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04)
흑백무제 1306화(1305/1320)
1306화. 피에 젖은 영광 (6)
꿈인가, 현실인가.
환상인가, 실재인가.
지금 이 순간, 연위에게 그런 의문 따위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사랑했던 단 한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 아니,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사랑했고, 야속하게도 먼저 이승을 떠난 연후에는 갈수록 깊어지는 사랑과 후회에 잠조차 이루지 못하게 했던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
삼생(三生)의 반려. 전생에도 사랑했을 것이고, 지금도 사랑하며, 훗날 다시 태어나 만난대도 내 목숨보다 만 배는 더 귀하게 여길 여인이었다.
‘여보.’
말은 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공허하고도 공허하다. 마치 다른 세상에 사는 자신이, 반려가 사는 곳으로 혼만 이동해 버린 것 같았다.
여인이 미소 지었다.
지평을 낳다가 이승을 떴을 때의 얼굴 그대로였다. 삼십 대의 나이임에도 이십 대의 청초함을 지녔다.
눈과 코, 입과 귀, 피부와 머리카락.
그 모든 곳에 자신이 사랑했던 개념들이 녹아 있었다. 두 아들의 모습이 거기에 다 있었다.
그에게 반려가 모든 것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오랜만이네요.”
연위는 울컥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십 년이 지났는데도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생생하게 귀를 울린다. 산뜻하면서도 짓궂은 목소리 안에 상상도 못 할 차분함과 생명력이 가득하다.
‘여보.’
연위의 아내, 연호정과 연지평 형제의 어머니.
몰락한 강동 제일의 문신(文臣) 가문, 채씨 가문의 마지막 후손 채공화(蔡拱華)였다.
“안 본 사이에 많이 늙었어요. 그렇죠?”
장난치듯 물어 오는 저 목소리, 표정.
연위는 차마 입이 열리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아내를 끌어안고 싶었다.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고 싶었다. 당신 없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냐며, 그래도 나름대로 잘 살아오지 않았냐며 확인받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런 말을 하기에는 지난날의 실수가 너무나도 컸다. 아들들에게 엄격하기만 했던 세월, 가문을 바로 세우기 위해 지나칠 정도로 스스로를 몰아붙였던 세월을 떠올리자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연위의 마음을 알았을까? 미소 가득하던 채공화의 얼굴에 안쓰러운 기색이 어렸다.
“당신은 언제나 그랬지요. 스스로를 위해 살아도 될 텐데, 당신 인생에 당신은 없었어요.”
연위는 그 말에 동의하면서도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연가의 가주였다. 가주인 이상 인간 연위의 삶은 부차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동의했다.
또한 그는 두 아이의 아버지요, 한 여자의 남편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인생은 완성되었다. 그래서 동의하지 않았다.
그런 모순적인 감정이 연위를 혼란스럽게 했다.
‘하지만 여보, 나는 이제 검을 알고 있소.’
먼저 떠나보낸 아내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가문과 자식들을 잘 키워 내려 했다.
그러나 자식들은 이제 그의 손을 벗어나 하늘을 거닐고 있었고, 가문의 무사들 역시 스스로 살아 움직이며 협사라 불리기에 부족하지 않은 자들이 되었다.
무의식중에 그것을 깨닫자 성장에 정체가 왔다. 그리고 그 정체를 깨 준 것이 바로 장남 연호정이었다.
무극에 오르는 그 순간의 깨달음.
먼저 간 아내를 향한 미안함을 안고도, 이제 검사로서의 내 인생을 살아 보겠다 당당히 외쳐 지금의 경지에 올랐다.
그러나 막상 이렇게 아내를 보니, 그깟 검 따위가 다 뭔가 싶었다. 차가운 병장기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연위는 그저 아내가 보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이제 그만 놓아요.”
놓으라니? 무엇을?
“자신만의 인생을 살겠다 하면서도 당신은 그러지 않았어요. 책임감 때문이죠. 나는 그런 당신이 자랑스러우면서도 안쓰러웠어요. 온전히 스스로의 인생을 살지 못하는 당신을 보면서 울기도 많이 울었지요.”
