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06)
흑백무제 1308화(1307/1320)
1308화. 피에 젖은 영광 (8)
이런 순간에 어울리는 감정은 아니지만, 묵비는 감탄을 넘어 감동했다.
‘이럴 수가 있나.’
퍼버벅!
홍련궁이 불을 뿜을 때마다 적들이 죽어 나간다.
본래의 실력 그대로다. 한번 겨눈 적은 시위가 놓인 순간 어김없이 죽어 나갔다. 같은 수준의 고수가 아닌 이상, 이제 자신의 화살을 근거리에서 피하거나 막을 수 있는 고수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더 많이, 더 효율적으로, 더 빠르게 죽이고 있다.’
연위의 상단신기 덕에 지금 이 순간에도 남은 내상이 치유되고 있었으며, 전신에 활력이 넘쳐흘렀다.
그래서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일까?
‘아버님!’
그때, 그녀의 귀로 연위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방 좌측 황색 투구 반경 일 장 내.”
전음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 시끄러운 전장에서 연위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묵비는 반사적으로 화살을 날렸다.
퍼억!
평범한 목전 한 발에 미간이 뚫린 황색 투구의 장수가 쓰러진다.
동시에 벼락처럼 그곳으로 이동한 묵비가 허리춤에서 단창(短槍)을 뽑아 휘둘렀다.
퍼버버벅!
섬광과도 같은 창법이었다.
연호정과 함께 전장을 전전하며 손에 익힌 단창술이었다. 그녀 스스로도 접근전에서 쓸 만한 병기를 고심했고, 무림맹에서 연위의 가르침을 받아 가며 실전으로 완성해 낸 것이었다.
무림맹이 보유한 수많은 창술 중 그녀에게 가장 어울리는 일류의 무공, 강룡창(降龍槍)에 연위의 깨달음과 그녀의 감각이 더해져 만들어진 용비구식(龍飛九式).
구룡파천궁만큼은 아니어도 능히 절정의 무공이라 할 만했다. 구룡파천궁이 기공술에 가까운 무공이라면, 용비구식은 술(術)에 특화된 무공으로 몸놀림이 빠르고 유연한 묵비의 손에서 최상의 위력을 발휘한다.
퍼버벅! 퍽!
물 흐르듯 자연스레 움직이는 단창에 교도들의 목과 미간이 뻥뻥 뚫려 나갔다.
날렵하고 빠르다. 부드럽고 예리하다.
전장의 무공이라기엔 지나치게 유연해 보였지만, 그녀의 막강한 공력은 그 유연함에 극단적인 파괴력을 실어 넓은 범위를 아우르는 절대의 영역을 구축했다.
순식간에 황색 투구 장수의 반경 일 장 범위를 초토화시킨 그녀가 재빨리 단창을 요대에 걸고 홍련궁을 쥐었다.
“우측 십오 장 밖, 외눈의 황색 투구 장수.”
또다시 들려오는 연위의 목소리.
홍련궁이 불을 뿜었다.
퍼어엉!
화살을 걸 새도 없어서 무형탄으로 날린 일격이었다. 외눈의 장수는 그대로 머리통이 날아갔다.
서걱.
외눈 장수가 목숨을 잃은 순간, 귀신처럼 나타난 사마현이 그 일대 부장들의 목을 날려 버렸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엄청난 암살공이었다. 이런 난전에서 더더욱 그 위력을 발휘하는지, 유령처럼 움직이는 사마현을 본 사람조차 몇 되지 않았다.
‘저 녀석도 아버님의 명령을 받았구나.’
얼핏 보였던 사마현의 얼굴에 놀라움의 감정이 가득한 것을 묵비는 놓치지 않았다.
‘이것이 연가 가주의 힘이다.’
아무리 그녀와 사마현의 능력이 뛰어나다 한들 고작 둘이서 적진 한복판을 뚫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적군에도 고수가 엄청나게 많았다. 양천과 곡경이 상대하는 자들을 제외하고서라도 초절정고수가 많았으며 실전 경험이 뛰어난 자들, 중원 무공과 궤를 달리하는 사술에 가까운 무공을 구사하는 자들도 수두룩했다.
그런 곳에 뛰어들어 헤집는다? 묵비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사마현이라도 이런 속도로 적진 한복판에서 효율적으로 암살을 가하긴 힘들 것이다.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능하도록 만든 사람이 바로 연위였다.
