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16)
흑백무제 1318화(1317/1320)
1318화. 하늘이 내린 숙적 (4)
“사문향.”
투명한 눈으로 사문향을 보는 연호정의 얼굴은, 그 스스로도 믿기 힘들 만큼 여유가 넘쳤다.
남자, 사문향의 얼굴에 한 줄기 의아함이 일었다.
“나를 아는가.”
“알지.”
안다.
알고, 알고, 또 안다.
동시에 모르고, 또 모르며, 모호하고 의문스럽다.
상대로 하여금 모순밖에 느끼지 못하게 하는 존재. 극에 이른 증오와 분노가 느껴지면서도 묘하게 반갑기까지 한 이 기분은 필설로 형용하기 힘들었다.
‘그렇군.’
그제야 연호정은 깨달았다. 왜 자신이 이렇게까지 담담한 것인지.
진짜 여유가 있어서도, 담담해서도 아니었다. 상대방에게 아무 감정을 느끼지 못해서도 아니었다.
‘극에 이르렀군.’
분노, 증오, 후회, 슬픔, 여한, 절망.
기쁨, 감동, 경이, 감탄, 열망, 쾌락.
어느 감정 하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극에 이르러 도리어 균형을 이루었다.
광혈교주와의 격전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고, 이후 또 전쟁터로 향하며 황룡이 발전했으며, 이곳 태산 앞에서 상대를 기다리며 과거를 돌아봄에 잊고 있던 부동심마저 거머쥐었다.
심신과 진기, 영혼 모든 부분이 지금의 그로선 더 이상 오르기 힘든 영역까지 치달았다.
하지만 그러한 상태와 감정은 별개였다.
회귀 후, 아니 전생까지 포함하여 가장 강하고 완벽한 상태가 바로 지금이다.
동시에 형용할 수 없는 모든 감정이 극에 이른 것도 바로 지금이다.
이제는 진정 완전(完全)이라는 표현을 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 이상의 경지에 오르려면 완전인 채로 더 상승할 수밖에 없다. 그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연호정도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어쨌거나 그는 완전하고 완벽했다.
하늘이 내린 숙적을 맞이하기에 한 점 부족함이 없었다.
연호정이 광룡부로 사문향을 겨누었다.
우우우우웅.
광룡부가 고요하게 울었다.
일생일대의 난적을 맞이하여 어느 때보다 크게 울음을 토해 낼 것 같은데, 정작 그 떨림은 크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고요한 격정을 토해 내는 광룡부.
사문향의 눈이 깊어졌다.
“……묘하군.”
치리링.
반지들끼리 부딪치며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이상해. 나는 네 녀석을 본 적이 없는데도 무척이나 친숙한 기분이 든다.”
“…….”
“천기(天機)의 틈새로 보였던 숙적을 맞이했기 때문일까? 언제고 한 번 본 적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
나른한 목소리에 강한 호기심이 묻어난다.
동시에 연호정을 향한 일말의 호의도 있었다. 그 호의는 즐거움에 기인했고, 그가 즐거움을 느끼는 이유는 고독감이 깨졌기 때문이었다.
오랜 세월 이승을 배회하며 적수다운 적수를 만난 적이 얼마이던가. 백 년 단위의 삶이 이어질 때마다 그는 무섭게 강해졌고, 공력은 상상 초월의 경지를 엿보고 있었다.
그런 그가 수백 년 만에 천적(天敵)을 만났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일생의 목표, 혈신 강림(血神降臨)을 위해 인고의 세월을 보냈으니 앞길을 막는 숙적의 존재가 달가울 리 없음에도, 지루하고 고독한 인생에 흠집을 내 줄 만한 존재를 만나니 자연 흥미를 느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사문향을 보며, 연호정은 생각했다.
‘예전과 같다.’
처음 사문향을 마주했을 때와 같다. 그때도 사문향은 저와 같은 목소리, 저와 같은 얼굴로 자신을 칭찬했다.
‘그리고 달라.’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가 아는 사문향은 저보다 더 감정적이고 격정적이었다. 어떤 의미로는 유쾌한 면모도 있었다. 그 유쾌함의 근원에는 가학적이고 파괴적인 성품이 있었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훨씬 더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를 지녔었다.
한데 지금은?
‘눈빛부터가 달라.’
회색빛에 가까운 피부, 훤칠하다 못해 거대한 체격.
그러나 눈빛은?
“이상하군.”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사문향이 맞나?”
사문향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가 사문향이 아니라면 누가 사문향일까.”
