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12)
흑백무제 1314화(1313/1320)
1314화. 피에 젖은 영광 (14)
단공의 죽음은 전장에 엄청난 충격을 전파했다.
유유자적 전선을 뚫고 적진 한복판으로 들어가 총사령관을 죽였다는 사실에 무림 병력의 사기는 폭발했고, 수장이 죽었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한 사음교의 사기는 완전히 쪼그라들었다.
수장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했다. 죽으면 병사들로 하여금 결사 항전을 벌이게 하는 수장이 있고,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져 싸움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수장이 있다.
단공 개인만 보면 명백히 전자의 장수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전쟁은 특별했다.
단공은 살아 있는 신, 사음교주에게 직접 전권을 위임받은 총사령관이었다. 그것은 교도들에게 있어 단공이 신의 대리자와 같은 위치의 수장임을 뜻했다.
신이 죽은 것은 아니지만, 신의 대리자가 적장에게 목이 베여 죽었다. 그것은 사음교도들에게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안겨 주었다.
절대적인 승리를 확신한, 신앙에 가까운 마음으로 참전한 성전(聖戰)에서 수장이 죽었다는 것.
그 사실이 사음교도들의 사기를 바닥까지 끌어내렸다. 충격도 그런 충격이 없을 것이다.
오사왕과 육사왕은 그런 교도들을 독려하며 끝까지 항전을 명령했지만, 이미 떨어진 사기를 두 사왕이라고 끌어올릴 수는 없었다.
무림 병력은 넘치는 사기로 사음교 병력을 동쪽으로 밀어 내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의정군과 연위, 묵비와 사마현이 절묘하게 합공하여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
하지만 산천단은 건재했으며, 한 번 밀렸다고는 해도 사음교 병력이 몰살을 당하지는 않았다. 수십 리를 밀린 그들은 후퇴하며 부대를 정비하려 했고, 무림 병력은 끝까지 그들을 따라잡아 포위하려 했다.
그 순간, 단향은 크나큰 결단을 내렸다.
정비조차 하지 못한 사음교 병력은 무림 병력이 포위하기도 전에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다시 배를 타고 도망칠 수도 없는 판국이니 흩어져서 적의 시선을 분산하고 다시 만나기로 한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 결단으로 인해 그들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애초에 강소성 지리에 익숙하지도 않았기에 기동성부터가 분산한 무림 병력과 비교가 안 되었다.
결국 수많은 부대가 몰살을 면치 못했고, 그 과정에서 육사왕 번요경이 투왕 양천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산천단과 오사왕 단향, 그리고 뇌영단 일부만이 살아남아 도주했으니 그야말로 대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단 하루 만에 결판이 나 버린 싸움, 수장을 직접 잡으러 간 연위의 결단이 빛을 발한 셈이었다.
승리의 함성이 강소성을 떠들썩하게 울렸다.
* * *
“그렇군.”
비천검주 비연상에게 보고를 받는 연위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내상 때문인지 충격적인 소식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반을 잃었는가.”
“예.”
비천검사들을 위시한 비응대, 창응대, 흑응대, 신응대.
자랑스러운 연가의 검사들이 이번 전쟁에서 무려 반이나 죽어 나갔다.
전체 병력을 생각하면 압승까지는 아니더라도 능히 대승이라 부를 일이겠지만, 한 가문의 가주로서 가원들을 반이나 잃었으니 어찌 웃을 수 있겠는가.
말없이 제국검을 내려다보는 연위를 향해, 비연상이 말했다.
“가주님께서 결단을 내리시지 않았다면 더 많은 검사가 죽었을 것입니다.”
“……그래, 그랬겠지.”
“그리고 저희 역시 수장을 잃을 뻔했지요.”
연위가 비연상을 올려다보았다.
언제나 무뚝뚝하던 비연상의 얼굴에도 서글픔과 분노가 엿보였다.
“가주님. 저희는 연가의 자랑스러운 검사들입니다. 그러나 수장을 어처구니없이 잃는 상황을 대비한 훈련은 해 본 적이 없습니다.”
“…….”
“성공해서 다행이지만, 다시는 그토록 무모한 싸움을 벌이시면 안 됩니다. 가주님께서는 연가의 심장입니다.”
“그래, 알겠네.”
비연상이 한숨을 쉬었다.
“현재 부마도위와 귀군이 남은 잔당을 추격하고 있습니다. 가주님은 묶어 둬서라도 나서지 못하게 하라는 엄명까지 내리셨지요.”
“…….”