“좌측 대각선, 적색 투구 장수를 해치우고 나면 직선 돌파다.”
우우우웅.
어디서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목소리에 강력한 진동이 실려 있었다. 묵비와 사마현은 연위의 말에 홀린 듯 움직여 적군의 지점들을 찍어 가며 전진했다.
‘이것이 심안(心眼)인가.’
진짜 심안이라는 게 이런 것이 아닐까.
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주변 환경은 물론 살아 움직이는 군의 흐름까지 읽어 내는 능력.
‘힘들 것이다.’
비록 그 영역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묵비는 확신할 수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물체도 아니고, 매 순간 각자가 다른 흐름을 만들어 내는 곳이 전장이다. 적군의 흐름을 읽을 순 있다 해도, 찰나마다 돌파 지점을 읽어 내며 우리를 이끄는 일이 쉬울 리가 없어.’
정확한 판단이었다.
‘최대한 빨리 뚫는다.’
우우우우웅!
홍련궁으로 몰려드는 홍천기에 필살의 의지가 담겼다.
티이잉! 콰아앙!
용아포 일격에 전방이 활짝 열렸다.
그 순간, 등 뒤에서 화려하고도 엄숙한 기운이 벼락처럼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콰콰콰쾅!!
묵비와 사마현이 만들어 놓은 길을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는 연위.
전장 한가운데 뚫린 길인 만큼 후방에서 몰려오는 병사들로 인해 금세 다시 닫혔지만, 길을 닫은 병사들의 수준이 낮다.
즉, 연위는 적군이 앞으로의 전투에서 제대로 된 통솔을 하지 못하도록 장수들과 부장을 치워 가며 총사령관이 있는 본진에 닿을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을 만들어 낸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신기(神技)다.
그야말로 신(神)의 경지에 이른 상단전의 힘이었다. 연위 스스로도 자신이 어떻게 이런 능력을 선보일 수 있는지 의아할 지경이었다.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다.’
퍼퍼펑!
눈앞을 막는 교도들을 몽땅 쳐 죽이고 베어 넘기며 도달한 길.
마침내 그의 전방에 묵비와 사마현이 보였다. 자신이 이곳까지 올 수 있도록 피 튀기는 살육전을 벌인 고마운 녀석들이었다.
덕분에 내공 소모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상단전의 영력 소모는 상당했지만, 이 정도로 투지를 잃을 만큼 연위는 나약하지 않았다.
“길이 열렸다.”
훅.
묵비와 사마현을 앞지른 연위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대로 진입한다.”
이 또한 상식을 넘어서는 일이다.
그 많은 적군을 힘의 낭비 없이 뚫어 버린 것만으로도 찬사를 받아 마땅한바, 한데 적의 최강 병력이 포진한 본진으로 고작 셋이서 가자고 한다.
하지만 묵비와 사마현은 망설임이 없었다.
“저희가 묶어 두겠습니다!”
“너희를 믿는다.”
이제는 후배들이 아니다. 전우들이었다.
그것도 이 전장에서 최고로 믿음직한 전우들이었다.
“이것 하나만 명심해라. 적장과의 교전이 일각을 넘어가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후퇴해라.”
묵비의 눈이 흔들렸다.
사마현은 즉각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좋다.”
연위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주르륵.
무리한 영력 소모로 코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영력을 무리하게 쓸 때마다 겪었던 두통이나 무기력증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이 전쟁을 가장 빨리 끝낼 수 있는 길이다. 나는 그렇게 확신한다.’
하늘이 맑았다.
수많은 사람이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이는 와중에도 저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그 투명한 하늘이 말하고 있었다.
지금이라고.
죽은 아내가 말하고 있었다.
멋지게 살라고.
하늘의 뜻을 따라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할 것이며, 아내의 의지를 따라 멋들어지게 살아갈 것이다. 그는 지금 이 순간을, 진정 자신답게 살아가고 있었다.
훅!
연위의 속도가 더 빨라졌다.
과격한 동작도,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음도 없다. 그런데도 묵비와 사마현을 아득히 초월하는 속도를 낸다. 두 사람 모두 신법으로는 어떤 무극수에게도 뒤지지 않건만 지금의 연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아아.’
