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295)
흑백무제 1297화(1296/1320)
1297화. 전설이 되다 (22)
“엄청나군.”
황석태는 혀를 내둘렀다.
원체 눈이 좋았던 그는 저 멀리 바닷가에서 벌어진 전투 대부분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해안가에서 폭발한 화약까지도.
“저렇게까지 화려한 전투는 또 처음이군. 과연 무극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건 단순히 무극수가 선공을 가했다고 가능한 일이 아님을 그도 알고 있었다.
“모두 준비해라. 곧 육지전이 벌어질 것이다.”
치리리리링!
일천의 철기단원들이 저마다 창을 부딪치며 전의를 불태웠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선에서 진을 형성한 흑제성 병력도 전원 살기를 피워 올렸다. 그러고도 말 한마디 없이 조용한 것이 더 공포스러워 보였다.
다분히 의도적인 행위였다.
단순히 싸움, 국지전의 경험으로만 보면 백도 무림은 흑도 무림의 상대가 되질 않는다. 하루하루가 투쟁인 그들에게 있어 전투는 삶 그 자체였다.
그래서 아는 것이다. 물러설 곳이 없는 자가 어떻게 행동할 수 있는지.
대부분은 삶을 포기하거나 투항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고도 적이 밀고 들어오면 죽기 살기로 싸우게 된다.
하지만 사기가 강하거나 책임감이 넘치는 수장이 지배하는 군대는 본인의 능력 이상의 실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들 앞, 일선의 진형을 짠 정파 무림 병력은 하나같이 사기가 충천했다. 하물며 그들의 핵심 병력은 소수이지만 하나하나가 제대로 연마된 연가의 무사들이었다.
강소성에서 연가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비록 가법은 엄했지만, 민초들을 위해 헌신하는 그들의 존재는 강소성 내 다른 무림 문파들마저 감화시킬 정도였다.
하물며 지금의 연가는 천하제일가라 불릴 정도로 엄청난 명성을 쌓고 있었다.
연가의 장남 연호정은 흑백무제라 불리며 무림의 영웅으로 떠올랐고, 그 동생 연지평 역시 젊은 나이에 무종을 넘은 천재였으며, 심지어 가주인 연위도 무극을 넘어 검왕 소리를 들었다.
한 가문의 부자들이 이렇게까지 거대한 명성을 얻은 전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단순히 세력을 확장하고자 열을 내는 것도 아니요, 중원을 지키기 위해 삼부자 모두가 천하를 종횡하고 있으니 강소성을 넘어 강동 무림 일대 전체가 연가를 존경하고 따랐다.
지금 일선의 병력이 바로 그런 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병력 수 자체는 흑제성보다 적지만, 사기만큼은 천하 어떤 조직보다도 대단한 것이 그들이었다.
그런 그들의 뒤에서 흑제성이 살기까지 피우고 있다. 흑도 무림 병력의 살기는 그들의 사기에 불을 지필 것이다.
물러설 곳이 없는 자들, 죽어서도 이 땅을 지키고자 하는 자들.
물러날 곳이 없음을 끊임없이 환기하는 후방 부대의 살기는 일선 병력에게 엄청난 힘을 주고 있었다.
“곧 싸움이 시작될 텐데.”
황석태가 힐끔 옆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놀랍게도 연지평이 있었다. 군마 위에 탄 연지평의 두 눈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가 봐야 하지 않겠나? 부친께 인사도 드리지 못했잖나.”
그 말대로 흑제성 보급 부대와 함께 이곳으로 온 연지평은 연위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연지평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전투 중입니다. 사적으로는 제 아버지입니다만, 공적으로는 강소성 전투의 수뇌부입니다. 각자가 서 있는 곳이 달라요.”
어른스럽기 그지없는 말투다.
황석태는 연지평이 기특했지만 그만큼 걱정도 되었다.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만, 둘 중 하나라도 전사하게 되면 한이 될 걸세.”
흑도인답게 직설적으로 말하는 그였다.
연지평은 흔들리지 않았다.
“한이 되더라도 전투를 위해서는 이게 맞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 봤자 아버지께는 폐가 될 뿐이에요.”
“폐라니?”
“황 단주님께서는 어떻게 보실지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생각보다 훨씬 더 정이 많으신 분입니다. 애써 그러지 않으려 해도 자식을 위험에서 구하기 위해 무리수를 둘 가능성이 없지 않습니다.”
