한 자네를 누가 벌할 수 있겠나. 이리 멀쩡히 와 준 것만으로도 자넨 자네 할 일을 다했어.”
허백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의 눈은 감격과 죄송함으로 떨리고 있었다.
연호정이 표정을 굳혔다.
“반가움에 술이라도 한잔 나누고 싶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상황이 좋지 않아. 산서 전쟁은 이렇게 끝났지만, 섬서와 강동 역시 전란에 휩싸였어. 그에 대한 정보는 있나?”
“그렇습니다.”
허백이 품에서 서신 몇 장을 꺼내 들었다.
“제가 설명해 드리는 것보다 직접 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건 섬서에 관한 정보입니다.”
연호정은 순식간에 서신을 읽었다.
“역시…….”
그의 눈이 깊어졌다.
“사기로 물든 기마 부대의 무차별 돌격? 그렇다면…… 그쪽과 이쪽의 운용법이 달랐다는 뜻인데.”
“정확한 부분까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그쪽에 사음교 무리가 있었던 만큼, 섬서를 장악하거나 초토화시키는 것 이외의 노림수가 있지 않았나 추측 중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게 맞겠어. 그놈들, 예전부터 상상도 못 할 술수들을 써 댔지.”
실제로 전생에 사음교는 한 마을을 초토화시킨 후 피와 시체를 이용해 광역 술법을 전개했던 적이 있었다.
그로 인해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죽었다. 지금 생각해도 치가 떨릴 만큼 참혹한 전투였다.
“그래도 다행이군. 무림맹 병력이 섬서로 향했다니. 그것도 맹주님이 직접.”
“예. 일단 섬서는 그들에게 맡겨 두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면 강소성 쪽은 어떻게 되었나?”
“거리가 거리인 만큼 제대로 된 정보는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가.”
“다만, 산동이 이상합니다.”
“산동?”
허백이 품에서 또 다른 서신을 꺼내 연호정에게 건넸다.
서신을 읽은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이놈들 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