천종운행비의 올곧은 자세 그대로 나아가니, 천하가 다 내 것이라도 된 듯하다.
거대한 세상이 작아 보인다. 이 넓은 강소성 전체에 발 하나만 둘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이 거대해진 기분이었다.
천하에 두 발을 딛고 일어선 남자였다. 구름을 뚫고 올라간 머리는 혼돈의 우주를 보고 있었다.
위이이잉!
연가신단이 지금껏 보여 준 적 없던 속도로 회전한다.
몰랐던 것을 불현듯 깨달은 순간인가. 혹은 이미 알았던 것을 새삼스레 알아 가는 과정인가.
적의 본진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연위는 머리 곳곳에서 번뜩이는 강렬한 빛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감동인지 격동인지 모를 술에 취해 세상을 바라보니, 온 천하가 나를 향해 함성을 지르는 듯했다.
그리고 그곳, 천하에 두 발을 딛고 선 자신은 어느새 한 자루 검이 되었다.
‘이것이 진정 나로구나.’
왜 갑자기 아내가 나를 찾아왔을까?
환상이든 꿈이든, 아니면 진짜 영혼이었든, 중요한 건 얼토당토않은 순간에 아내를 보았다는 것이다.
처음엔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한데 지금 이렇게 나아가고 보니 단순히 그런 이유만은 아닌 듯했다.
‘떨쳐 냈다고 생각했거늘, 나는 아직도 그녀를 보내 주지 못했던가.’
아내를 사랑한다. 그 마음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를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를 보내 주지 못한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었다.
삼생을 함께할 반려가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그녀를 보내야 했다. 그녀를 보내 줘야만 나는 나로서 우뚝 설 수 있다.
‘그녀도 그걸 원했다.’
죽음의 순간 다시 볼 수 있다는 확신.
그 확신으로 인해 연위는 마음속에 남아 있던 아내의 잔재를 바람에 실어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연위는 신검(神劍)이 되었다.
“비켜라.”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달리면서도 내뱉는 목소리는 우직하고 담담했다.
그 담담한 목소리가 방진을 짠 산천단 전원의 귓가를 울렸다.
내공력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연위의 의지가, 천기(天氣)와 공명하는 그의 영력이 산천단의 위세를 뒤흔들었다.
“막아라!”
치리리링!
저마다 거대한 방패를 든 산천단원들이 길쭉한 창을 꺼내 들었다.
완벽한 방어였다. 기세도 엄청났다. 무극수 중 누구도 단신으로는 저 부대를 깰 수 없을 것이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천의(天意)가 함께하는 지금만큼은 저들을 이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도취된 자아가 속삭이는 유혹이다. 나는 저들을 이길 수 없으며, 저들과 싸우려 온 것도 아니다.’
깨달음의 순간 속에도 연위는 냉정을 유지했다.
‘뒤를 맡긴다.’
파아아앙!
힘차게 땅을 박찬 연위가 하늘을 향해 세웠던 제국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동작은 가벼웠지만, 검력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번쩍!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진 것 같았다.
연가의 검법을 집대성한 후 본인의 깨달음을 녹여 낸 절대무공. 절대삼검으로 시작하여 여의파검(如意破劍)이란 이름으로 변한 그 무공은 궁극의 검기공이요, 심검지도(心劍至道)에 이른 자만이 구사할 수 있는 연가 최강의 비기였다.
일초, 여의뇌광(如意雷光)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매캐한 냄새와 시커먼 흔적만이 가득했다.
순식간에 산천단 이십여 명을 불살라 버린 검력을 타고 오른 연위는 천종운행비를 구사, 단숨에 언덕을 뛰어올랐다.
퍼퍼퍼펑!
뒤이어 묵비와 사마현이 기다렸다는 듯 산천단을 향해 공세를 퍼부었다.
그리고 연위가 언덕 위에 도달한 순간.
콰아앙!!
묵비의 용아포가 언덕으로 향하는 길을 완전히 깨부쉈다. 산천단이 연위를 뒤쫓아가지 못하도록 길목을 차단해 버린 것이다.
파라라락!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가 새처럼 가볍게 내려선 연위 앞.
“……정말 대단하군.”
핏발 선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단공과 뇌현단이 있었다.
“이리 빨리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천천히 자세를 잡은 연위가 그를 향해 제국검을 겨누었다.
“이만 끝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