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11)
흑백무제 1313화(1312/1320)
1313화. 피에 젖은 영광 (13)
“좋구나.”
끝없이 펼쳐진 천하가 그곳에 있다.
남자의 얼굴은 감탄과 경이로 가득했다.
“얼마 만인가, 이 절경을 보는 것은.”
태산의 정상에 올라 세상을 굽어보는 이 기분을 뉘라서 알 것인가.
“여전하구나. 아니, 더 좋다. 등 뒤에는 불과 피가 만연하고 눈앞에는 끝없이 펼쳐진 푸름이 가득하다. 이 또한 음과 양이라면 지나치게 세속적인 비유일까.”
진정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사괴술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역시 태산 아래로 펼쳐진 풍경에 가슴이 벅차오른 것이다.
사실 풍경이라 해도 운해(雲海)가 가득하여 땅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래서 더 감탄하게 된다. 진정 천국(天國)에서 사는 사람들이나 볼 만한 광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사괴.”
“예, 교주님.”
“보이는가? 모든 일이 마무리되면 이곳에서 제(祭)를 지낼 것이다.”
“더할 나위 없는 신지(神地)이옵니다, 교주님.”
“하하하!”
쩌렁쩌렁한 웃음을 터트리니 온 산의 정기가 마치 그의 품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잠시 후.
“……?!”
거짓말처럼 웃음을 멈춘 그가 고개를 휙 돌렸다.
저 멀리 남쪽을 쏘아보는 그의 두 눈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핏발 선 그의 눈은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다.
“사괴.”
“예, 교주님.”
“사옥(邪玉)을 확인하라.”
심상치 않은 목소리다. 사괴술사는 서둘러 품에서 구슬을 꺼내 들었다.
“교주님. 사옥의 팔 할이 가득 찼사옵니다.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 사옥 말고, 저 남부의 사옥 말이다.”
사괴술사의 표정이 돌변했다.
재차 품을 뒤진 그의 손에 붉은 부적 세 장이 들렸다.
눈을 감은 사괴술사가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우우우우웅!
그의 손을 떠난 부적 세 장이 저절로 허공에 떠오르더니 부르르 떨려 왔다.
잠시 후.
파아악!
첫 번째 부적은 불에 타 사라지고, 두 번째 부적은 갈기갈기 찢겨 날아갔다.
사괴술사의 몸이 순식간에 식은땀으로 젖어 들었다. 주(呪)를 읊는 행위 자체가 극심한 기(氣)를 소모하는 것이다.
잠시 후.
푸스스.
마지막 세 번째 부적도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그 순간, 사괴술사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런!”
“내가 본 것이 정녕 맞는가?”
사괴술사의 얼굴에 공포가 드리워졌다.
“음황군이 보유한 사옥이…… 깨졌습니다.”
화아아아악!!
남자의 몸에서 엄청난 사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러자 정기로 가득한 태산 자락 전체에 어둠이 깔리는 듯했다. 수만 년간 쌓인 산의 정기마저 짓누를 정도로 그의 사기는 지독했다.
“커헉!”
초월적인 사기에 타격을 받은 것은 산만이 아니었다.
사괴술사는 물론 그 뒤에 시립한 호법사제들과 사왕, 그리고 호법장까지도 몸을 떨었다.
인간의 육신에 담아 둘 만한 힘이 아니었다. 그런 힘을 갈무리하고 있다가 일거에 폭발시키니, 온 천하가 핏빛으로 가득 물드는 것 같았다.
그런 와중에도 유일하게 냉정을 유지하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적흠이라는 청년이었다. 영음산에서도, 그리고 이곳에서도 인형처럼 반응하던 그 청년만이 이 사기의 폭풍 속에서 멀쩡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깨진 사옥에서 퍼진 기운이 주위를 멋대로 방황하고 있다.”
남자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설령 사옥이 깨졌다 한들 음(陰)의 유혼(幽魂)과 같은 성질이라면 가라앉아 일대를 잠식해 들어가야 마땅할 터, 한데도 끊임없이 움직인다. 마치 순환하는 대자연의 기처럼.”
“……!”
“정화되고 있는 것인가.”
