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13)
흑백무제 1315화(1314/1320)
1315화. 하늘이 내린 숙적 (1)
“…….”
연호정은 고요한 눈으로 저 멀리 우뚝 선 산을 바라보았다.
“태산이군요.”
허백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산동의 정보처를 뒤지고 오겠습니다.”
“되었네.”
“예?”
“우리가 이곳으로 오는 동안 이쪽 흑도 정보원들이 한 명도 접근하지 않았어. 그들 역시 정체불명의 적들에게 당한 것이다.”
“…….”
“전부 당한 건 아니더라도 정보 체계가 깨졌음은 분명하다. 지금 가서 그들을 볶는다 한들, 얻을 수 있는 게 없을 것이다.”
허백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호정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호종대주.”
“예, 성주님.”
“호위들을 쉬게 하게. 나도 좀 쉬어야겠네.”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산동의 대란을 막기 위해 그 먼 길을 달려왔으면서, 정작 격전지라 할 만한 곳에 도착해 휴식을 취한다.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평소 연호정의 성격을 생각하면 의아한 일이었다.
의문을 표하는 허백과 달리 한중명의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명을 받듭니다.”
그가 대원들에게 말했다.
“쉼터를 준비하라. 이 조원들은 요깃거리를 구해 오도록 해라.”
일사불란한 움직임이었다.
연호정은 평평한 바위에 광룡부를 내려놓고는 그 옆에 올라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저기다.’
태산이 보였다.
웅혼하고 신비로운 산. 중원오악(中原五嶽)의 으뜸으로 칭송받는 천하 명산의 정기가 고요하게 존재감을 알렸다.
‘이제 알겠다. 왜 내가 이곳에 왔는지, 왜 자꾸 이곳에 위화감을 느끼는지.’
하늘의 뜻인가, 혹은 운명인가.
숙명인가, 우연인가, 그도 아니면 지독한 악연일 뿐인가.
츠츠츠.
한없이 무겁고 깊은 정기를 발하는 태산 정상 부근에서 알 수 없는 마기가 느껴졌다.
수천, 수만 년간 쌓이고 정제된 태산의 정기는 그 자체로 선기(仙氣)에 가까웠다. 한데 그 무거운 선기가 미세하게, 아주 조금씩 꿈틀거리며 사라지고 있었다.
‘뭔가를 하고 있군.’
직감적으로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저곳으로 오를 필요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우우웅.
연호정의 눈에도 태산처럼 맑은 정기가 어렸다.
이상하게도 분노가 치솟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격정에 몸이 떨리지도 않았다.
그저 한없이 차분하고 냉정했다.
황룡신왕공 덕분이 아니었다. 연호정이라는 사람 자체의 감정이, 상태가 그러했다.
스스로도 신기하게 여겨질 만큼의 여유.
연호정은 눈을 감았다.
‘이상해.’
자연스레 손을 올려 가슴 부근을 짚었다.
심장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두근거리는 진동이 손에 선명했다.
‘이렇게까지 차분해도 되나.’
오히려 심장 박동이 더 느려진 것 같았다.
반대로 전신의 감각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오감을 넘어선 육감까지 바늘처럼 뾰족하고 촘촘하게 곤두섰다.
세상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을 것 같았고, 감각에 잡히는 모든 것에 관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가능하진 않겠지만, 저 하늘에서 쏟아지는 천기(天氣)를 느끼며 당장이라도 날아올라 자유로이 비행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뭐가 됐든 다행이다.’
연호정은 희대의 난적과 조우하기 전, 호승심에 타오르기보다 다행이란 생각부터 했다.
만약 이곳에 있는 자가, 혹은 자들이 강소성 동해 쪽에서 나타났다면 정말 큰일이 났을 것이다.
물론 그에 대비하여 흑제성 병력에 명을 내려 두었다.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면 전쟁을 벌이되, 감당할 수 없는 전력이 나오면 흑도답게 퇴각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러나 퇴각을 명했다 한들, 싸워 보지도 않고 물러날 리가 없다. 어쨌거나 강소 무림의 맹주는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테니, 대책 없이 후퇴하진 않았을 것이다.
‘북부에는 나타나지 않았지. 그래서 마음이 급했다만, 어차피 이렇게 만나게 될 운명이었다면 나도 지금 이 순간에만 집중할 수 있겠어.’
우우우웅.