“제가 검사들을 이끌고 추격대에 합류할 테니, 오늘은 푹 쉬십시오.”
“미안하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고, 가주님께선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비연상이 포권을 취했다.
“돌아와서 뵙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비연상은 막사를 나갔다.
홀로 남겨진 연위는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있어선 안 될 터인데.’
다른 누구도 아닌 양천이 절대 끼어들지 말라고 했다. 만약 그 말을 무시하고 추격대에 합류하면 양천에게 큰 폐가 될 것이다.
나아가, 실제로 그는 전투를 벌일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무리한 상단전 운용과 독한 내상 때문에 평소 실력의 삼 할도 내보이지 못할 것이다.
‘어쩔 수 없지.’
기량도 기량이지만,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움찔!
좌측 빗장뼈 부근에서 뭔가가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듯했다.
오른손으로 빗장뼈를 꾹 누른 연위의 이마에 식은땀이 어렸다.
‘지독하구나.’
침투한 음황사기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과거 양천 역시 음황사기에 중독되어 끊임없이 기량이 하락되었다고 했다.
거기까지면 괜찮았지만, 음황사기는 독기라 목숨의 위협까지 받았다고 했다. 만약 사음교주가 작정하고 죽이려 들었다면 진즉에 죽었을 거라는 말도 들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단공의 음황사기는 과연 대단했다. 그러나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우우웅!
연가신단이 회전하며 끊임없이 영력을 상처 부위로 보냈다.
신체 능력의 활성화. 음황사기가 몸에 독을 푸는 속도보다 영력이 망가진 곳을 회복시키는 속도가 미세하게 더 빠르다.
시간은 오래 걸리겠지만, 어떻게든 뽑아낼 수는 있을 것이다.
“후우.”
음황사기가 주요 혈도 몇 곳을 틀어막고 있기에 검극사기의 운용이 쉽지 않았다. 결국 자연스러운 축기로 천천히 내상을 손봐야 했다.
‘하기야, 이런 몸으로 함께한다 한들 폐나 끼치지 않으면 다행일 터.’
하지만 왜일까?
이렇게 있어선 안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추격에 나서고자 하는 의지가 대단해서는 아니었다. 그냥 이렇게 쉬기만 해선 안 된다는,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아버지.”
지쳤음에도 애써 힘을 내는 목소리.
연위의 눈이 번쩍였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래, 들어오너라.”
막사의 천이 열리고 연지평이 모습을 드러냈다.
연위의 눈이 흔들렸다.
물수건으로 닦았지만, 군데군데 피와 흙이 엉겨 붙은 연지평의 모습은 전장을 헤쳐 나온 장수 그 자체였다.
어느덧 이리 훌쩍 커 버린 것일까. 여린 마음에 유약해 보이던 외모는 어디로 갔는지, 건실하게 잘 큰 연가의 자식이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연위는 잘 큰 자식에 대한 뿌듯함보다 다치고 지친 자식에 대한 안타까움을 먼저 느꼈다.
“괜찮으냐?”
“물론입니다.”
조금 지쳤다느니 하는 말조차 없다. 든든한 미소와 함께 웃는 차남의 얼굴은 너무나도 맑았다.
“추격대에 끼려 했는데, 비천검주님께서 아버지와 함께 있으라고 하더군요. 저 역시 그게 더 나을 것 같아 남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냐.”
“예.”
가만히 연지평을 바라보던 연위가 침상 옆을 두들겼다.
“이리 앉거라.”
연지평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연위 옆에 앉았다.
잠시 말이 없어진 두 사람.
먼저 입을 연 것은 연위였다.
“네가 요만했을 때 말이다.”
연위가 손을 들었다.
대여섯 살쯤 됐을 법한 어린아이의 키를 가리키는 그의 모습에선 사람 냄새가 났다.
“처음으로 이 애비에게 화를 냈더랬다. 기억하느냐?”
“제가요?”
“그래.”
“기억이 잘…….”
“그랬겠지. 나도 놀랐다. 그렇게 순하고 착하던 아이가 눈을 치켜뜨고 소리를 빽빽 질러 댔으니.”
“제가 왜 화를 냈습니까?”
“내가 지나친 수련으로 내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아…….”
“네 어미가 그리 가고, 애비는 하루하루를 미친 듯이 치열하게 살았다. 가문을 위해 잠을 줄였고 검사로서의 기량을 위해 광인처럼 검을 휘둘렀지. 하지만 내공으로도 피로를 억누를 수는 없는 법, 기어이 쓰러지고야 말았다.”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쓰러진 나를 향해 소리치는 너를 보며, 애비는 크게 놀랐다. 마치 네 어미가 너의 모습을 빌려 이 못난 아비를 향해 호통을 치는 듯했어.”
