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292)
흑백무제 1294화(1293/1320)
1294화. 전설이 되다 (19)
수일 전.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비천검주 비연상(飛燕像)의 무심한 목소리가 연위의 정신을 일깨웠다.
“그래, 알고 있네.”
이미 함포 소리가 한층 커졌다. 저 멀리 떠 있는 작은 섬 너머로 간간이 불꽃이 보이고 있었다.
‘해군이 저들을 그냥 보내 줬을 리가 없다. 옥쇄를 각오해서라도 해전에서 끝을 보려고 했을 터, 그러나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적의 수가 그만큼 많거나…….’
동해 북부에서 해군 대다수가 몰살을 당했다는 소리였다.
물론 연위는 해군이 몰살당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라의 군인들은 비록 무림인들에 비해 전투력이 낮지만, 집단 전술과 각종 화기를 이용해 무림인들은 상상도 못 할 전투력을 발휘한다.
그중 해군은 특히 더했다. 배를 다루는 그들의 기술은 무림인에 비할 바가 아니었고, 특히 해상에서 화약의 질을 보존하는 방법과 화포 훈련은 저 장강수로채도 따라가지 못할 수준이었다.
그리고 대륙의 운명이 달린 이번 전투에서 동해의 해군 절반 이상이 뛰쳐나갔다. 그 정도 전력이라면 국가 하나의 명운을 뒤바꿀 정도의 전력이라 할 것이다.
놓칠 수는 있어도 전멸하진 않았을 것이다. 연위는 그렇게 믿었다.
‘문제는 보이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연위는 상단전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제멋대로 힘을 불리는 상단전의 힘은 이제 전인미답의 경지를 넘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알 수 없는 성장이 도리어 연위에게는 해가 되었다.
굳이 곡경의 말이 아니더라도 이대로 놔두면 큰일이라는 걸 그도 직감하고 있었다. 하여, 상단전을 거의 대부분 봉인해 두었다.
연위가 비연상을 바라보았다.
비연상은 심연처럼 깊은 눈으로 바다를 보고 있었다.
‘그나마 자네가 있어서 다행이지.’
비연상은 연위보다 두 살 연상으로, 어린 시절 연가에서 함께 수련했던 사이였다. 이후 폭발적인 잠재 능력을 증명한 그는 비천검주가 되었고 오랫동안 비처에서 수련하였다.
‘나는 자네가 먼저 무극에 오를 줄 알았어. 물론, 내가 먼저 올랐다 한들 내 재능이 자네보다 낫다고는 할 수 없네.’
순수한 무재만 치자면 비연상을 이기기 힘들다. 당장 지금만 봐도 비연상 역시 무극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무극에 오르기 전의 공공대사라도 승패를 장담하기 힘든 수준.
‘하지만 자네의 무재보다 대단한 것이 바로 그 이능에 가까운 심안(心眼)이지.’
어릴 때부터 위험을 감지하는 비연상의 능력은 거의 점복술사의 그것에 비견될 만했다.
타고난 상단전이 그것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 비연상의 상단전은 무극수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연위는 뒤를 바라보았다.
오 장 밖에서 서른 명의 검사들이 자유롭게 앉아서 검을 손질하고 있었다.
연가의 법도를 생각하자면 상상도 못 할 태도다. 실제로 창응대와 비응대, 흑응대를 위시한 연가의 검사들은 도열한 채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저것이 비천검수들이 강한 이유지.’
군대가 제식 훈련을 하는 이유는 올바른 명령 체계와 철저함을 위해서다.
하지만 비천검수들은 다르다. 저들은 한데 뭉쳐 큰 힘을 발휘하는 군대식 무사들이 아닌 자유로움으로 적을 쳐부수는 인재들이었다.
특별 취급을 하는 것이 아니다. 재능 때문에 우열을 나누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그저 재능이 ‘다른’ 것이다.
‘부디 힘을 내 주게.’
그때였다.
“가주님께 인사드립니다.”
부대를 정비하고 온 황석태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용아철기단의 황석태라고 합니다.”
“반갑소. 내가 연가의 가주 연위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주군의 부친이시니 저희에게도 어른이십니다. 편히 대해 주십시오.”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내 아들의 수하라 하여 함부로 대할 수는 없소. 게다가 호정은 흑제성의 성주. 내가 그대들을 편히 대하면 남들도 그대들을 가벼이 여길 터이니 불편하더라도 이해해 주시길 바라겠소.”
황석태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역시.’
