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05)
흑백무제 1307화(1306/1320)
1307화. 피에 젖은 영광 (7)
“후욱!”
운공으로 몸을 돌본 단공이 거칠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얼굴은 상당히 창백했다. 내상약을 먹고 운기를 했는데도 치유가 되지 않은 것이다.
‘지독하군.’
그는 중년의 검사가 휘두르던 검을 떠올렸다.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오싹할 만큼 난폭한 검이었다. 정기(正氣) 충만하던 두 눈이 포악한 살기로 물들고, 붓질을 하듯 경건하고 장엄했던 칼질은 순식간에 야수의 발길질처럼 변했다.
저 멀리 천축국에서 넘어온 신화에는 아수라(阿修羅)라는 존재가 있다. 시간이 흐르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신화는, 지금에 이르러 아수라를 삼면(三面)에 육비(六臂) 혹은 팔비(八臂)를 지닌 전신(戰神)이자 악마로 그렸다.
그 검사 역시 그와 같았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을 연상케 하던 진기가 한순간 핏빛으로 물들며 사정없이 몰아치는데, 그 기운이 거의 마기(魔氣)에 준할 정도로 파괴적이고 막강했다.
‘마성(魔性)을 숨기고 있었어. 하지만 단순히 기질 때문만은 아니야.’
단공은 자신의 팔을 들어 보았다.
어지간한 상처는 반 각도 되지 않아 치유할 수 있다. 그것이 음황사기(陰荒邪氣)의 힘이다.
그런 음황사기로도 팔에 새겨진 검상이 다 낫질 않았다.
‘도대체 그 검 놀림은 무엇이었지? 진기도 진기지만, 검을 쓰는 방식 자체가 지금껏 보았던 검사들과는 달라. 내공만 써서 베는 게 아니라 마치 외기(外氣)가 깃들어 저절로 상대를 베는 듯했다.’
뭐가 됐든 검상일 뿐이다. 음황사기가 치료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이 지경이다. 놈의 검법에 특별한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고 봐야 했다.
그도 아니면 검(劍) 자체가 특수한 물건이거나.
‘딱히 파사현정(破邪顯正)의 힘이 깃든 물건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위험하기도 참 위험했다. 만약 음황령(陰荒靈)을 써서 상대의 상단전을 흔들지 않았다면, 정말로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르겠다.
잠시 자신의 몸을 살피던 단공은 이내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문제없겠군.”
내상이 다 낫지는 않았지만, 전투를 벌이기에는 충분하다.
자리를 떨치고 일어난 단공이 막사를 걷고 밖으로 나왔다.
“스승님.”
그의 제자이자 최측근 고수인 뇌현단(雷炫團)의 단주 호연율(呼延律)이 고개를 숙였다.
“상황은?”
“교착 상태에 접어들었습니다. 두 분 사왕께서 차분히 밀고 들어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단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전선을 밀고 여기까지 온 상황이었다. 적의 대응이 만만치가 않으니, 굳이 과격한 공세를 취하는 것보다는 천천히 공략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힐끔 호연율과 오백의 뇌현단을 바라보던 단공이 툭 던지듯 물었다.
“혈음사공(血飮邪功)은?”
“잘 제어되고 있습니다.”
혈음무는 음황무에서 떨어져 나온 곁가지로, 재능 없는 자는 입문조차 못 하는 마공이었다.
입문을 해도 중반부를 넘어가면 피를 토하고 죽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중 살아남은 사람은 한 줌에 불과하며, 그 한 줌에 속한 자들 모두가 교주의 혈육이었다.
물론 혈육이라는 사실 자체는 그리 대단한 것이 못 된다. 그만한 재능과 능력을 보이지 못하면, 피만 이었을 뿐 숱한 교도들과 비슷한 인형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교주의 사생아 중 하나인 호연율이 단공의 제자가 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단공 역시 그를 교주의 자식이 아닌 재능 있는 교도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다.
“혹시 모르니 보혈단(補血丹)을 점검해라.”
“조금 전에 지시해 뒀습니다.”
“좋아.”
교주의 혈육이 아니고선 감히 익힐 수 없는 혈음사공을 뇌현단 오백 인원 모두가 익혔다.