사괴술사는 절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광옥과 화옥, 그리고 두 개의 사옥은 다시 구하기 힘든 신물(神物)이었다. 그 구슬들의 몸체를 만들기 위해 교룡(蛟龍)의 내단과 만년지주(萬年蜘蛛)의 실, 만년화리(萬年火鯉)의 비늘, 천정설옥(天晶雪玉) 네 개가 필요했다.
그 기물들을 모으는 데 걸린 시간만 삼백 년이다. 그리고 그 구슬들이 발동한 건 일 년 전이었다.
구슬들은 속세의 정기와 법술, 사술과 마공이학의 총화가 담긴 천하의 보물로,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물건 중 최초로 천리(天理)를 역행하는 힘을 지녔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흘러, 마침 자신의 대(代)에 역천사주(逆天四珠)가 완성됨을 안 사괴술사가 얼마나 감동하고 놀랐던가.
그러나 역천사주는 완성만 되었을 뿐, 그 어떤 기운도 빨아들이지 못했다.
별의별 시도를 다 해 봐도 무용지물. 나중엔 제조가 실패한 것은 아닌지 의심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대략 일 년여 전.
저 멀리 서쪽, 청해와 감숙 쪽 땅에서 붉은 마기(魔氣)가 천공으로 솟구쳤더랬다. 오직 사술과 마공이학을 연마한 술사만이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광경이었다.
그때부터 역천사주는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마치 머나먼 과거 사색광인에게 탈취당한 혈옥이 이제야 수명을 다한 듯, 그 대체제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운을 빨아들인 역천사주는 그 자체로 천리를 뒤집고 운명을 뒤바꾼다. 인간이 만들었지만, 인간의 손을 떠난 물건인 것이다. 그런 물건에 기를 주입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능력 밖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데 지금, 구슬이 깨져 버렸다.
그토록 놀라운 구슬이 깨졌다는 것도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구슬이 빨아들였던 기운이 그 자리를 벗어났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역천사주는 음의 정화이기도 했다. 음이란 양과 달리 고이는 성질을 지녔다. 한번 역천사주에 끌린 기운은 결코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즉, 교주의 말이 사실이라면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제가 호법사제들을 끌고 가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호법장이 나서서 말했지만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무시무시한 눈으로 남쪽을 바라볼 뿐.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렇군.”
귀신처럼 무서워진 그 얼굴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하늘이 개입한 것이었어.”
공포에 떨면서도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하늘이 개입했다니?
“역천사주는 그 이름답게 이승에 존재해선 안 될 기물. 억겁의 세월 간 단 한 번의 실수로 세상에 내버린 최초의 혈옥(血玉)의 존재는 하늘에게도 뼈에 사무친 후회로 남았을 터.”
“……?”
“더 이상의 실수는 하지 않겠다는 뜻인가.”
사괴술사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늘이건 뭐건, 자격이 되는 자가 없었다면 결코 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과연…… 영력만으로 반선의 경지에 오른 그자가 존재했기에 사옥도 깨질 수 있었던 것이로군.”
사괴술사는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교주님. 그것이 무슨……?”
“별것 아니다.”
후우우우웅.
태산을 어둠으로 물들였던 기운이 다시 갈무리되기 시작했다.
남자는 탄식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 경지에 오르고도 세상천지의 모든 깨달음을 손에 넣을 수는 없었다. 아직 얻어야 할 것들이 많다는 사실만 알았을 뿐. 하여 나는 살아서 신(神)이 되기를 원했지. 이승에 존재할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가 되고 싶었다.”
“…….”
“그리고 나의 목표는 달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삼백 년이다. 무려 삼백 년이야. ‘본래’의 내가 살았던 인생까지 합치면 곧 사백여 년을 바라보거늘, 그토록 오랜 시간 준비해 온 것들이 망가진다는 것은 저 하늘의 질시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남자의 눈이 서쪽으로 향했다.
머나먼 서쪽 끝이 아닌 바로 앞이다. 태산 바로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에 흥미와 분노가 서렸다.
“혈신의 업을 지닌 자가 대적자로서 다가오는 듯하니, 이 또한 하늘의 질시라고 봐야 하는지.”
“…….”