“……!”
“저는 이곳에서 두 번째 전투를 준비할 것입니다. 그것이 저의 역할입니다.”
황석태는 생각했다.
‘주군의 형제답구나.’
연위를 보며 연호정과는 많이 다르다고 느꼈다. 하지만 묘한 자유분방함은 판박이라고도 느꼈다.
연지평도 마찬가지다.
연호정은 거친 기질에 화통함과 냉정함을 겸비한 열혈의 군략가에 가까웠다. 반대로 연지평은 차분하고 정이 많은 선량한 성격의 청년이었다.
그러나 큰 전투에 임한 지금, 연지평은 연호정 못지않은 냉정함으로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하물며 그 대상이 아버지인데도.
‘참으로 대단한 형제들이야. 이런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것도 다 복인 것이지.’
황석태가 다시 전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만한 냉정함이라면 안심하고 함께 싸울 수 있겠군. 우리의 진법을 이해하기 어려울 테니 자네가 알아서 우리에게 맞춰야 해. 할 수 있겠나?”
“할 수 있습니다.”
압도적인 자신감.
그런 것쯤이야 눈 감고도 할 수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용아철기단의 진법이 흑도에서 손에 꼽힐 만큼 정교하고 위력적인 걸 생각하면 당돌하다 못해 건방지게 들리는 말이었다.
하지만 황석태는 연지평을 믿었다.
그 재능과 냉정함을, 주군의 혈육을 믿었다.
“좋네.”
냉정한 눈으로 저 멀리 전선을 바라보는 연지평.
순간 그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버지.’
불길을 뚫고 달려 나가는 아버지가 보였다. 후방으로 피해 운공을 하시려는 듯 저 멀리 외따로 떨어진 언덕으로 올라가시는데, 그새 부상을 입으셨는지 왼팔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절대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언제나 엄하게 자신을 가르치던 아버지다.
하지만 무공이 성장하고 세상을 경험한 후 다시 뵌 아버지는 어느 때보다도 자신을 칭찬하셨다.
그때, 연지평은 깨달았다. 아버지는 자신을 위해서 목숨도 바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단순히 칭찬을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경험으로 쌓인 안목이 아버지의 진심을 볼 수 있을 만큼 성장한 덕분이었다.
‘형님도, 아버지도 이런 더러운 싸움에서 돌아가셔선 안 돼요.’
잠시 후.
우와아아아!!
기괴한 함성과 함께 사음교의 수병들이 불길을 뚫고 해안가로 들어왔다.
* * *
먼저 와서 대열을 정비한 묵비는 곧장 내력 회복에 효험이 있는 단약을 먹고 궁병들을 배치시켰다.
반 각 후, 수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쏴라!”
피피피피핑!!
무림인들의 철저한 보호를 받은 황궁의 궁사들이 저마다 화살을 날렸다.
퍼버버버벅!
화살에 맞은 수병들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놀랍게도 그들이 쏜 화살은 단 한 대도 빗나가지 않았다. 상체를 노린 화살은 심장을 꿰뚫었고, 머리를 노린 화살은 여지없이 미간에 박혔다.
서로 누구를 노리겠다는 말도 없었는데 각자가 한 명씩 죽였다. 보는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쿠구궁! 쿵! 쿠궁!
불길 너머에서 매서운 굉음이 울려 퍼졌다.
묵비의 눈이 흔들렸다.
‘뒤가 없는 특공이구나.’
해안가는 넓었지만, 점점 좁아지는 형태라 들어올 수 있는 육로 너비는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무림 병력에게는 호재였다. 하지만 저들은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는 듯했다.
배에서 내리고 정착하는 행위 자체가 없다. 속도를 줄이지 않고 치고 들어오다가 그대로 몸을 날린다.
그 많은 배들이 뭍에 부딪혀 박살 나거나 기울어졌다. 다시 타고 돌아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장군선 등 군선들까지 그러진 못할 것이다. 놈들 역시 수많은 물자를 가지고 왔겠지. 그걸 이런 식으로 포기할 리는 없어.’
하지만 일반 전투원들은 가능하다. 그게 사음교였다.
화아아아악!
안 그래도 거칠었던 군기가 더더욱 강렬해졌다.
오랫동안 배를 타고 이동했음에도 조금의 이질감도 느끼지 않는 모양이었다. 잦아드는 불길을 뚫고 나타난 사음교도들의 신법은 지독하게도 안정적이었다.