‘제대로’ 익힌 자는 사음교에서 열 명이 채 되지 않지만, 편법을 써서 익힐 수는 있다. 그러한 편법을 쓰지 않아도 연마할 수 있도록 음제 하은교를 이용했으나, 안타깝게도 실패했다.
결국 보혈단을 쓸 수밖에 없었다.
“알고 있겠지만, 너희는 오천의 산천단(産天團)과 함께 최후의 싸움을 벌여야 할 병력이다. 끝까지 몸 관리에 철저해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한데…….”
“음?”
호연율이 날카로운 눈으로 전선을 바라보았다.
“싸움이 벌어지고는 있지만, 적측에도 아직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놈들이 있습니다.”
전선을 여기까지 밀어 내는 동안 몇 번 부딪치긴 했어도 제대로 싸워 본 적은 없는 부대가 하나 있다.
그것은 일천에 달하는 기마 부대로, 온갖 살기와 군기가 휘몰아치는 전장임에도 그 존재감이 이곳까지 전달되었다.
“저놈들이 바로 용아철기단이라는 놈들일 것이다.”
단공의 눈도 호연율처럼 예리해졌다.
“흑도 무림 최강의 병력이라고 하더군. 일천에 불과하나 황궁 정예 기병 일만에 비견될 만한 전력이라 들었다.”
“그것은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안다. 내 말은, 결국 총력전은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저놈들 역시 바보가 아니니 저만한 전력을 아껴 둔 것일 터, 놈들이 참전하는 순간 이번 전투가 마무리될 것이다.”
“예.”
우웅. 우우웅.
말을 하면서도 단공의 몸에선 은은한 사기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회복에 탄력이 붙는 것이다.
호연율은 경외 어린 눈으로 단공을 바라보았다.
‘역대 교주님들을 제외하고 음황무를 이렇게까지 익힌 분이 또 계실까.’
그가 단공을 스승으로 삼은 것은 단공의 눈에 띄어서이기도 했지만, 그 자신이 음황무로 발돋움할 수 있을 만한 재능을 타고났기 때문이었다.
단공은 달랐다. 그는 교주의 혈육이 아닌데도 빼어난 재능으로 무공을 연마했고, 결국 음황무까지 사사했다.
‘본교에 이분보다 강한 사람이 다섯은 되겠지. 하지만 이분만큼 음황무에 정통한 분은 교주님을 제외하고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언제고 그 힘을 자신이 가져갈 것이다. 음황무를 제대로 익혀 극사에 오르면, 언제고 스승처럼 사왕이 되어 군림할 것이다.
그게 아니면 호법이 되겠지만, 아무래도 호법보다는 사왕이 더 좋다.
그렇게 각자의 상념으로 시간을 보낸 지 얼마.
“음?”
단공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게 뭐지?”
전선이 한차례 출렁였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길게 늘어선 전선을 대각으로 가로지르는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작은 폭풍이 몰아치는 것 같기도 했다.
호연율이 물었다.
“알아보고 올까요?”
“…….”
“스승님?”
단공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극사에 이른 안목으로도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파악할 수 없었지만, 불길한 무언가가 전선을 헤쳐 나오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고수? 저 전선을 돌파할 만한 고수가 또 있었던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뭐가 됐든 준비는 시켜 놓는 게 좋을 것이다.
“뇌현단은 방진을 구축하라. 산천단 역시 마찬가지다.”
“존명!”
단공이 뒤를 돌아보았다.
“사음괴(邪淫怪)는 어디에 있지?”
그러자 총사령 막사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있습니다.”
음침한 목소리였다. 끈적끈적한 액체가 목을 휘감고 있기라도 한 듯, 듣는 이의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탁한 목소리였다.
“사옥(邪玉)은?”
“육 할 정도 찼습니다.”
“흐음.”
육 할이면 꽤 빠르다. 놈들을 다 죽이지 않아도 사옥은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명령을 다시 내리겠다. 뇌현단은 사음괴를 보호토록 하라.”
“예!”
그렇게 뇌현단을 후방으로 보낸 단공이 다시 전선을 바라보았다.
‘막혔나?’
대각으로 전선을 뚫던 무언가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퍼퍼펑!
무식한 폭음과 함께 전선 일각이 와르르 무너졌다.
순간 단공은 깜짝 놀랐다.
‘뭐였지?!’