“그리고 그 대적자의 혼은 남부의 신인(神人)이 지닌 영력과 무척이나 닮았구나.”
남자는 돌연 폭소를 터트렸다.
“부모와 자식이 내 앞길을 막는가? 참으로 감당키 어려운 천명이로군.”
펄럭!
불어오는 바람이 그의 용포 자락을 화려하게 펄럭였다.
“좋다. 어차피 맞서야 할 대적자라면 닳고 닳은 이 육신이 허물어지기 전의 마지막 싸움으로 나쁘지 않겠지. 새 시대를 맞이할 새로운 그릇은 오직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들으며 천지만을 손에 쥘 것이다.”
남자가 소리쳤다.
“적흠과 호법장만이 나를 따르라! 저 웃기지도 않은 하늘이 부여한 대적자를 만나러 가겠다!”
“교, 교주님?!”
“사괴는 이곳에서 합주술(合珠術)을 준비토록 하라.”
사괴술사의 눈이 번쩍였다.
합주술. 역천사주를 하나로 합쳐 새로운 혈옥(血玉)으로 만드는 일.
사음교 역사상 최고의 대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나가 깨진 채로 말입니까?”
“하나가 깨졌기에 지금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태산의 정기를 끌어와 부서진 만큼의 기반을 대신 쌓도록 하라.”
사괴술사의 눈이 흔들렸다.
“채정마진(債精魔陣)으로 말입니까?”
“그렇다.”
남자가 호법사제들을 바라보았다.
“제물은 백여덟로 충분할 것이다.”
호법장이 외쳤다.
“신의 탄생에 거름이 될 것이다! 기쁘게 나서라!”
그러자 호법사제 모두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평생 쌓아 온 무공과 투지를 대륙 땅에 퍼트리지도 못했는데, 스스로 죽겠다고 나선 것이다.
남자가 흡족한 웃음을 흘리며 몸을 돌렸다.
“나머지는 남은 사옥을 채우도록 해라.”
그렇게 남자는 태산을 내려갔다.
시공을 초월하여 쫓아왔던 일생일대의 숙적을 만나기 위한 걸음이었다.
* * *
치리리링! 쾅! 쾅!
의정군과 산천단의 싸움은 격렬하기 그지없었다.
“빌어먹을! 이건 뭐 성벽을 두들기는 기분이군!”
산천단의 방어는 압권이었다.
기마 부대면서도 공성전까지 치른 의정군의 공격에도 절대 무너지지 않았다. 무너지지 않는 걸 넘어 사상자도 거의 없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방어력이었다. 방어력이 이 정도라면 공격력 역시 엄청날 터, 이곳을 지키라는 명령이 없었다면 의정군을 밀고 들어가 전장으로 뛰어들어 판세를 바꾸었을 것이다.
하지만 묵비는 그런 산천단의 능력에 감탄할 새가 없었다.
‘이건?!’
화아아아악!
언덕 위에서 치솟은 괴이한 기운이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사마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저게 뭐지?!”
유독 감각이 민감한 사마현은 묵비보다 더 섬세하게 느끼고 있었다.
뭔가 큰일이 벌어졌다. 싸움이 끝났음에도 연위의 기운은 남았으니 적장을 죽인 것이 분명했지만, 그 이후 폭발한 사기의 폭풍은 일대를 모조리 집어삼킬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묵비가 이를 악물었다.
“의정군! 사마현! 전선으로 후퇴해라!”
“누님! 누님은요!”
“연가주님을 모시고 갈 것이다! 지금 당장 퇴각해!”
“제기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오! 죽으려고 환장했소?!”
그때였다.
콰르르릉!!
폭음과 함께 언덕 일각이 무너져 내렸다.
갑작스러운 폭발에 모두가 놀라서 그곳을 바라보았다.
휘이이이이잉!
한 줄기 거센 바람과 함께 허공답보로 걸어오는 한 남자가 있었다.
연위였다. 오른손에는 제국검을, 왼손에는 잘린 단공의 수급을 들고 있는 그의 모습은 위풍당당 그 자체였다.
“적장을 죽였다. 모두에게 알리라.”
묵비의 눈이 격동으로 가득했다.
“아버님!”
연위가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이 전쟁은 우리가 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