파격적이고 자유로운 연호정과 달리 격식이 있다.
하지만 격식이 있는 와중에도 묘한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그 자유로움이 연호정과 닮았다.
“그럼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았소.”
연위가 저 멀리 주둔한 군대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이렇게 보니 정말 압도적이군.”
흑제성에서는 무려 총력의 팔 할에 이르는 대군을 파견했다.
흑과 백이 동맹을 맺었다고는 하나 괜한 다툼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거리를 두고 배치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더 대단해 보인다. 저리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좌우가 까마득했다. 만 단위가 넘는 무사들이 전투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같이 제대로 연마된 무사들이구려.”
“본성의 팔 할이라고는 하나 중하수들을 제외한 전력입니다. 그들은 후방에서 부상자들을 옮기고 보급을 담당하는 등 지원 병력으로 남았습니다.”
좋은 판단이었다.
어중이떠중이까지 다 데리고 와서 숫자로 압도한다면 그것도 나쁘진 않다. 하지만 상대는 사음교였다.
중하수들은 무의미하게 죽어 나갈 확률이 높을 것이며, 자칫 정예 부대의 진형을 흐트러트릴 가능성도 크다. 그럴 바에야 후방에서 지원 역할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물론 전투가 과격해지면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콰릉! 퍼엉!
연위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함포 소리를 넘어, 포탄이 바다로 빠지는 소리까지 들린다.
뿌우우우우.
기묘한 뿔피리 소리와 함께 섬을 돌아오는 전선들이 보였다.
“왔습니다!”
“전원 전투 준비!”
치리리리링!
일선에 백도 무림 병력, 이선에 흑도 무림 병력 모두가 병장기를 뽑아 들었다.
황석태는 곧장 돌아가 기마에 올랐고, 묵비와 궁수들은 몇 번씩 시위를 튕겼다.
곡경은 팔짱을 낀 채 높은 건물에서 바다를 노려보았고 연위는 등 뒤에 맨 제국검의 손잡이를 매만졌다.
‘온다.’
화아아아악!
바닷바람과 함께 매캐한 냄새가 밀려왔다.
화약의 냄새, 그리고 사기(邪氣)의 냄새였다.
‘엄청나구나!’
한두 척이 보이는가 싶더니, 일순간 수십 척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십 척의 전선 뒤로 또 수십에 수십이다. 그 숫자가 삼백에 달하기까지 촌각도 걸리지 않았다.
우와아아아!!
어느새 함포 소리 대신 기괴한 함성이 들렸다.
연위는 본능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엄청나군.’
바람과 함께 전해지는 군기(軍氣)가 실로 엄청났다.
그 군기에 사기가 실리니, 당장 연위부터가 한 걸음 물러나고 싶을 지경이었다. 정통 중의 정통 무공을 익혔는지라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온다.’
뿌우우우!
공포스러운 소리였다.
펄럭!
중앙의 대장선에서 거대한 깃발이 올라왔다.
사음(邪淫)이라는 두 글자가 연위의 두 눈에 선명히 박혔다.
그리고 좌우로 음황(陰荒)이라는 글자가 적힌 깃발을 올린 전함들까지.
“준비하시오.”
“예.”
무림인들 아래, 나뭇잎과 바위로 숨긴 화포들이 조금씩 방향을 틀었다.
해군에서 직접 가져온 황궁 특제 화포 삼십 문이었다. 재장전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일발의 파괴력이 일품이라, 두어 발이면 어지간한 전선 하나를 망가트릴 수 있다는 위험한 병기였다. 황제의 특명으로 해안에 배치될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전선들이 빠르게 다가왔다.
펄럭이는 깃발에 적힌 글자가 모두의 눈에 선명해졌다.
“……조금만 더.”
뿌우우우우!!
모두의 이마에 식은땀이 어렸다.
그때, 화포를 지휘하는 지휘관이 손을 들었다. 전함들이 화포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왔다는 뜻이었다.
“조금만 더!”
지휘관이 주먹을 쥐었다.
그 주먹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도 연위에게는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연위가 소리쳤다.
“지금이오!”
지휘관이 힘차게 주먹을 끌어 내렸다.
“발포하라!”
콰콰콰콰쾅!!
삼십 문의 화포가 모조리 불을 뿜었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간 거대한 포탄이 몇 척의 전함을 뚫어 버렸다.
콰르릉!!
순식간에 전함 다섯 척이 반파되었다.
