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14)
흑백무제 1316화(1315/1320)
1316화. 하늘이 내린 숙적 (2)
“크아아악!”
“아악!”
사방에 비명과 불길이 가득했다.
지옥도가 따로 없었다. 가족과도 같았던 무사들과 하인들이 무더기로 죽어 나가고 있었다.
복면을 쓴 괴인들의 침입, 그리고 혈사.
가문이 무너지고 있었다.
“가주님! 적들이 내원까지 침입했습니다! 현재 비천검사들을 호출했지만, 최소한 이각은 걸릴 듯합니다!”
“막게.”
멸문의 위기 속에서도 아버지는 차분했다.
창밖으로 충천하는 화광이 눈을 어지럽히고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이 귀를 찢을 듯했다.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가문의 멸망. 자신과 동생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오늘 자칫하면 연씨 본가의 핏줄들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걸.
아버지가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들리느냐?”
“…….”
“보이느냐?”
“……예.”
지평은 대답했고, 자신은 침묵했다.
입이 쉽게 열리지 않았다. 동생을 향한 자격지심과 아버지를 향한 원망이 그를 망나니로 만들었다. 망나니가 된 그는 사소한 것에도 마음이 흔들리는 바보가 되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마음이 차분했다.
다른 날이라면 몰라도 이런 위험한 순간마저 멍청한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가족 같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때라서 더더욱 그러했다.
그것이 연씨의 피였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연가의 역사가 오늘 끊어질 수도 있다.”
아버지는 희망 어린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엄격하고 냉정한 말투였다. 그래서일까? 자신은 물론 지평의 얼굴에도 명확한 각오가 섰다.
“지금 너희 수준으로는 저들과 대적할 수 없다. 설령 대적하더라도 본가의 맥을 이어야 할 너희를 이곳에 둘 수는 없다.”
지평이 외쳤다.
“아버지! 저는 남겠습니다!”
“…….”
“가문은 형님이 이을 겁니다! 형님은 반드시 가문을 재건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제가 이곳에 남아 형님 몫까지 싸우겠습니다!”
자신은 눈을 감고 있었다.
지평은 알고 있을까? 지금 본인이 한 말 자체가 멸문을 전제로 한 발언이라는 것을.
피할 수 없는 멸망이라지만, 스스로 희망을 버렸다. 그만큼 상황이 나쁘기도 했다.
아버지가 고개를 저었다.
“호정은 능히 본가를 바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말에 기억 속 자신이 눈을 번쩍 떴다.
“그러나 호정 혼자서 이 험한 무림을 헤쳐 가기는 힘들 것이다. 지평, 너는 더더욱 그러하다. 둘은 형제이고 형제는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 줄 수 있다. 내게는 그런 형제가 없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바라보았다.
“호정.”
“예, 아버지.”
“괜찮구나.”
“예?”
그때의 순간을 기억한다.
아버지는 여전히 웃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은 아버지가 웃었다고 생각했다.
겉으로 웃는 것보다 더한 흡족함이 마음 안에 있다. 연호정은 그 마음을, 어쩐 일인지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오랜 시간 방황했음을 안다. 나는 그런 너를 방기했다. 나는 네가 다시 이를 악물고 날아오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
“그렇다 하여, 그간 네가 겪었을 섭섭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겠지.”
“…….”
“바라지도 않겠지만, 나는 너에게 사과하지 않겠다.”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말하는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를 보는 자신의 눈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그야말로 온갖 감정을 다 느끼고 있는 것이다.
으아아악!
또다시, 끔찍한 비명이 들렸다.
아버지의 얼굴에 엄기(嚴氣)가 치솟았다.
“본가는 중원 전통의 검가(劍家)로서, 무림의 무수한 유파가 저마다의 검리(劍理)를 발전시킨 것과 달리 원형 그 자체로 발전시킨 유일무이한 무림세가다.”
콰드득! 퍼어엉!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 발경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긴박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어떻게든 막아 내고 있는 것 같았다. 검사들이 외치는 항전의 기합이 굉음과 사기를 덮었다.
