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09)
흑백무제 1311화(1310/1320)
1311화. 피에 젖은 영광 (11)
“제기랄.”
콰아앙!
폭음과 함께 산천단원이 비틀거렸다.
그게 전부였다. 그간의 내공 소모는 있었지만 무형탄의 위력이 준 것은 아닌데, 저 거대한 방패가 무적의 궁사를 막은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번쩍!
궁술만큼 위협적인 장거리 공격이 날아온다.
놀랍게도 그것은 암기였다. 성인 남성 중지보다 조금 더 긴 형태의 수전(手箭)이 도열한 병사들 사이사이에서 날아오는데, 그 속도가 실로 대단했다.
파바바박!
땅에 꽂히는 수전들.
스치듯 수전 끝을 본 묵비는 경각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독을 묻혔군.’
사람을 살상하기 위한 집단이다. 이 정도는 당연하다 할 것이다.
오히려 묵비 입장에선 백도 정파 무림인들이 이상했다. 협은 협이고 정의는 정의이거늘 도검에 독을 묻히길 주저하는 걸 보면 확실히 이상한 집단이긴 하다.
물론 이제 와서는 그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사삭!
허리춤에 고정해 둔 화살통에서 철전 두 발을 꺼내 들었다.
‘이것도 막을 수 있나 보자.’
피이이잉!
당기는 순간 이미 화살이 날아간다. 시위를 잡아당기고 놓는 일련의 과정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빨랐다.
퍽! 쾅!
드디어 사상자가 나왔다.
한 발은 적병의 미간을 뚫었고, 다른 한 발은 방패를 뚫고 들어가 심장에 박혔다.
하지만 묵비는 기뻐할 수가 없었다.
‘최소 넷은 죽었어야 했는데.’
직사가 아닌 좌우로 휘어지는 곡사였다.
‘본능적으로 읽고 피한 것이다. 방패가 뚫린 놈을 제외하고 셋이 죽었어야 했는데, 둘이 화살을 피했어.’
놀라운 대처 능력이었다. 이룬 경지도 경지지만 실전 경험과 반응 속도가 지극히 대단했다.
‘본 성의 용아철기단 정도의 수준이다. 방진 능력은 철기단보다 위, 작정하고 막으려 들면 철벽의 수비진을 자랑할 것이다.’
순식간에 저들의 특성을 읽는 그녀였다.
파바바바박!
그 먼 거리에서 수전을 또 날린다.
무시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묵비는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머리를 굴릴 수밖에 없었다.
‘두 배 거리를 늘려도 내 화살은 놈들에게 닿는다. 하지만 위력이 떨어질 거고 속도도 느려질 거야. 지금도 원하는 만큼의 살상력이 안 나오는데 거리를 벌리면 하나도 못 죽인다.’
묵비가 힐끔 언덕 위를 바라보았다.
쿠구구구궁!!
대체 어떤 싸움을 벌이는지 언덕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엄청나군.’
여기까지 그 기파가 전해져 온다.
연위의 순정하고 엄격한 기파가 위태롭게 흔들리는 듯했다. 사위를 압도하는 무지막지한 사기(邪氣)는 마기(魔氣)보다도 더 지독했다.
‘아버님.’
위험한 전장으로 직접 발을 디딘 분이다.
기파마저도 위태롭다.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위험한 상황인 게 분명했다.
‘위험할 걸 알고 온 길이다. 아버님 역시 이런 식으로 패사하면 큰 문제라는 걸 모르시지 않아. 자신이 있으니까 오신 것이다.’
그 믿음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녀는 싸움에 변수가 수도 없이 많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그것이 그녀를 초조하게 했다.
‘신경 쓰지 말자.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이들의 발을 최대한 붙잡아 두는 것이다.’
그때였다.
파바박!
적병 몇 명이 기어이 언덕을 올라가는 게 보였다.
저들 정도로는 연위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저들의 암기술은 걱정이다.
적군이 많은 이곳에선 변수가 많은 게 연위에게도 유리하겠지만, 이놈들은 딱 봐도 최정예 집단이었다. 변수를 만들어도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만들지, 연위에게 유리한 변수를 만들 만큼 어설프진 않을 것이다.
‘위험!’
묵비의 눈에 매서운 정광이 어렸다.
피이이이이잉!!
본능적으로 철전을 걸어 시위를 당기니, 그 안에 약식으로나마 용아포의 힘이 담겼다.
소용돌이치며 쏘아진 용아포가 언덕을 타고 오르는 적병들을 직격하려는 순간.
콰쾅!
