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01)
흑백무제 1303화(1302/1320)
1303화. 피에 젖은 영광 (3)
화르륵!
사방이 불로 가득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곳이 아비규환이다. 아직 석양이 깔린 것도 아닌데 사방이 붉어서 곧 밤이 찾아올 것 같았다.
그 지옥 같은 광경을 치장하는 것이 사람들의 비명이었다.
산 채로 내장이 도려내지는 고통에 울부짖는 사내, 팔다리가 잘린 채 강간을 당하는 여인, 어린 자식들의 일그러진 머리통을 보고 미쳐 버린 아낙, 온몸의 살과 뼈가 발라진 부모를 보며 오열하는 자식.
그리고 그런 양민들을 보며 환희의 웃음을 터트리는 마인(魔人)들이 있었다.
눈에 보이는 생명의 정신과 육신을 파괴한다. 불처럼 타오르는 공포와 광기를 탐욕스럽게 들이켜는 그들의 모습은 악마보다도 더 악마 같았다.
“좋구나.”
그 지옥 같은 광경 속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사내가 있었다.
보석 박힌 반지들을 낀 손에 휘황찬란한 금빛 잔이 잡혔다. 그 안에 담긴 술은 넘실거리는 불꽃으로 인해 피처럼 붉게 보였다.
비스듬히 눕듯 앉은 그의 몸을 지탱하는 건 수많은 시신이었다. 족히 일백 구는 될 법한 시신의 언덕 위에서 술잔을 흔드는 사내의 얼굴은 지독하게 나른해 보였다.
“아름다운 노랫소리다. 이 얼마 만에 듣는 달콤한 운율인가.”
사람들의 비명을 노랫소리라 칭한다. 실제로 나른한 얼굴에는 묘한 뿌듯함과 황홀함이 깃들어 있었다.
가볍게 술을 들이켠 사내가 저 멀리 우뚝 선 산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절경이구나. 세상이 이리 붉은데도 꼿꼿하고 웅장하다. 지진이 나고 벼락이 쳐도 숨소리 하나 달라지지 않을 것 같은 그 웅대한 기상은 삼백 년 전과 다를 게 없도다.”
감탄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였다. 다시 없을 예술품을 목도한 거장의 환희가 거기에 있었다.
“삼백 년 전이라…… 그래, 그때도 그랬지.”
사내는 과거를 떠올렸다.
사람들은 천하(天下)라는 말을 많이 썼지만, 진짜 천하의 의미를 모른다.
삼백 년 전, 혈교는 진실로 하늘 아래 모든 것을 죽이고 불태우려 했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저주받은 피를 이은 미친 마인들이 공세를 펼쳤고, 온 세상을 깨끗이 정화하고자 하는 신화(神火)의 불길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사음.
“사음…… 사음.”
광혈(狂血)은 혈신(血神)을 위한 전사들이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저주를 받았으며, 그 저주의 힘마저도 혈신을 위해 불살랐다.
그렇기에 광혈은 선봉이다. 새 시대, 새로운 씨앗을 뿌리기 위한 최강의 창. 그 무엇도 막을 수 없고, 혈신을 위해서라면 바다 너머의 세계까지도 정복하는 미친 마귀들이 그들이었다. 그것이 그들의 존재 의의였으니 곧 광부나 마찬가지다.
그다음은 신화가 있다.
신화란 곧 정화다. 광혈의 마귀들이 선봉이 되어 세상을 파괴하면, 신화가 뒤이어 등장해 천하를 말끔하게 소각한다.
시체도, 죽음도, 피도, 원한도, 공포도, 분노도.
문화와 체제, 혈연까지 모든 것을 불태워 깨끗한 세상을 만드는 것. 혈신의 씨앗을 강림시키기 위한 철저한 준비를 하는 것이 신화이며, 그래서 그들은 하인과 시녀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리고 마침내 사음이 등장한다.
사음은 곧 깨끗해진 세상에 혈신의 씨앗을 퍼트리는 역할을 맡는다. 혈신을 추종하는 자들의 힘을 빌려 새집에 기둥과 뿌리를 세우고, 그 안에 살아갈 자들을 만드는 것이다.
고로 사음이야말로 혈교의 진정한 미래라 할 만하다. 사음이 없다면 광혈의 파괴 행위도, 신화의 소각 행위도 다 무소용인 것이다.
‘그걸 몰랐지.’