연위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흘렀다.
한 번도 이런 말을 한 적 없던 아내다. 그런 아내가 꿈결처럼 찾아와 자신을 위로하고 있었다.
“이제는 내려놔요. 검도에 매진하는 것도 좋고 책을 읽는 것도 좋아요. 중원 곳곳으로 유람을 다녀도 좋고, 농사를 짓거나 낚시를 해도 좋아요.”
채공화의 눈에도 점점 물기가 차올랐다.
“그러니 이제는 편해지세요. 나는 당신이 괴로운 것을 원치 않아요.”
연위가 고개를 떨어트렸다.
숙인 고개 밑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형용할 수 없는 괴로움과 기쁨, 서글픔과 안도가 그의 머리를 마구 뒤흔들고 있었다.
채공화가 다가왔다.
언제나처럼 그녀에게선 백목련(白木蓮) 향이 났다.
“여보.”
그녀의 손이 천천히 올라왔다.
순간, 연위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채공화는 놀라지 않은 듯했다. 그저 서글픈 눈으로 반려를 볼 뿐이었다.
한참 눈물을 쏟아 내던 연위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보았으니 되었소.’
여전히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 뜻은 전달이 된 모양이었다.
채공화가 애써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나마 볼 수 있으니 다행이지요?”
아직도 모르겠다.
이건 정말 환상일까? 아니면 그녀가 진정 영혼으로라도 존재하여 자신을 찾아온 것일까? 그도 아니라면 단순한 꿈일까?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나는 나만을 위해 산 적이 없다고 생각했소. 또한 당신과 우리 아이들만으로도 내 삶은 완성되었다고 생각했소.’
채공화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제 알겠소. 인간 연위의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연위가 손을 뻗었다.
닿을 수 없는 거리임에도 아내의 얼굴을 만지려는 듯 손을 뻗는 그 행동에 말할 수 없는 애달픔이 묻어 나왔다.
‘유람도 하고 낚시도 할 것이오. 당신이 살아생전 먹어 본 적 없는 음식도 먹을 것이고, 농사도 지어 보리다.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 천만 배는 더 힘들겠지만.’
뻗은 손에 조금씩 힘이 들어가더니 주먹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런 것을 하지 않았다고 하여 내가 내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아니오.’
연위의 시선이 위를 향했다.
저 멀리 천장에 은은한 빛이 가득했다.
‘고향이 없으면 나도 없고, 중원이 없으면 우리 아이들의 터전도 없소. 나는 누군가를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 나를 비롯한 모두를 위해 싸우는 것이오.’
“…….”
‘나는 지금, 정녕 사람다운 삶을 살고 있소.’
채공화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점점 밝아졌다.
그 순간 연위는 깨달았다. 환상인지 뭔지는 몰라도, 아내가 자신을 일깨워 주기 위해 찾아왔음을.
남편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녀는, 일부러 자신만을 위해 살라 말하면서 혼란을 겪는 남편이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연위는 연위다운 삶을 살고 있었다.
그 자신이 그것을 원했기에 누구도 그의 삶을 두고 못 살았다, 잘 살았다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연위 본인은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했다. 예전과는 달리 그는 모두에게, 심지어 이 아내에게조차도 당당할 수 있었다.
습관처럼 굳어진 미안함과 애달픔을 던져 버린 연위는 지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아내 앞에서 허리를 펼 수 있었다.
연위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나마 볼 수 있어서 참으로 좋았소.”
처음으로 목소리가 나왔다. 연위는 그걸 알고도 놀라지 않았다.
채공화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처럼 편안하고 아름다운, 그러면서도 보는 사람을 들뜨게 만드는 짓궂은 미소가 일품이었다.
“저도요.”
“이만 가리다.”
“다녀오세요.”
가문 밖에 일이 있을 때, 그녀는 언제나 이 말을 해 주었다.
그 특유의 목소리와 어투를 이십 년 만에 듣는데도 바로 어제 들었던 것처럼 생생했다.
연위가 웃으며 몸을 돌렸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음에도 그는 그리했다.