어느새 뛰어오른 몇몇 적병이 방패로 용아포를 막았다.
용아포를 막은 병사들은 좌우로 튕겨 날아가 땅을 굴렀다. 한 명은 죽었고 두 명은 중상을 입었다.
그게 끝이었다.
‘이런!’
아군의 죽음에도 동요하지 않는 부대.
치리리링!
무슨 의식이라도 되는지 기다란 창대로 방패를 긁으며 한 발 앞으로 전진하는 산천단의 기세는 매섭기 그지없었다.
묵비가 소리쳤다.
“사마현!!”
“……제길.”
어둠 속에서 산천단의 진형을 파훼하려던 사마현은 이를 악물며 언덕을 향해 날아갔다.
사사삭!
섬뜩한 소리와 함께 언덕을 타고 오르던 적병들의 목이 날아갔다.
묵비의 궁술만큼이나 인상적인 암살공이었다. 짤막한 검 한 자루로 천하의 누구라도 죽일 수 있는 궁극의 살인자였다.
스르륵.
다시 어둠 속으로 몸을 감춘 사마현은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콰콰쾅!!
각자가 거대한 방패를 땅에 꽂고 자세를 낮춘 채 사방으로 창을 겨눈다.
일 보씩 이동하며 살아 움직이는 진형을 형성하던 그들이 아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진을 만들었다. 덕분에 진법 파훼를 구상 중이던 사마현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괜찮아!”
사마현의 심정을 알았는지 묵비가 홍련궁의 시위를 당겼다.
“차라리 이게 나아! 놈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우리도 무리하게 공격할 필요가 없다!”
사마현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야. 하지만 이 정도 정예 부대가 우리의 의도를 모를까?’
그의 예상은 정확했다.
툭. 툭. 툭.
산천단 주변으로 수십 개의 구슬들이 땅을 굴렀다.
순간 사마현이 외쳤다.
“피해!”
퍼퍼퍼퍼퍼퍼펑!!
구슬들이 일제히 터지며 자욱한 녹색 연기가 일대를 뒤덮었다.
화탄이 아닌 독탄이다. 한데 그 독기가 상상을 초월했다.
음화홍류, 음한백류를 합일시킨 사마현에게는 어지간한 극독도 통하지 않는다. 그런 그조차 순간적으로 머리가 띵해질 지경이었다.
‘이런 독한 놈들이.’
기실 이 정도는 암살 세계에선 약과다.
문제는 이놈들이 전투 부대라는 것이다. 적의 섬멸을 위해 조직된 전투 부대와 오직 살인만을 키워진 암살자들은 전혀 다른 방식의 살법을 익힌다.
이놈들은 전투 부대면서 암살자들의 살법과 비슷한 수법까지 쓰는 것이다.
‘독무를 깔았으니 우리는 접근할 수 없다. 당연히 저놈들은 이 독에 면역일 터, 이 순간 언덕 위로 병력을 보내 지원하겠지.’
사마현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별수 없나.’
그가 품에서 작은 구슬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최상급의 피독주(避毒珠)였다. 이거라면 일각 정도는 저 맹독에서 버틸 수 있을 것이다.
‘허를 찌른다. 일각만이라도 어떻게든!’
그때였다.
쿠르르릉.
무시무시한 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대기가 뒤흔들렸다. 엄청난 힘이 한곳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사마현은 깜짝 놀랐다.
‘이 힘은?!’
응축되고 또 응축되는 힘.
“신궁!!”
피이이이이잉!!
시위를 놓는 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경쾌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뻗어 나가는 힘은, 그 어느 때보다도 무겁고 막강했다.
콰르르르릉!!
천둥소리와 함께 회전하며 쏘아진 용아포는 묵직하게 허공을 갈랐다.
용아포 특유의 속도는 찾아볼 수 없다. 일반 화살을 쏴도 그보다는 더 빠를 것 같았다.
그래서 사마현은 놀랐다. 와류(渦流)를 일으키며 뻗어 나가는 저 거대한 힘을 속도까지 조절하며 쏘아 내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내력 없인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력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야. 기공의 깨달음이 극치에 이르러야만 한다.’
사마현은 저도 모르게 묵비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진한 녹색 연기 때문에 보이지 않던 묵비의 신형이 조금씩 보였다.
‘강한 줄은 알았지만, 그토록 대단한 경지에 이르렀던가?’
또한, 이 일격은 단순한 힘자랑이 아니었다.
화아아아아악!!
밀도 높은 독기가 와류를 일으키는 용아포에 빨려 들어가며 일대에 깔린 독진이 와해되고 있었다.
