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297)
흑백무제 1299화(1298/1320)
1299화. 전설이 되다 (24)
‘나쁘지 않아.’
궁극의 경지를 엿보는 무위에 내력 회복을 위한 영단까지 취했다.
대자연의 기운을 전신 모공을 통해 받아 내고 호흡하여 정제하는 무극수에게 있어 어느 정도의 내공 소모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도 영단을 취한 건, 이런 대규모 전쟁에선 속도가 중요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뛰어들어 적을 참살할 수 있었지만, 연위는 참았다. 소모된 내공 중 칠 할이 차올랐지만, 남은 삼 할까지 확실히 회복되도록 기다리는 것이다.
대신 그는 전황을 둘러보았다.
‘지금까지는 괜찮다. 하지만…….’
싸움의 흐름은 이쪽에 있었다.
두 무극수와 천하제일궁사의 기습전, 거기에 폭약과 거마창까지 이용해 적의 병력을 크게 깎았다. 적의 전체 군세를 생각하면 극히 일부라고는 하나, 아군의 사기에 불을 지필 정도의 결과였다.
문제는 적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이다.
‘군선 모두 해안가에 안착했다. 서서히 밀고 들어오고 있어.’
사음교도 개개인의 전투력도 상당했지만, 진짜 문제는 해안가에 상륙했으면서도 전선에 합류하지 않고 상황을 주시하는 고수들의 존재였다.
‘역시 보통들이 아니야.’
비슷한 고수들에게 기습을 받았다. 비록 타격이 크지는 않았다고 하나, 분노로 눈이 뒤집힐 만한 공격임에는 틀림이 없다.
조금만 흥분했다면 똑같이 갚아 주기 위해 미친 듯이 돌진하여 요인들을 암살하거나 이쪽 병력을 줄이려 했을 것이다. 한데도 저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저들에게도 이번 강소성 전투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사음교의 강동 타격은 곧 황궁을 불사르는 것까지 염두에 둔 것이 분명했다.
황궁은 중원에 있어 절대 뚫려선 안 되는 심장과 같다. 강동 무림으로서도 이곳에서의 전투는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것이다.
‘……?!’
한참 내공을 회복하며 흐름을 주시하던 연위의 눈이 번뜩였다.
‘흥분했나.’
잘 도열한 채 차분하게 적을 맞아 싸우던 무림 병력의 대열이 조금씩 조금씩 흐트러지고 있었다.
힘의 열세 때문이 아니었다. 점점 흥분하기 시작한 무림인들이 저마다 앞서 나가며 사음교도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한 번도 합을 맞춰 보지 못한 사이다. 저 정도는 예측했다.
문제는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르게 치고 나갔다는 점이었다. 살기와 흥분, 지독한 긴장으로 가득한 전장에서 뿌리가 흔들리는 군을 정립하기는 몹시 힘들다.
‘귀군이 나선다 해도 불가능할 것이다. 적은 계속 밀고 들어오는데 초장부터 너무 힘을…….’
그때였다.
퍼어엉!
온갖 전투가 벌어지는 가운데, 무림 병력 사이사이를 잠영하는 해어처럼 뚫고 오는 일단의 무리가 보였다.
‘흑제성?!’
흑제성의 병력이었다. 한데 그들의 움직임이 실로 놀랍다.
서로 간의 거리가 멀지 않은 병력 사이를 어떻게 저리 유연하게 뚫고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무공의 경지를 넘어선 기예, 발군의 침투 능력이었다.
‘부선. 부선이구나.’
아들의 사매이자 부마 양천의 애제자이기도 한 부선이 흑제성 병력을 이끌고 전선으로 향하고 있었다.
연위의 눈이 흔들렸다.
‘놀라운 침투력이지만, 대체 무엇을 하려고?’
그 순간,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퍼버버버벅!
흑표대의 갑작스러운 파상 공세에 사음교도들이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흑제성에서도 손에 꼽히는 정예이니 저 정도 파괴력은 크게 놀랍지 않다.
진짜 놀라운 건 전선의 흐름이었다.
‘움푹 들어간 곳들에 자리를 잡아 가며 전선을 최대한 일자 횡진으로 만들고 있다.’
흥분한 무림인들의 공세로 반듯했던 횡진이 물결처럼 출렁이고 있었다. 한데 흑표대가 그 틈을 메워 다시 횡진으로서의 역할을 공고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
이변은 또 있었다.