“쏴라! 더 쏴!”
묵비와 황궁의 궁사들 외에도 궁사들은 꽤 많았다. 강동 무림에서 선별한 이들이었다.
수백 발의 화살이 호선을 그리며 교도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퍼버버버벅! 티티팅!
“크아아악!”
“아악!”
죽은 자보다 멀쩡한 자가 훨씬 많다.
묵비의 눈이 번뜩였다.
‘방패?!’
그렇다.
선두에서 돌진하는 사음교도들은 상체를 다 가릴 정도로 큼직한 원형 방패를 들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수병들은 얼굴보다 조금 큰 한 쌍의 방패를 양손 손등에 차고 있었다.
얼핏 봐도 보통 물건은 아니었다. 그 방패들 덕에 사상자가 적었던 것이다.
치링!
곧장 철전 한 대를 뽑은 묵비가 그대로 시위를 당겼다.
피이이이이잉!
돌풍을 일으키며 쏘아진 철전 뒤로 방패를 든 사음교도의 얼굴이 확대되듯 가까워졌다.
퍼퍼퍼퍽!
방패는 물론 얼굴까지 뚫은 철전이 사음교도 셋을 죽이고 멈추었다.
실로 무시무시한 관통력이었다. 궁사들은 물론 주변 무림인들도 놀라서 묵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정작 묵비의 얼굴은 심각했다.
‘고작 셋이다.’
방패 둘, 머리 셋.
황룡신왕공의 편린을 받아 발전한 홍천기를 힘껏 담아 내쏜 일격이었다. 심지어 무형탄이 아니라 철전을 걸어 쐈다.
그런데도 셋이다.
본래라면 일직선으로 열 명은 꿰뚫었을 것이다.
‘방패의 강도가 그만큼 대단하다는 것. 방패 하나당 적어도 인체 두셋의 내구도는 있다고 봐야 한다.’
묵비가 다시 철전을 시위에 걸었다.
처음 한 발은 방패의 내구도를 시험해 보기 위한 예비 사격이었다.
우우우우우웅!
무섭게 모이는 진기가 홍련궁과 철전 전체를 진동시켰다.
묵비의 절대비기, 구룡파천궁(九龍破天弓)이 전개되는 것이다.
휘이이이이잉!!
사방의 공기가 회오리치며 미친 듯이 철전 끝으로 모이는 듯했다.
‘용조섬(龍爪閃).’
피이이이잉!
쏘아진 철전이 순식간에 다섯 개로 늘어났다.
실제로 늘어난 것이 아니었다. 가운데 철전을 두고, 좌우로 두 발씩의 무형탄이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다섯 개의 발톱을 지닌 구룡파천궁의 초식이었다. 위력은 특출난 바가 없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탄까지 함께 펼치기에 강력했다.
무형탄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자는 입문조차 못 한다. 주 화살이 육안으로 보이기에 무형탄의 기척을 느껴도 막아 내기 힘들다.
퍼버버버벅!
철전이 사음교도 셋의 머리통을 날려 버리고 네 명의 허벅지를 꿰뚫었다.
허벅지가 꿰뚫린 교도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근육은 물론 뼈와 신경, 대동맥까지 통째로 관통해 버린 것이다.
묵비는 끊임없이 철전을 걸었다. 보급으로 준비된 철전만 수백 발에, 목전(木箭)은 그보다 더 많았다.
‘내공의 조율이 중요해. 전투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다.’
시위가 당겨질 때마다 사음교도가 두셋, 많게는 다섯까지도 죽어 나갔다.
그녀를 따라 화살을 날리는 황궁 궁사들의 실력도 대단했고, 무림 궁병들의 사격 역시도 사음교도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이대로만 지속되면 적의 전력을 크게 깎을 수 있다. 하지만…….’
묵비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그리 쉽지는 않겠지.’
그녀의 예감은 정확했다.
쿠르르르릉.
심상치 않은 소리.
잦아든 불길 너머, 사음해군의 전선 대부분이 해안가 근처에서 정지했다.
곡경의 눈이 번뜩였다.
“밀고 들어올 것이다! 모두 전투 준비!”
그때였다.
피이이이이잉!
전방 좌측에서 쏘아진 화살 한 대가 엄청난 곡선을 그리며 묵비의 미간을 향해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