중단전에 똬리를 튼 황룡이 고요히 울부짖었다.
중단전의 거대한 밭은 황룡이 거하는 호수다. 그 호수의 물은 놀랍도록 투명했다. 깊이는 이전과 같았지만, 투명함의 정도가 달랐다.
‘먼지 하나 내려앉지 않은 것 같군.’
황룡의 울음은 긴장의 울음이었으나, 동시에 만족의 울음이기도 했다.
문득 연호정은 스스로에게 집중해 보고 싶어졌다.
그럴 때가 아니지만, 그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다.
훅.
갑작스레 몸이 만분의 일, 십만분의 일로 작아진 것 같았다.
까마득한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더니, 어느새 그는 기억이 붙잡고 있던 과거로 돌아갔다.
‘어?’
자신의 상태와 마음을 관조하기 위해 집중했는데 어느새 먼 과거의 어느 날로 돌아왔다.
자연스레 보이는 영상.
거대해진 상단전이 마치 지금의 그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섬세하고도 선명한 영상을 보여 주었다.
“어머, 방금 보셨어요?”
“으응?”
“호정이 웃었어요!”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기억 속 한 장면, 마치 제삼자로서 그 자리에 있기라도 한 양 단란하고 행복한 가족의 모습이 보였다.
‘어머니.’
그렇다.
그곳에는 어머니가 있었다. 산후에 아직 회복이 덜 되었는지 초췌한 모습이지만, 아름다운 얼굴 위에 걸린 환한 미소가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그런 어머니가 강보에 싸인 아기를 안고 있었다.
“잘 봐요! 이놈, 이놈.”
어머니가 아기의 볼을 쿡쿡 찔렀다.
그러자 아기가 크게 웃었다. 이빨 하나도 나지 않은, 성인 남성 팔뚝만 한 아기가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끔뻑이며 웃었다.
“봐요! 웃었지요?”
“하하하!”
지금보다 훨씬 젊은 사내가 손뼉을 치며 웃었다.
‘아버지.’
지금처럼 정갈하게 다듬은 수염도 없다. 매끈한 턱선과 주름 하나 없는 얼굴은 너무나도 잘생겼다.
“한번 만져 보세요. 어서요.”
“어? 그, 그래도 되겠소?”
어머니가 푸핫! 소리를 내며 웃었다. 단아한 얼굴과는 달리 웃음소리며 말투며 장난기가 넘쳤다.
“당신 아들인데 안 될 게 뭐가 있어요?”
“하, 하지만 내 손이…….”
아버지가 난처한 얼굴로 손을 들었다. 오랜 시간 검을 연마하며 굳은살이 박인 손은 무척이나 거칠어 보였다.
“저 여린 살을 쓰다듬었다간 다칠 게 뻔하잖소.”
“누가 쓰다듬으래요? 안아 보라고요.”
“어? 아, 그래. 그러면 되겠군.”
지금의 아버지와는 구만리쯤 떨어진 언행이다.
다급히 따뜻한 물에 손을 벅벅 씻고는 매무시를 정갈히 하며 심호흡까지 해 댄다. 푼수도 그런 푼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눈살을 찌푸렸다.
“생사대적을 상대로 마지막 일검이라도 날리나요? 왜 그렇게 긴장해요?”
“나, 긴장 안 했소.”
“목소리가 다 갈라지는데.”
“물을 못 먹어서 그렇소. 잠시만 기다려 보시오. 일단 목부터 축이고…….”
“주책 그만 떨고 어서 안아 봐요.”
“커허험!”
아버지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아기를 안았다.
으아앙!
갑자기 아기가 울음을 터트렸다.
아버지는 그야말로 사색이 되었다. 난처함, 당황스러움은 다 건너뛰고 당장이라도 숨이 멎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여, 여보!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
“그렇게 딱딱하게 안으니까 애가 울죠! 몸에 힘 좀 빼요. 가내 검사들한테는 탈력이니 뭐니 말만 잘하면서 왜 그렇게 몸이 굳었어요?”
“으으음.”
아기의 울음이 점점 커졌다.
아버지는 어색한 동작으로 아기를 토닥였다. 몸에 힘을 빼면 아기를 떨어트릴 수 있다며 목석 같은 동작으로 흔들어 댔다.
아기는 더 울었고, 결국 어머니는 혀를 차며 아기를 받아 들었다.