사정거리 안이라 해도 거리가 얼마인데 단박에 전함 다섯 척을 박살 냈다. 제국의 전함보다 훨씬 작은 크기였지만, 그래도 놀라운 전과였다.
“다시!”
병사들이 빠르게 움직이며 화포를 장전했다. 철저하게 훈련받은 이들 중에서도 엄선된 이들인데, 다가오는 전함의 속도가 빨라서 행동이 느려 보였다.
하지만 화포는 늦지 않게 재장전되었다.
“발포하라!”
콰콰콰쾅!
불을 뿜는 화포, 쏘아져 날아가는 포탄.
벽력탄처럼 떨어져 폭발하지는 않지만, 이 정도 화력으로 발사하는 포탄은 그 자체로 재앙이다. 아무리 튼튼한 전함이라도 맞으면 선체가 박살이 날 것이다.
그리고 기어이, 다섯 발의 포탄이 장군선으로 보이는 전함 두 척을 휘청이게 만들었다.
그 순간 연위가 소리쳤다.
“지금이오!”
파파파파파팡!!
연위와 곡경, 그리고 묵비가 엄청난 속도로 뛰어나갔다.
그들의 속도는 가히 빛살과도 같았다. 해안가를 박차는 순간 이미 수면 위를 달리고 있었다.
“끌어올려라!”
촤르르르르륵!!
바닷속에 잠자고 있던 철판 수십 개가 해면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은신하고 있던 고수들이 길게 늘어뜨려 놓은 철망을 당겨 끌어 올린 것이다.
세 사람의 능력이라면 등평도수도 가능하다. 하지만 전쟁 중이라 내공 소모를 최소화해야 했다.
파파파파팡!
철판을 밟아 가며 빛살처럼 돌진한 세 사람.
파아아아앙!
중간에서 정지한 묵비가 자세를 고정한 채로 홍련궁을 당겼다. 철썩이는 바닷물을 따라 철판도 요동치는데도 자세에 흔들림이 없었다.
그리고 두 사람.
연위와 곡경이 선두로 치고 나오는 일반선들을 향해 돌진했다.
콰아앙!
곡경의 황천괴산사공(恍擅壞散邪功)은 실로 무시무시한 위력을 선보였다.
전신에 내공의 방패를 둘러친 후 그대로 선체를 직격하는데, 화포보다 더 강력한 위력을 발하는 듯했다.
순식간에 선체가 박살 나고 그 위에 탄 사음교도들이 바다에 빠졌다.
퍼퍼퍼퍼펑!
쾌속하기 그지없는 장법이 이어졌다.
황천괴산사공으로 발휘되는 흑사신장(黑邪神掌)이 떨어지는 교도 모두의 가슴에 적중했다.
엄청나게 정교한 장법이었다. 장력에 적중당한 교도들은 당연히 즉사했다.
‘하나 더.’
곡경의 중지와 엄지가 맞닿았다가 강하게 떨어졌다.
피피피피핑!
연달아 다섯 발의 지풍을 쏘아 내니 극에 이른 내공 조예로 펼쳐지는 탄지공, 탄영천공지(彈影穿孔指)였다.
철판도 우습게 뚫어 버리는 위력이다. 일반 선체 따위는 두부처럼 파고들 수 있었다.
좌우 전투선 하단에 구멍을 뚫은 곡경은 즉시 이동하여 흑살귀조(黑殺鬼爪)를 펼쳤다.
우두둑! 콰득!
잔혹하기 그지없는 조법에 교도들의 목이 뜯겨 나갔다. 실로 빠르고 거침없는 수법이었다.
‘그래, 이게 좋지.’
이놈들은 대장이 먼저 나서는 법이 없었다. 지금껏 모든 전쟁에서 그러했다.
하지만 이쪽은 달랐다.
‘방어만 하는 건 성미에 안 차.’
가장 강한 고수들이 선두에 나서서 적의 전력을 줄이고 혼란을 유도한다. 후방에선 간간이 화포를 쏴 대며 최대한 육지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만든다.
그것이 바로 무림 병력이 노리는 한 수였다.
퍼펑! 콰앙!
신들린 듯 홀로 전투선 네 척을 박살 내고 그 위에 탄 교도들 수십을 죽인 곡경.
그런 그의 눈에 저 멀리 번뜩이는 검광(劍光)이 보였다.
판관검 연위, 황궁 역사상 세 번째로 천라제국검의 주인이 된 당대 검왕(劍王)의 신위가 곡경의 두 눈에 가득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