실로 엄청나게 대담하고 파격적인 방법이었다. 거의 절반이 넘는 독기를 빨아들인 용아포는 서서히 우측으로 방향을 틀기까지 했다.
사마현의 눈이 번쩍였다.
‘어검술?!’
저토록 충만한 기운의 방향을 의지만으로 틀어 버린다.
이것은 어검의 깨달음이었다. 신들린 곡사가 장기라지만, 저 거대한 힘을 뒤틀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검의 깨달음이 필요했다.
‘이럴 수가.’
사마현은 다시 한번 묵비를 바라보았다.
한층 밝아진 세상, 묵비의 창백한 얼굴이 보였다.
왈칵!
쏟아 내는 핏물의 양이 심상치 않았다. 무리한 내공 소모에 아직 완전하지도 않은 어검술로 용아포를 뒤틀었기 때문이다.
사마현은 경이로움을 느꼈다.
‘천부의 재능이다. 성주가 왜 저 여자를 아끼는지 알겠어.’
그 철벽같던 산천단원들도 당황하는 게 보였다. 알 수 없는 말을 외치며 진형을 재점검하는데, 이전처럼 빈틈없는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었다.
사마현이 눈을 빛냈다.
묵비가 어둠을 걷어 주었으니, 빛 속에서 적을 암살하는 것은 그의 몫이었다.
훅!
끝까지 피독주를 물고 돌진한 그는 순식간에 적병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서걱! 서걱! 서걱!
단숨에 적병 다섯의 목이 날아갔다.
“암살자다! 암살자가 들어왔다!”
“진형을 더 조여라! 철혼마공(鐵魂魔功)을 끌어 올려!”
화아아악!
당황했지만 그래도 정예다. 순식간에 내부로 조여드는 그들의 움직임은 가히 예술이라 할 만했다.
‘빌어먹을.’
파바박!
서둘러 그들 사이에서 빠져나오던 사마현은 문득 예리한 살기를 느꼈다.
쩌저저정!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러 막아 낸 것은 바로 수전이었다. 용케 그의 움직임을 읽은 적병 몇 명이 수전을 날린 것이다.
‘어렵다.’
다섯씩 두 번, 총 열 명을 베고 돌아왔다. 족히 오십은 토막 낼 각오로 침투했는데, 천하제일살수의 자존심이 말이 아니었다.
그때였다.
‘……?’
사마현의 민감한 감각이 미세한 진동을 읽어 냈다.
‘뭐지?’
저 멀리 북쪽에서부터 누군가가 빠른 속도로 접근해 오고 있었다.
‘부대다. 기마 부대야.’
숫자는 알 수 없다. 적게 보면 이삼백, 크게 보면 일천에 이를 수도 있겠다.
당연히 용아철기단은 아니었다. 그들이 이곳에 오기 위해서는 적진을 돌파해야만 한다. 무엇보다 최후의 순간을 위해 대기하는 그들이 전략을 무시해 가며 이곳에 올 까닭이 없다.
답은 하나.
‘또 적인가.’
전투 중간중간 투입되어 암살을 행하고 빠지던 그였다. 적의 전력이 얼마나 되는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빌어먹을 놈들이군. 설마하니 기마까지 배로 실어서 왔어?’
훅!
서둘러 묵비 곁으로 다가온 사마현이 말했다.
“움직일 수 있나?”
“물론.”
“우측으로 빠져야겠다. 적의 부대가 또 오고 있어.”
“적이 아니야.”
“뭐?”
창백한 묵비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항상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고는 하지. 늦기는 하지만, 최악은 면하는 순간에 말이야.”
“무슨 소리지?”
그때였다.
아직 남은 녹색 연기 너머, 펄럭이는 깃발 하나가 사마현의 눈을 어지럽혔다.
‘의(義)……?’
묵비가 소리쳤다.
“너무 늦었잖아!”
동시에 기마 부대의 누군가가 엄청나게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저기다! 저기에서 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천둥처럼 커다란 목소리다. 그 목소리처럼 막강한 무공을 구사하는 자가 분명했다.
화아아아악!
녹색 연기를 피해 우회하여 모습을 드러내는 오백의 기마 부대.
놀랍게도 그들은 의정군이었다.
팽만호가 외쳤다.
“적진의 후방을 공략하면 되오?!”
“아니!”
묵비가 다시 한번 시위를 당겼다.
“독연을 다 날리면, 저 거북이 같은 놈들부터 작살을 내라! 그 후에 후방 공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