정확히는, 그런 케케묵은 전설 따위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
혈교가 원하는 것은 오직 피와 죽음이다.
피는 곧 생명의 상징이며, 죽음은 또 다른 생명의 기반이 된다.
그래서 혈교를 떠받드는 세 분파의 역할도 확실했다. 죽이고, 불태우고, 또 다른 생명을 싹틔우는 것. 그것이 바로 혈교요, 삼공가(三公家)의 존재 이유인 것이다.
사람들은 혈교가 사교 혹은 마교의 무리라며 손가락질하고 비난한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우매한 자들의 성토일 뿐이다.
이 우주는 언제나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우주의 일부이자 우주 그 자체이기도 한 대자연 역시 마찬가지다.
혈교 비전의 역사서에는 과거부터 이어진 수많은 종말과 재탄생에 대한 세계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었다. 정확히 그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상세한 설명은 없으나 분명한 ‘사실’로서 기록되었는데,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수천, 아니 수억 년 전에는 인간이 없었다. 지금 천하를 거니는 숱한 동식물과도 다른 생명체들이 천하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시대가 몰락했다. 그 이유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오랜 시간이 지나 또 다른 동식물들이 세상에 뿌리를 내렸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거대한 크기의 생명체들이 천하를 거닐었다고 했다. 오히려 지금보다 기(氣)가 덜 활성화된 시대였는데도 수천 관에 이르는 괴수들이 이 땅을 활보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러한 시대 역시 몇 번의 멸망을 반복했고, 또다시 세상은 바로 세워졌다.
그렇게 파괴와 생성이 거듭되다가 마침내 인간이 탄생했다. 혈교는 그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고대의 종교인 것이다.
인신 공양(人身供養)과 각종 제물을 바쳐 염원이 실린 피를 세상에 흩뿌리니, 하늘은 노여움을 가라앉히고 가뭄 든 곳에는 비를, 홍수가 난 곳에는 태양을 안겨 주었다.
기도가 하늘에 이르면 맹수가 득실거리는 곳에 그들을 잡을 수 있는 지혜를 주었고, 유례없는 추위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따스함을 선사했다.
혈교는 그렇게 믿음으로 발전했다. 중간중간 이름이 바뀌고 여러 나라, 여러 문화로 전파되며 소멸한 곳도 있고 크게 흥한 곳도 있었다.
하지만 저 멀리 사막과 빙하가 가득한 곳에 걸쳐 대제국을 형성한 곳에 진짜 혈교의 본단이 있다. 그곳이야말로 혈교의 발원지이자 핵심인 것이다.
사내는 혀를 찼다.
“참으로 좋은 시대였다. 좋은 순간이었어. 천하를 위하여, 진실된 신을 위하여 모두가 환희의 축제를 벌였거늘.”
설마하니 그 축제를 망친 자가 혈교의 정통 씨앗이었다니, 기가 찰 일이다.
“하긴, 그 덕분에 지금 우리가 이곳에 있으니 이 또한 하늘의 뜻이렷다.”
삼백 년 전 모든 것이 종결되었다 해도 괜찮았을 것이다. 그 역시 그때, 새 시대와 함께 살아가다가 신의 품으로 돌아갔을 테니까.
하지만 그랬다면 지금처럼 스스로 혈신의 경지에 오를 생각은 못 했을 것이다.
결국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이다. 혈교의 정신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한 번의 실패는 또 다른 성공을 위한 기반이 되었다.
마치 생명의 순환처럼.
그리고 지금, 마침내 생명 순환의 빛이 자신을 향했다. 사내는 그것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그때였다.
“죽지 못해 유부조차 헤매지 못한 악령 주제에 말은 잘하는구나.”
누군가의 목소리에 사내는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을 느꼈다.
언제 들어도 적응이 되질 않는다.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과 다른 말투를 지껄이는 놈들의 존재가 참으로 마뜩잖았다.
사내는 찌푸렸던 얼굴을 폈다.
“내가 아니었다면 너희도 없었느니라.”
“우리가 없었다면 너도 없었지.”
“실패를 거듭한 패배자들의 우월감은 시대를 불문하고 지탄받아 마땅하지. 너희는 나를 위해 존재하는 공물에 불과해.”
“천만에. 우리는 실패할 기회조차 없었다. 네놈이 우리에게서 그 기회를 빼앗아 갔으니까.”
