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03)
흑백무제 1305화(1304/1320)
1305화. 피에 젖은 영광 (5)
콰앙!
무지막지한 일격에 교도들 십여 명이 그 자리에서 어육이 되었다.
혀를 내두를 만한 파괴력이었다. 단 일권에 불과할 따름인데 사람이 죽고 강철 방패가 우그러져 하늘을 날았다.
“어허헝!!”
가득 찬 내공으로 소리를 지르니 이야말로 진정한 사자후다.
흑사자기가 요동을 쳤다. 난잡한 전장을 삽시간에 공포로 채우는 패왕의 외침이었다.
사자가 날뛰었다.
콰득! 콰쾅! 퍼어어엉!
신들린 듯 휘두르는 흑사자신권(黑獅子神拳)에 대항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야말로 양 떼 속에 뛰어든 사자가 따로 없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적진에 뛰어들어 병력을 줄여 놓곤, 정예병들이 들이닥치면 막강한 경력으로 밀어 내곤 후방으로 빠진다.
지극히 단조로운 전술이었다. 넓지 않은 길목, 치고 올라오는 병력을 홀로 막아 내는 양천의 모습은 십만 대군을 막았다는 장판파의 전설 장비가 떠오를 정도였다.
“오라!”
대체 얼마나 많은 적을 쳐 죽였는지 알 수가 없다. 양천의 온몸이 피로 흠뻑 젖었다.
한데도 그는 지친 기색이 없었다.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시간이 갈수록 막강해졌고, 활성화된 내공은 시시각각 외기를 받아들여 더더욱 풍성해지는 듯했다.
사음교도들의 얼굴에 질린 기색이 떠올랐다.
신앙의 힘으로 움직이는 그들에게도 양천이라는 재앙은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양천이 피워 올리는 흑사자기는 일대를 어둡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 기세만으로도 사기가 꺾인다. 거칠고 흉맹한 기운, 천하를 질타하며 숱한 강자를 꺾고 마침내 흑도를 제패했던 패왕의 기도는 신앙 따위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주군. 힘을 비축하십시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백서의 목소리에 걱정 따위는 없었다.
언제나 주군을 걱정하지만 작정하고 싸우는 주군을 걱정하는 것은 우매한 짓이다. 말이 사왕이지, 주군이 작정만 한다면 삼제는 물론 이선과 싸워도 이길 거라고 백서는 자신했다.
양천이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십이지신은 좌우 언덕으로 올라오는 적들을 처리토록 하라.”
“알겠습니다.”
주군의 의지가 그렇다면 그리할 뿐이다. 백서는 곧바로 좌측 언덕으로 올라섰다.
그때였다.
파아악!
양천의 뒤로 누군가가 나타났다.
“왔는가.”
“어르신.”
나타난 사람은 바로 묵비였다.
“가주께서는?”
“다행히 안정을 되찾으셨습니다.”
말을 하는 묵비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양천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었던 것이지.’
한창 전투가 진행되던 도중, 별안간 나타난 적장이 연위를 노렸다.
총사령관이라 할 수 있는 자가 직접 연위를 노렸으니, 오히려 무림 병력에게는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총사령관만 죽이면 적의 사기가 바닥을 칠 터, 그것은 아군에게 있어 크나큰 기회였다.
거기서 변수가 터졌다.
놀랍게도 연위가 적장에게 밀린 것이다. 적장의 무공이 실로 강하고 대단하긴 했지만, 연위가 그렇게까지 밀릴 거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각자 사왕을 맡아 분투를 벌이던 그들은 서둘러 연위를 구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사기가 폭발한 사음교 병력은 그대로 아군을 밀어붙였다.
그 순간만큼은 도무지 싸움이 되질 않았다. 세 고수가 작정하고 밀고 들어오는 그 싸움은, 단순히 병력 대 병력 싸움이 아닌 재해에 가까웠다.
양천과 곡경이 전장을 누비며 적장들을 견제하지 않았다면 사상자가 두 배는 더 생겼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번 전투는 거기서 끝나 버렸을 게 분명했다.
‘도대체 알 수가 없군.’
뒤늦게 참전한 양천은 연위의 전투를 중간부터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깜짝 놀랐다. 연위의 실력은 모두가 믿고 따를 수 있을 정도로 막강했다. 당장 신화교의 일왕인 찰극평을 상대로도 몰아붙이는 게 가능한 수준이 아니었던가.