퍼엉!
막강한 힘으로 교도들을 쓰러트린 흑표대원들이 좌우에서 튀어 나가려는 무림인들의 소매와 팔을 가볍게 당겨 호흡을 끊어 냈다.
멋대로 공격하려던 무림인들은 호흡이 끊겨 공격을 포기하고 물러났다. 그러고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좌우를 둘러보았다.
흑표대원들은 대답 없이 묵묵하게 횡진을 유지하며 교도들을 공격했다.
흥분한 무림인들은 또 나왔다. 그럴 때마다 흑표대원들은 말없이 그들의 호흡을 끊어 물러나게 했다. 끝까지 횡진을 유지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주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선두의 무림 병력 중 누구도 치고 나가려 하지 않았다.
소리치고 때려서 깨닫게 하는 게 아니다. 호흡이 끊겨 다시 발을 맞추며 차근차근 적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횡진 유지를 몸이 기억하도록 만들어 버린 것이다.
연위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엄청난 진세 유지다. 대체 어떤 부대지?’
대규모 전투에선 진세를 유지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그것은 무림인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흑제성의 저 이름 모를 부대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발을 맞추며 무림 병력을 안정시킨 것이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대처다. 훈련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야. 백전을 치르지 않고서는 보여 줄 수 없는 경험의 힘이다.’
집단전에서 뭐가 중요한지 제대로 아는 자들이었다. 만약 저들이 없었다면 무림 병력은 쓸데없는 희생을 치를 뻔했다.
‘흑제성에 큰 빚을 졌구나.’
내심 고마움을 느끼던 연위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생각 자체를 버려야 한다. 이미 흑과 백은 하나야. 저 부대의 결단에 고마워할지언정 흑도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해선 안 돼.’
만약 흑도가 일선에서 똑같이 고전했다 해도 이쪽에서 손을 썼을 것이다. 흑과 백은 운명 공동체이므로.
연위가 다시 전황을 둘러보았다.
‘대처가 좋다. 활기를 찾았어. 후방에서 추가 병력이 치고 들어오지 않는 한, 지금의 싸움은 명백히 우리가 우위에 있다.’
그때였다.
‘……?’
연위의 눈이 흔들렸다.
‘뭐지? 어디로 갔지?’
해안가에서 전선의 후방까지.
엄청나게 많은 병력이 대기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존재감을 발하는 이들이 있었다. 당연히 그들은 사음교 측 최고수들이었다.
한데 그중 하나가 사라졌다.
우우우우웅!
연가신단이 무섭게 회전하며 상단전의 힘을 최대로 개방했다.
‘……!!’
어느새 움직인 고수 하나가 마치 흑제성의 전투 부대처럼 교도들 사이를 뚫고 들어왔다.
어떻게 저만한 존재를 놓쳤는지 의아해할 틈도 없었다. 연위가 본능적으로 외쳤다.
“귀군!”
* * *
‘좋아.’
파파팡!
흑사자신권으로 교도들을 후려치는 부선의 무공은 동중정(動中靜)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었다.
투왕 양천이 창안한 흑사자신권은 파격적인 투로와 역동적인 보법, 막강한 내공력으로 적을 살상하는 흑도 제일의 권법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권법을 마치 소림의 권법처럼 장중하게 구사하는 그녀의 깨달음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간의 수련이 헛되지 않았다. 실제로 그녀가 피워 내는 흑사자기(黑獅子氣)는 스승 양천보다 더 고요하고 세련되었다.
경지의 차이가 아닌 깨달음의 방향 차이였다. 양천의 권법이 패력강공 속에 지극히 실전적인 투로를 보여 준다면, 부선의 권법은 은신하다가 먹잇감의 숨통을 일격에 끊는 맹수처럼 고요하고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그처럼 빼어난 경지로도 이 많은 수의 적을 모조리 죽일 수는 없었다.
‘충분해, 내 역할은.’
부선이 외쳤다.
“흑표대는 조금씩 뒤로 빠져라!”
횡진을 유지한 채 물러난다. 완전히 빠지는 게 아니라 조금씩 뒤로 빠져 사태를 지켜보는 것, 흑제성이 이선 병력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은 정확한 명령이었다.
그때였다.
퍼퍼퍽!