“재미있는 말이로군. 너희는 나로 인해 존재했다. 지금도 그렇고 그때도 그랬어. 나의 수많은 씨앗은 곧 나로 인해 존재했던 것, 주인이 하인을 부리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니라.”
기괴한 광경이었다.
사내는 홀로 묻고 홀로 답했다. 홀로 말하고 또 말했다.
목소리는 같은데 말투와 표정이 순간순간 달라진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정신 이상자라고 생각할 여지가 다분했다.
“그렇게 치면 당신 역시 반역도나 다를 바가 없군. 당신의 조부, 당신의 무사, 당신의 교도는 물론 이곳 중원의 고수까지도 모조리 빨아먹어 버렸으니까.”
“하려면 내 조부도, 부친도 할 수 있었던 일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못했지. 교단의 비원보다 한낱 정리(情理)에 미쳐 있었으니까.”
“그도 그렇군.”
“그렇게 본다면, 과연 너희는 내 씨앗들이라 할 수 있다. 자격 없는 놈들을 받아들일 만큼 난 바보가 아니야. 너희는 나의 씨앗 중 가장 나와 가까운 놈들이다.”
“그렇다면 알고 있겠지? 당신은 조금의 빈틈도 보이면 안 된다는 걸. 당신과 가장 닮은 우리이기에, 누구보다도 이 육신을 원한다.”
“좋은 일이다. 본디 우리는 그런 존재야. 너희가 나의 자식들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나는 당신이 내 선조라는 게 자랑스럽지 않군.”
“마음대로 생각하라.”
그때, 사내의 입에서 또 다른 말투가 튀어나왔다.
“태산인가.”
어딘지 모르게 아련한 목소리.
같은 음성인데도 전혀 다른 사람의 것처럼 들린다. 지금껏 대화했던 두 사람과는 달리, 진정 태산의 절경을 육안으로 보는 자가 튀어나온 것이다.
“삼백 년…… 삼백 년 만이구나. 내, 다시는 이 명산을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거늘.”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부르르.
시체 위에서 일어난 그가 손에 힘을 쥐었다. 그러자 금빛 잔이 그대로 우그러져 땅에 떨어졌다.
“어쩔 수 없었대도 정말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야 마는구나. 이것이 네가 원했던 것이냐?”
동시에 사내가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 본래의 나른한 표정이 떠올랐다.
“원했던 일은 아니지만 필요한 일이지. 어차피 죽어 사라져야 할 불신자들의 비명은 덤일 뿐이야. 그들의 고통과 공포는 천하절색의 여인을 안는 것보다 일만 배는 더 짜릿한 일이지.”
“미친놈.”
“하하하! 나는 미치지 않았다. 사람들은 한계를 두지 않은 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두려워하거나 배척하는 법이야. 너희는 한계가 명확했고, 나는 그 한계를 뛰어넘었을 뿐이다.”
“궤변이다.”
“스스로 솔직해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너 역시 우리의 일이 성공하면 다시 이승의 삶을 도모할 수 있어. 그래서 내게 들어온 것 아닌가? 그래서 날 도우려던 것이 아닌가, 이 말이다.”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사내는 웃었다.
“체면은 중요한 것이지. 하지만 체면과 솔직함은 다른 것이야.”
그때였다.
“교주님.”
저 아래에서 사괴술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인가.”
“이만 전사들을 쉬게 하심이 어떨는지요? 사옥(邪玉)의 혈광이 벌써 반이나 찼사옵니다.”
“광옥이 완전해졌고 화옥 역시 기우환이 죽으며 완성되었다.”
화르륵.
사내의 손에서 푸른 불꽃이 타올랐다. 그 불꽃은 하나의 구슬처럼 완벽한 원을 그리는 무언가를 중심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이제 사옥만 완성되면 되거늘, 어찌 참으라 하는 것이냐.”
사괴술사가 침을 꿀꺽 삼켰다.
“하면, 다시 진행하라 하오이까?”
“……흐음.”
사내가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무표정한 얼굴의 청년이 시립해 있었다.
“적흠, 네 생각은 어떠하냐?”
적흠이라 불린 청년이 고개를 숙였다.
“신의 뜻대로.”
사내가 피식 웃었다.
“오랜만에 취하는 비명이다. 쉬지 말고 거침없이 진격해라. 태산 정상에 이르기 전까지 부수고 능욕하고 으깨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