한데도 적의 총사령관에게 한없이 밀려 버렸다. 내공이나 몸놀림이 멀쩡한데도 그러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이미 결과가 났다. 지금은 앞으로의 싸움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해.’
그나마 다행이라면 적의 총사령관 역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아마 지금쯤 막사에서 몸을 보하고 있을 터. 결국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이번 강소성 싸움의 승패는 무극수들끼리 결판을 내야 할 것이다.
양천이 물었다.
“흑제성 병력은?”
“좌측 전선에서 분산하여 적을 막고 있습니다. 귀군 선배님이 적장 하나를 붙잡고 있으며, 어떻게든 방어가 가능하다고 판단됩니다.”
“좋아. 황궁에는 연락을 취했나?”
“그렇습니다.”
양천의 눈이 번뜩였다.
본디 여기까지 밀려선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다. 그때를 대비하여 많은 준비를 해 두었으니, 최악의 경우라도 황제가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때, 사음교도들이 다시 함성을 지르며 전진했다.
묵비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퍼버버버벅!
전방에서 돌진하던 교도 다섯의 머리통이 그대로 날아갔다.
양천처럼 과격한 살기로 적을 억압하지 않는다. 그저 신들린 궁술로 적의 머리통을 날려 버릴 뿐이었다.
오히려 그게 교도들에게 더 큰 공포를 심어 준 모양이었다. 기척도 없이 날아온 무형탄이 머리를 통째로 날려 버리니, 누구라도 기가 질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양천이 외쳤다.
“자네도 힘을 더 비축해! 이번 전장에서 자네의 역할이 커! 내상을 완전히 치료하고 참전토록!”
“알겠습니다!”
파아악!
묵비가 다시 사라졌다.
양천이 노호성을 질렀다.
“다시 오거라!”
* * *
“쿨럭!”
와공(臥功)으로 몸을 보하던 연위가 돌연 피를 토했다.
“가, 가주님!”
걱정스러워하는 가신들의 외침에 왕전이 말했다.
“조용히.”
그는 침착하게 연위의 몸에 침을 꽂았다. 체내의 탁기를 뽑아내고 운기를 더 활발히 하기 위함이었다.
왕전은 연가주 최강의 수신 호위로, 단순한 호위를 넘어 의술에도 재주가 있었다. 가주의 목숨과 건강을 책임지는 역할인 것이다.
‘역시.’
침을 꽂는 왕전의 얼굴에서 굵은 땀이 뚝뚝 떨어졌다.
‘놀라운 신체다. 예전과는 차원이 달라. 탁기를 배출하는 속도도, 외기를 받아들이는 속도도 엄청나다. 이 상태라면 반 시진 내로 충분히 움직일 수 있다.’
문제는 일어난 다음이다.
‘필시 곧장 싸우려 드실 터인데.’
수신 호위지만, 참전한다는 가주님의 의지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연위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뚝뚝하지만, 그 가면 같은 얼굴은 연약한 스스로를 가리기 위한 하나의 장치에 불과했다.
실제 연위는 누구보다도 여리고 온화한 성품이었다. 과거 그 성품 때문에 가문이 흔들렸고, 오랫동안 쌓아 온 선조의 노력들이 물거품이 될 뻔했다.
이후 연위는 달라졌다. 누구보다 차갑고 단호해진 것이다. 가문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본성을 억누른 그의 의지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의지마저도 정 앞에서는 제구실을 못 했다.
죽어 나가는 아군을 생각해서라도 곧바로 참전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리되면 가주님의 목숨이 위험하다.
‘이번만큼은 어떻게든 막는 것이 좋을까?’
왕전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최대한 빨리 정상으로 회복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집중하자.’
왕전의 걱정과는 달리 연위는 냉정했다.
‘점점 빨라진다.’
검극사기가 신체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탁기를 귀신처럼 잡아먹고 불살랐다. 왕전의 침술 덕분에 기감이 한층 더 민감해진 덕분이었다.
이제는 굳이 집중하지 않아도 검극사기가 알아서 몸을 치료했다. 연위는 내공력에 몸을 맡겨 둔 후, 싸움을 복기해 보았다.