아기가 금세 울음을 멈추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던 아버지가 이내 툴툴거렸다.
“아비는 안중에도 없구먼. 어미가 좋은 게지.”
“가서 체조라도 하고 오세요. 그렇게 안으면 어떤 아기라도 울어요.”
“힘 풀면 떨어진다니까.”
“손가락 끝으로 철구도 세우는 양반이 힘 좀 뺀다고 무슨 애를 떨어트려요. 당신, 진짜 웃긴 거 알아요?”
“혹시 모르잖소.”
“뒤통수로 날아오는 암기도 피하잖아요. 떨어지면 받아 내면 되지.”
“여보! 말이 심하잖소! 애가 떨어진다는데 그 무슨 태평한!”
“주책 그만 떨고 가서 물이나 받아 와욧!”
빽 소리를 지르는 어머니의 얼굴에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가득했다.
아버지는 구시렁거리며 방을 나섰다. 나서면서도 몇 번이나 아기를 돌아보는데, 그 얼굴에 흐뭇함과 애정이 가득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런 기억도 있었군.’
사람은 클수록 아기 때의 기억을 잃어 간다고 했다.
하지만 상단전을 극도로 연마한 연호정은 잊었던 과거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다.
‘어머니.’
기억 속의 어머니는, 정말이지 그가 봐 온 어떤 여자보다도 아름답고 품격이 넘쳤다.
그렇게 아름다운데도 포근함이 있다. 지평이 태어나기 전보다 더 젊은 어머니와 천하 어딜 가도 기린아 소리를 들을 만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두 분의 자식이란 사실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연호정은 문득 어머니의 손을 잡고 싶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이곳은 기억 속의 과거였다. 극한의 영력으로 과거를 엿보고 있지만, 과거이기에 바꿀 수가 없다. 어머니가 자신에게 반응한다면 그것은 기억이 아니라 단순한 공상일 뿐이리라.
‘어머니. 어머니.’
연호정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니, 사방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마님!”
“으흐흑! 마님!”
“주모(主母)!”
검사며 하인이며 할 것 없이 모두가 엎드려 통곡하고 있었다.
비가 오진 않았지만 하늘은 어두웠다.
그 어두운 하늘 아래, 수의를 입은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를 텅 빈 눈으로 바라보는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 뒤에는 눈을 동그랗게 뜬 자신이 있었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인지하지 못하는 세 살배기 어린아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갓난아이인 지평을 안은 채 눈물을 흘리는 유모가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이구나.’
연호정은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평을 낳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얼굴은 놀랍게도 온화함만이 가득했다.
본인이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데도 한 점 후회 없는 얼굴이었다. 오히려 행복해 보이기도 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자식들을 위해 쏟아부었으니 그것으로 만족하신 것일까?
연호정은 서글픔을 느꼈다.
뜻밖에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도 울지 않았다. 이제는 수염을 기르기 시작한 아버지의 두 눈은 공허했지만, 자세는 올곧았다.
연호정은 알 수 있었다. 모두가 보고 있기에 겉으로 울진 않지만, 아버지의 가슴은 통곡으로 가득했다.
스르르.
기억이 조금씩 빨라졌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냉정하고 과묵해졌다. 하루에 한 마디도 하지 않은 날도 많았다.
그렇게 흘러 흘러 또 어느 날이 되었다.
‘어?’
연호정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드리워졌다.
흙이 덕지덕지 묻은 하수오를 안고 의원을 향해 뛰어가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어? 대공자님?”
“헉헉! 이거죠?”
“예? 어? 이거 하수오 아닙니까?”
“이거면 아버지도 낫겠죠? 그렇죠?”
맑게 웃는 자신의 모습이 참으로 낯설다.
멍하니 자신을 보던 의원이 이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면 충분합니다. 대공자님께서 큰일을 하셨군요.”
“헤헤.”
“다만, 탕약이 이미 완성된 터라 하수오로 다시 만들려면 시간이 걸리겠습니다. 차라리 잘 씻어서 생으로 드시는 게 나을 텐데, 제가 바쁘니 대공자님께서 대신 해 주시겠습니까?”
“네! 그럼요! 먹기 좋게 자르면 되죠?”
“하하하, 그렇습니다.”
활짝 웃는 자신의 얼굴이 또 흐릿해졌다.
그리고.
어둠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