“검리(劍理)는 너희에게 가르친 무공에도 녹아 있다. 그래서 검의 형(形)이 소실될 것을 염려하지는 않는다. 매진하고 또 매진하면 그 안에서 연가의 검이 모습을 드러낼 터. 그러나 내공심법은 다르다.”
스륵.
아버지가 보자기 두 개를 건넸다.
“본가의 오대신공이 담긴 비급서들이다.”
“……!”
“호정에게 준 것은 원본, 지평에게 준 것은 필사본이다.”
우우우웅!
아버지의 두 눈이 무서운 광채를 발했다.
“가주실 후원에 비밀 통로가 있다. 신응대주가 너희를 호위할 것인즉, 그곳으로 도망쳐라.”
“아버지!”
“오대신공의 비급을 둘로 나눈 이유를 생각해라. 만에 하나 둘 중 하나가 죽더라도 본가의 명맥이 끊어져서는 아니 된다.”
자식들에게 그런 말을 하기란 참으로 힘들었을 것이다.
자식 중 하나가 죽는다? 세상 어떤 고문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픔이다. 그런 말을 담담하게 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제 가라.”
스르릉.
검을 뽑아 든 아버지의 몸에서 결사의 기세가 피어올랐다.
콰아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무서운 살기가 들이닥쳤다. 기어이 내전이 뚫리고야 만 것이다.
“저놈들을 막은 후 너희를 뒤쫓아 가겠다! 어서 가라!”
자신과 지평이 이를 악물고 자리를 벗어났다.
“잡아라!”
“연가의 가주다!”
쿠르르릉! 콰아앙!
천지가 진동하는 굉음과 함께 복면인들의 몸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멸문의 위기에 분노한 가주의 검법은 실로 무적이다. 무서운 살기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철검대연이 적도들을 격파하고, 이후 자연스레 아수라팔검으로 이어지는 아버지의 몸놀림은 지옥의 사신 그 자체였다.
‘지평.’
비밀 통로로 빠져나가는 그때, 기습을 당했다.
자신은 어서 빠져나가자고 했고, 지평은 자신을 따르다가 이내 몸을 돌려 싸웠다. 싸우기 전 횃불에 비급서를 던진 걸 보면 이미 죽음을 각오한 듯했다.
자신은 지평의 죽음을 바라보았다.
칠공으로 피를 토하면서도 당당하게 적을 노려보는 지평의 모습은 천하 모든 무인이 본받아야 마땅할 무신(武神)의 그것이었다.
반면 자신은?
‘비참하구나.’
눈물을 흘리며 도주했다. 가문이 불타는 것을 보면서도 이를 악물고 달렸다.
그때 자신의 감정이 어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갓난아기 시절의 기억도 떠올릴 수 있었는데, 저 때의 감정만큼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아마 두려움이 컸을 것이다. 망나니 시절의 자신을 생각하면 오줌이라도 지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랄까.
그러면서도 두 눈에 살기가 가득한 걸 보면, 그래도 연가의 피를 잇기는 이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정처 없이 산길을 헤매다가 마침내 그분을 만났다.
만신창이가 된 자신을 향해, 살아갈 의욕을 잃고 무릎 꿇은 자신을 향해 일갈하는 그분을.
“재미있는 눈빛이군.”
재미있다 하면서도 웃지를 않는다. 말투도 지극히 딱딱했다.
“공허, 후회, 슬픔, 분노, 체념…… 한 인간의 감정이 이렇게까지 똘똘 뭉친 눈빛은 정말 오랜만이다.”
“…….”
“말도 할 수 없는가.”
“…….”
“그래, 너는 입으로 말하지 않는구나.”
그분이 미소를 지었다.
정확히는, 미소를 지은 것 같았다. 평생 웃어 보지 않은 사람처럼 웃음이 어색했다.
“마치 세상 공기를 처음 맡은 아기처럼 온몸으로 표현한다. 아기는 생의 기쁨 속에서 공포를 느끼지만, 너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불같은 한과 생을 향한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
“그리고 그 안에, 너조차도 모르고 있던 한 줄기 정기(正氣)를 품었다.”
그분이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자신과 눈을 마주치며 손을 뻗는 그분의 모습은 숭고해 보이기까지 했다.