‘대단한 강자였다. 하지만 그자의 무공이 나보다 더 강해서 밀린 게 아니었어.’
휘몰아치는 주먹, 사방으로 요동치는 무지막지한 사기(邪氣).
그리고 그 사기 속에 깃든, 뭐라 형용하기 힘든 음습한 영력(靈力).
‘그랬구나.’
전투가 워낙 치열하고 정신이 없어서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다.
‘사기 속에 섞인 그 기운, 그 이상한 기운이 내 상단신기를 억압했던 것이다.’
연위의 검법은 이제 단순히 내공만으로 구사하는 경지를 넘어섰다. 상단의 영력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더 강한 위력을 발하고, 더 절묘한 검로를 그려 냈다.
한데 적장, 일사왕 단공과의 싸움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아주 미세한 차이라고는 하나 예전보다 검력과 투로가 흔들렸던 것이다.
워낙에 난전 중이었고, 이미 한 번 내상을 입었던 몸이라 바로 파악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 미세한 차이를 지금이라도 파악해 낸 연위의 예민함이 대단하다고 봐야 했다.
‘같은 영력이지만 내 것과는 다르다. 마치 애초부터 상단전을 적극적으로 연마한 자들을 노린 것처럼 철저하게 신기(神氣)를 분해하는 기운이야.’
바로 그것이다.
어쩐지 연가신단의 회전력도 원래만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복기해 보니 적의 기묘한 기운 때문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했지?’
이 세상에 완벽한 무공은 없다. 천하제일은 있어도 독존(獨存)은 불가능하다지 않던가.
언제, 어디에도 천적이란 존재하는 법이다. 하지만 이렇게 상단전의 기운을 직접적으로 파훼하는 공부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죽지 않은 게 다행이랄까. 쓰고 싶은 무공은 아니었지만, 정말이지 아수라팔검(阿修羅八劍)이 아니었다면 목이 날아갔을지도 몰랐다.
‘대응할 수 있다.’
연위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모르고 당하면 끝이지만, 안다면 대처할 수 있다.’
자만이 아니었다.
그는 천하에서 첫손에 꼽힐 만큼 방대한 상단전을 지녔으며,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이 영력의 섬세한 운용이었다.
기운 자체를 없애 버리는 것이라면 모를까, 기운을 흐트러트리고 상단전 운용을 방해하는 파훼법이라면 연위라고 대응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더 강한 영력을 퍼부어 타격을 주거나, 아예 영기를 일시적으로 내공화시켜 신체 능력을 극단적으로 끌어올리면 해결되는 문제다.
‘섬세함은 무너질 수 있겠지만, 난전으로 유도하면 충분히 가능해.’
그도 아니면 만나자마자 심검(心劍), 조정연검(造淨燕劍)으로 적의 마음을 베어 버리면 된다.
그 뒤가 문제겠지만.
‘중요한 건 일각이라도 빨리 몸을 정상으로 돌려놓는 것이다. 어설픈 상태로 출격해 봤자 오히려 아군에게 해가 될 뿐이야.’
연위는 이 전장에서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무극에 이른 강자이며, 무림 병력의 한 축을 담당한다. 그런 사람이 허무하게 죽으면 그게 더 문제다.
어쩔 수 없다면 모르되, 가능하다면 최대한 힘을 비축한 연후에 전선으로 뛰어들어야 옳다.
‘냉정해지자. 우리는 모든 것을 걸고 싸우는 중이다. 내가 그들의 죽음에 죄책감을 가지는 것 자체가 우리 모두의 의지를 모욕하는 것이야.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주먹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검극사기의 운용이 시간이 갈수록 빨라졌다. 어느새 체내에 남았던 탁기가 거의 전부 날아갔다.
‘이제부터는 상단전을 중심으로 축기를 시작한다. 그럼 더 빨라질 수 있어.’
그가 멈추었던 연가신단을 회전시켰다.
그때였다.
번쩍!
눈을 감고 있는데도 환한 빛이 번뜩이는 것 같았다.
‘……?!’
연위는 눈을 떴다.
실제 육신이 눈을 뜬 게 아니었다. 하지만 실제로 눈을 뜬 것처럼 느껴졌다.
‘저건?!’
그의 눈앞에 탑처럼 거대한 검 한 자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검탑 옆.
한 줄기 호리호리한 인영이 보였다.
연위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당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