“그러셨습니까.”
“이후, 한 번도 쓰러질 때까지 스스로를 몰아붙인 적은 없었다. 극도로 피곤해지면 반드시 휴식을 취했지.”
“다행입니다.”
자신의 옛날이야기는 처음 듣는다. 연지평은 괜스레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렇게 아비를 걱정하던 어린아이가 이제는 다 커서 검을 휘두르는구나. 참으로 대견하다.”
이번에도 연지평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불현듯 연위는 깨달았다.
이미 한 번 했던 말이지만, 지금이야말로 확정을 지어야만 한다는 걸.
그는 자신의 직감을 따라 말했다.
“괜찮겠느냐?”
“예?”
“가주라는 자리는 힘들고 무거운 것이다.”
“……?!”
“자신의 인생을 자유롭게 살 수 없지. 하루하루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고, 무인으로서의 기량을 키우기 위한 수련은 뒷전이 될 때도 있다.”
“……아버지.”
“본가는 다른 가문에 비해 힘도 없다. 권세를 누리기에는 돈도 많지 않아. 알다시피 민초들을 위해 매년 큰돈을 쓴다. 사치도 못 하고 네 시간도 없는 와중에 책임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괜찮겠느냐?”
연지평이 쓴웃음을 흘렸다.
“아버지께서는 수십 년을 하신 일이고, 형님은 가업만큼이나 힘든 일을 저보다 어린 나이에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흑도 연맹의 수장이 되어 전쟁을 주도하고 있지요.”
“…….”
“제가 힘들어 봤자 두 분만 하겠습니까.”
“허허허.”
다른 걸 떠나, 가주라는 자리가 권력을 휘두르는 자리가 아닌 오직 힘들 뿐인 자리라는 것을 잘 아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인품과 재능이 뛰어난 아이다. 이런 아이라면 가문을 이끌어 가기에 부족함이 없을 터, 장남 역시 옆에서 도와줄 테니 어쩌면 연가 역사상 최고의 성세를 누릴지도 모르겠다.
“전에도 말했지만 소가주는 너다. 다만, 소가주랍시고 어깨에 힘을 줄 필요는 없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해 나가면 된다.”
“알겠습니다.”
천하에서 가장 안정적이고 부드러운 승계였다. 연위는 한결 마음이 놓이는 것을 느꼈다.
“가르칠 만한 건 다 가르쳤지만, 선대의 깨달음을 잇는 것도 당대 가주의 책임이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네게 아비의 깨달음을 전수해 줄 것이다. 꽤 위험한 무공들이니,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것인지, 연지평이 물었다.
“한데 형님은 어땠습니까?”
“음?”
“아버지께서 내상으로 쓰러지셨을 때 말입니다.”
“아, 그때 말이냐.”
연위는 웃으며 막사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안 했다.”
“그렇습니까?”
“너처럼 울고불고 난리를 치지도 않았고 다가와서 손을 잡아 주지도 않았지. 다만…….”
“……?”
“한밤중 인기척이 느껴져 문을 열고 나가 보니 잘 손질된 작은 하수오가 하나 놓여 있었다. 내상에 하수오가 좋다는 의원 말을 듣고 직접 산에서 하수오를 캐 온 것이지.”
연지평도 미소를 지었다.
“왜 의원에게 가져다주지 않았을까요?”
“들어 보니 의원에게 가져다주었다고 했다. 하지만 의원이 잘 씻은 하수오를 생으로 먹는 것이 더 좋을 거라고 말해 줬다더구나.”
“정말 그랬습니까?”
“그럴 리가. 생으로 씹어 먹느니 약재를 첨가해 탕약으로 먹는 게 낫지.”
“아?”
“내가 호정의 마음을 알아주길 원했던 모양이다. 네 형은 언제나 애비에게 티를 내지 않았다. 애비를 무서워했거든.”
“…….”
“그래도 걱정스러운 마음에 직접 하수오를 캐 왔지.”
“형님답네요.”
“그래, 참으로 네 형다운 행동이었다. 그래서 네 형이 보고 싶다. 솔직하게 표현하는 너만큼이나 착한 네 형이.”
연위는 눈을 감았다.
“지금은 또 얼마나 고생하고 있을는지, 만나면 또 무슨 얼굴로 별거 아니었다고 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