마치 보이지 않는 화포가 연달아 터진 것 같았다.
전선의 기가 워낙 혼란스러워서 정확히 무엇인지는 읽히지 않았다. 하지만 짐작하건대, 빼어난 기공술의 일종인 것 같았다.
그리고.
펑! 퍼펑!
처음에는 들리지 않았던 폭음이 연신 울려 퍼졌다.
‘화포…… 화포가 아니다.’
단공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궁술?!’
사음교의 궁사 중 팔 할이 죽고, 궁술 대장과 휘하 궁사 몇몇만이 살아남아 교전 중이다.
하지만 단언컨대 사음의 궁사 중 저처럼 위력적인 궁술을 구사하는 자는 없었다. 하물며 한두 번이 아니라 연달아 아군의 몸통을 날려 버리며 움직이는데, 저런 게 어떻게 가능한지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년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궁사들을 노렸던 년! 초전에 과격한 공격으로 우리 군에 큰 피해를 줬던 그 궁사가 분명해!’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
멀리서 신궁(神弓)을 노리던 누군가의 목이 툭 떨어졌다.
그 광경을 보며 단공은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누구지?!’
이제는 그 궁사가 보인다. 궁사는 마치 대군을 돌파하는 무적의 장수처럼 교도들을 마구 헤집으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단기필마도 아니고 활 한 자루만 쥔 채 달려온다. 그런데도 다 뚫린다. 믿을 수 없는 분전이었다.
그런 그녀를 돕는 귀신이 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허공을 가르고 지나가면, 반드시 누군가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한데 그 죽은 아군 중 절반 이상이 부장급 인사다.
실력자들만 골라서 죽이고 있다는 뜻이다. 신들린 궁술의 고수와 귀신도 놀라 자빠질 암살자의 연계, 마치 누군가를 위해 이쪽의 길을 열어 주고 있는 듯했다.
‘암살자다! 확실해! 한데……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저만한 암살자가 있었다면 왜 지금껏 전장에 투입하지 않았을까?
순간 단공은 이를 악물었다.
‘설마하니, 용아철기단만이 아니었단 말인가.’
결정적인 순간에 투입하기 위해 아껴 둔 전력.
딱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게 아니고서야 저런 말도 안 되는 암살자를 여태 숨겨 둘 이유가 없다.
‘뭔가 수를 쓰고 있다. 이 전투의 향방을 완전히 바꿔 버릴 무언가를 노리고 있는 거야.’
우우우웅!
단공의 몸에서 음황사기가 거칠게 솟구쳤다.
“산천단 전원 방진을 이중으로 쌓도록 한다! 암살자와 궁사가 접근하고 있다! 거미줄을 둘러라!”
대답은 없다. 하지만 이미 산천단은 움직이고 있었다.
퍼퍼퍼펑!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단공은 또 하나를 깨달았다.
‘단순히 우리 부대를 돌파한 것이 아니야.’
대각의 움직임, 그리고 다시 반대쪽 대각으로 향하다가 이제는 명확하게 이쪽으로 달려온다.
‘부대의 가장 취약한 지점을 뚫고 있었던 것…….’
생각을 하면서도 단공은 믿을 수가 없었다.
‘저런 것이 가능한가?’
힘으로 밀고 들어갈 수는 있다. 그건 단공도 자신이 있었다. 궁사와 암살자의 실력에 감탄이 나왔지만, 그들이 하는 것을 단공이라고 못 할 리가 없었다.
문제는 전장의 취약한 지점을 보고 즉각 실행에 옮기는 안목이었다.
‘저런 실력을 갖췄으면서 어찌 지금껏……?!’
그때였다.
번쩍!
한 줄기 연녹빛 광채가 번뜩인다 싶더니, 궁사와 암살자가 뚫어 놓은 대각선 길을 따라 섬광이 번져 들었다.
엄청난 속도로 두 사람이 뚫은 길을 쫓아온 누군가가 어느새 궁사가 있는 곳까지 도달했다.
화아악!
단공의 몸에서 살기가 폭발했다.
“저놈!”
묵비, 사마현과 함께 믿을 수 없는 돌파력을 보인 검객.
판관검 연위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파아아앙!
검객과 궁수, 암살자는 전선을 완전히 뚫어 내고 전진했다.
단공을 향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