그런 그는 볼 수 없었다. 미소 짓던 아내의 얼굴이 눈물과 슬픔으로 범벅이 되는 것을.
빛이 울었다.
* * *
스륵.
눈을 뜬 연위는 당연하다는 듯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가, 가주님?!”
“가주님!”
왕전을 비롯한 가신들은 깜짝 놀랐다.
연위는 무덤덤하게 침을 제거하며 물었다.
“상황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가.”
왕전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교착 상태입니다. 두 분 무극수들께서 적의 발을 잘 묶어 두고 계신지라 더 밀리진 않고 있지만, 몰아내지도 못하는 형국입니다.”
“그렇군.”
“가주님. 일단 전투는 두 분께 맡겨 두시고 심신을 보하십시오.”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나는 괜찮네.”
“가주님.”
“자네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야. 정말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괜찮아.”
왕전의 눈이 깊어졌다.
실제로 연위는 괜찮아 보였다. 비록 내상이 완벽히 치유된 것은 아니었지만 탁기가 모조리 뽑혔고, 전신을 도는 진기는 무척이나 활발했다.
‘진기의 성질이 달라졌어.’
검극사기가 아니었다.
뭔가 신묘하기 그지없는 기운이 검극사기와 함께 몸을 돌며 엄청난 속도로 내상을 치료하고 있었다. 지금껏 본 적 없는, 무척이나 성스러운 기운이었다.
‘연가신단의 힘이구나.’
왕전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이런 것이 가능하다니.’
상단전에 자리한 연가신단이 회전하며 그 막대한 상단신기를 내공화, 검극사기에 힘을 보태 치유력을 극단적으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온 천하에서 오직 연위만이 가능한 일일 것이다. 천하제일을 논하는 상단전의 크기와 극한의 영력이 없다면 절대 시도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가주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연위가 손을 뻗었다.
후우웅. 탁.
구석에서 날아온 제국검이 그의 손에 잡혔다.
자연스레 막사에서 나온 그가 사위를 둘러보았다.
‘거칠군.’
우우웅! 우우웅!
전신으로 뻗어 나가는 신기로 인해 기감이 미세하게 줄어들었다.
그런데도 왠지 더 잘 보이고, 더 세밀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그간 눈을 가리고 있던 반투명한 장막이 확 걷힌 느낌이었다.
“아버님!”
저 멀리서 묵비가 달려왔다.
“아버님! 괜찮으세요?”
“그래, 괜찮다.”
연위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순간 묵비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어깨를 통해 들어온 알 수 없는 기운이 순식간에 전신을 휘감으며 내상을 치료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 어?’
연위는 그녀에게 쉬라고 하지 않았다.
“나와 싸웠던 적장이 아직 나서지 않았구나. 덕분에 이런 상황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겠지.”
“네? 아, 네! 그렇습니다.”
“한데…….”
연위의 눈이 깊어졌다.
“놈들이 이상한 걸 꾸미고 있구나.”
“네?”
“그전에는 왜 느끼지 못했을까? 사기(死氣)와 사기(邪氣)가 어느 한 지점을 향해 흘러가고 있는 듯한데…….”
묵비는 그가 하는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가만히 저 머나먼 곳을 바라보던 연위가 순간 눈을 빛냈다.
“그렇군.”
“……?”
“섬서와 산서 전투에서 뭔가 수작을 부린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와 비슷한 것인가.”
묵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섬서와 산서? 그쪽에선 아직 연락이 온 것이 없지 않나?
“비야.”
“네!”
“나와 함께 적진 한복판으로 쳐들어가야겠다. 할 수 있겠느냐?”
적진 한복판.
말 그대로 전장을 뚫고 적의 총사령관에게 직행한다는 뜻이었다.
내심 깜짝 놀랐지만, 이내 묵비는 투지를 불살랐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 활이 아버님을 지켜 드릴 것입니다.”
“그걸 알기에 너를 데려가는 것이다. 이 전장에서 너보다 믿음직한 사람이 달리 누가 있겠느냐.”
연위가 웃으며 제국검을 등 뒤에 멨다.
“자, 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