“살아갈 목적을 잃었는데도 살고자 하는 그 짐승 같은 본능. 짐승의 본능만 남은 상황에서도 결코 놓지 않은 한과 정기. 어쩌면 오늘 너와의 만남이 천하의 운명을 바꿔 놓을지도 모르겠다.”
“…….”
“따르겠느냐?”
자신은 홀린 듯 그분의 손을 잡았다.
그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전쟁이요, 분노이자 광기 그 자체다. 도적이 들끓는 세상 속 폭정에 신음하는 민초들이 겪는 삶과 꼭 닮았구나.”
“…….”
“동란의 시기, 수많은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게 죽어 나갔다. 그런 세상을 종결시키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하여 만인의 빛이 되었던 무장이 있으니, 너의 천품이 실로 그와 같다.”
“…….”
“오랜 시간을 떠돌아, 이곳에서 마침내 천리(天理)가 이어 준 남자를 만났다. 너에게 남은 나의 운명을 걸어 보리라.”
그때였다.
‘어?’
연호정은 깜짝 놀랐다.
스승의 몸에서 흐릿한 금빛 기운이 치솟았다. 그리고 그 기운은 자신의 몸으로 서서히 스며들고 있었다.
‘황룡?!’
스승님이 몸을 일으켰다.
“나를 따른다면 세상과 맞설 힘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앞으로의 인생이 지독히도 고통스러워질 터.”
“…….”
“그 고통과 좌절을 이겨 내고 정점에 오른다면, 비로소 너는 천하무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천하무적.
드넓은 천하에 적수가 없음을 뜻하는, 유치하면서도 피가 끓을 수밖에 없는 그 말.
“그러나 나는 네가 천하무적이 되기보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또 기억이 멀어졌다. 아득한 어둠만이 그를 감쌌다.
그때였다.
“성주님.”
번쩍!
눈을 뜬 연호정이 옆을 바라보았다.
한중명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주님. 괜찮으십니까?”
“호종대주.”
“한나절이 넘도록 이러고 계셨습니다.”
“한나절? 벌써?”
하늘을 보니 벌써 새벽이다. 밤이 다 지나간 것이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갑자기 눈물을 흘리시기에.”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눈가를 훔쳤다.
한중명의 말대로였다. 그의 눈과 볼을 적신 것은 분명 눈물이었다.
‘왜 눈물을 흘렸을까.’
알 수 없다.
아니, 그것보다는 벌써 한나절이나 지났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기억의 흐름을 생각하면 이제 이각이나 지났을 것 같은데.
“잘들 쉬었나?”
“예.”
그럴 리가 없다. 혹시 무슨 일이 터지지 않을까 싶어 교대로 번을 선 호종대원들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피로가 가득했다.
연호정은 괜스레 미안했다. 물론 그것을 표현하지는 않았다.
“일단 뭐라도 좀 드시지요. 요깃거리를 준비했습니다.”
그때였다.
고개를 끄덕이려던 연호정은 불현듯 느껴지는 기세에 태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 밥은 나중에 먹도록 하지.”
“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연호정이 광룡부를 들었다.
그 순간, 한중명의 눈이 빛났다.
“전원 성주님을 호위하라.”
“그러지 않아도 된다.”
연호정이 그들을 제지했다.
“이것은 나의 싸움이다. 너희는 참관자로 충분해.”
“하, 하지만 성주님!”
“그리고…… 너희로는 절대 못 막을 상대다. 어쩌면 천하 누구도 막을 수 없을지도 모르지.”
그는 여전히 담담했다.
담담한 와중에 등골을 타고 흐르는 강한 긴장을 느꼈다.
후우우웅.
옅은 안개를 헤치고 다가오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그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연호정의 몸은 뜨거운 열기로 휩싸였다. 더 이상은 담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화아아악!
꿈틀거리던 안개가 의지를 지닌 것처럼 연호정과 호종대를 향해 밀려왔다.
연호정이 광룡부를 휘둘렀다.
후웅!
휘두르는 도끼 끝에 황룡기가 서리니, 음습한 안개가 씻은 듯 사라졌다.
그리고 그 너머.
수년 만에 보는, 반드시 봐야만 했던, 동시에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던 단 한 명의 숙적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