부선의 눈이 흔들렸다.
‘대단하구나!’
저 멀리 좌측 후방에서 신들린 듯 화살을 날리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묵비였다. 이 소란스러운 전장에서 궁수들과 함께 절묘한 연환사를 날리는 그녀의 존재는 무엇과도 바꾸지 못할 보물과 같았다.
‘전에도 대단했지만, 지금은 더하다. 진짜 신궁(神弓) 소리를 듣기에 부족함이 없어.’
빤히 보고 있는데도 어떤 식으로 화살을 날리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겨누고 시위를 놓으면 두세 명이 죽어 나가는데, 어느새 또 다른 방향으로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장전과 사격을 오가는 속도가 벼락이다. 그 와중에 저 멀리서 날아오는 적측의 화살은 단 한 발도 허용하지 않았다.
신기(神技)에 이른 궁술 실력, 진정한 무극을 코앞에 두고 있는 또 다른 천재의 무공이었다.
‘사형이 왜 그렇게 믿는지 알겠군. 이 전장에서 가장 차분한 사람이 바로 저 사람이다.’
그때였다.
화아아악!!
고요하던 바다에서 느닷없이 거대한 괴수가 출현한 것 같았다.
그 무시무시한 존재의 출현에 순간적으로 전장 전체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포말처럼 튀어 나가는 살기의 조각들이 환상처럼 눈에 보이는 듯했다.
‘무극수!!’
적진 한복판에서 모습을 드러낸 누군가가 엄청난 속도로 이곳을 향해 날아왔다.
빠른 건 둘째다. 전신 가득 기괴하기 그지없는 사기를 둘러치고 달려오는데, 기의 밀도가 어찌나 높은지 육신이 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위험해!’
콰아앙!
이변에는 이변이다.
마치 적의 출현을 알고 있었다는 듯, 측면에서 유령처럼 접근한 곡경이 육사왕 번요경을 온몸으로 밀어 버렸다.
단순한 밀어 냄이었지만 무극에 이른 힘을 폭발적으로 쏟아 내 달려 나간 그였다. 순식간에 곡경과 번요경이 측면으로 날아갔다.
뒤엉킨 채 이십여 장을 날아가는 두 사람, 빽빽한 숲이라 전투가 벌어지지 않은 미개척지를 한순간 전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콰콰콰쾅!
거대한 돌기둥이 날아와 숲을 파괴하는 것 같다.
숲으로 밀려 나간 번요경은 곧장 자세를 바로잡았다. 곡경의 무식한 몸통 박치기에도 전혀 피해를 입지 않은 듯했다.
곡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번요경을 전장에서 이탈시키기 위한 한 수였을 뿐, 타격을 주기 위함이 아니었던 것이다.
“제법이군.”
번요경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지독히도 뒤틀려 있었다.
“대륙의 사공치고는 대단한 밀도를 지녔어.”
“아, 그러신가?”
“천하 모든 사공은 본교에 뿌리를 두었다. 지금이라도 본교에 투항하겠다면, 사도(邪道)를 걷는 사람으로서 받아 주겠다.”
“사도와 마도의 차이도 모르는 얼간이가 말은 잘한다. 받아 줄 권한이나 있고?”
번요경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싫다면 죽일 수밖에.”
“닥쳐라!!”
쩌어어어엉!
느닷없이 터진 곡경의 일갈은 번요경을 압도하는 살기와 분노로 가득했다.
“천하기 짝이 없는 오랑캐들 주제에 감히 천자의 땅을 넘봐?! 천 번을 찢어 죽여도 용서받을 수 없는 대죄이니라!!”
콰앙!
그간 꾹꾹 숨겨 둔 분노를 고스란히 터트리며 달려 나가는 곡경.
어느새 그의 두 손에는 구름 같은 사기가 몰려 있었다. 흑사신장이었다.
번요경이 마주 장을 휘둘렀다. 시뻘건 광채로 가득한 그의 장력은 공기마저 썩어 버릴 듯한 지독한 사기로 물들어 있었다.
대륙 사공의 정점에 이른 자와 사음교의 여섯 번째 사왕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콰르릉!
수많은 나무가 박살 나고 잡초들이 신음했다.
그렇게 두 고수가 생사격전을 벌이는 그때.
“온다!!”
마침내 후방에서 대기하던 사음교의 이만 군세가 돌진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