“그런가?”
“하지만 그 질문은 참으로 묘하구나.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외면하고 싶은 투가 아니야.”
사문향이 턱을 쓰다듬었다.
“나를 본 적이 있느냐?”
“…….”
“그 눈빛, 그 목소리. 마치 오래전에 나를 본 적이 있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
“하지만 놀라운 것은, 나 역시 그렇다는 것이다. 숙명의 적이라서일까? 어쩐지 오래전에 널 한 번 본 적이 있는 것 같아. 그렇게 느껴져.”
사문향의 미소가 짙어졌다.
“뭐가 어찌 되었든 신비로운 만남임은 분명하다. 너 역시 나의 존재를 느끼고 이곳에 왔겠지. 그렇다면 필경 너 역시 천기의 흐름을 엿보고 있다는 것일 터. 그 연배에 그와 같은 경지에 오른 자가 역사에 몇 명이나 있었던가. 과연 숙적답구나.”
가만히 사문향을 보던 연호정이 광룡부를 거두었다.
“묻고 싶은 게 있다.”
“얼마든지 물어보거라.”
사문향은 진정 이 만남을 즐기는 듯했다.
태산에서 내려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크게 분노했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방해하는, 혈교를 방해하는 하늘을 증오했고, 그런 천리(天理)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자신의 존재를 동정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숙적의 존재는 너무나도 매혹적이었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의 기쁨, 사문향은 자신에게 아직도 이런 감정이 남아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연호정이 물었다.
“왜 나를 숙적이라 하는 거냐.”
“음?”
“나에게 있어 너는, 분명 어떤 의미로 숙적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너는 한 번도 나를 본 적이 없어. 그렇지?”
“물론이다.”
“한데 어찌 숙적이라 자신하는가.”
사문향이 고개를 저었다.
“우문(愚問)이다.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도 천기의 흐름을 읽는 자는 인연의 실을 읽을 수 있다.”
“…….”
“이곳에 오며, 나는 너의 존재를 읽을 수 있었다. 이 땅, 이 기름지고 거대한 땅에 다시 발을 들인 순간 나는 너를 포착했고, 너와 영력을 공유하는 다른 존재도 느낄 수 있었다.”
영력을 공유하는 존재.
연호정은 사문향이 말하는 그 존재가 바로 아버지를 뜻한다는 걸 단번에 깨달았다. 별다른 설명 없이도 알아들은 걸 보니, 확실히 이놈과의 악연은 보통이 아니었다.
연호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점점 차가워지는 얼굴에 조소가 어린다. 달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천기의 흐름을 읽는 자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너도 아직 궁극에 이르지는 못했군.”
그냥 넘기기 힘든 발언이었다. 미소 짓던 사문향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확실하군. 너는 나를 알고 있어.”
“알다마다.”
“본 적이 있는 정도가 아니야. 그 눈빛과 목소리, 그리고…….”
후우웅.
사문향이 손으로 허공을 휘저었다.
“아직 드러나지 않았는데도 목구멍이 매캐해질 정도의 살의(殺意)…… 단순히 나를 원수로 보는 게 아니야. 숙적이어서도 아니다.”
“…….”
“언제고 영음산에 온 적이 있었더냐?”
“가고 싶었던 적은 많았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 버리고 싶은 장소니까.”
“나는 수십 년간 영음산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한데도 너는 나를 안다.”
후우우웅!
광룡부로 걷어 냈던 안개가 다시 모여들고 있었다.
“너는 나와 싸워 본 적이 있어.”
“…….”
“도대체 언제 나와 싸워 보았지?”
연호정은 침묵했다.
딱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대화가 진행될수록 그런 건 중요하지 않음을 느꼈다.
오랜만에 만났기 때문일까? 처음에는 이런저런 대화를 하고 싶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결국 상대는 자신을 모른다. 그리고 그게 당연했다.
나는 상대를 알지만, 오랜 세월 쌓아 온 이 분노를 다 퍼부을 수가 없다. 상대에게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호정은 상대를 증오했다. 분노했다. 그리고 그러한 어두운 감정과는 상반된 밝은 감정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
‘언제나처럼.’
신화교의 무장들을 학살했을 때처럼, 광혈교의 마인들을 쳐 죽였을 때처럼.
사음교의 끄나풀들을 짓이겼을 때처럼, 광혈교주 천위룡을 상대로 일생일대의 격전을 벌였을 때처럼.
지금도 그러면 된다.
그럴 수밖에 없는 대상이며, 그 이상의 존재조차도 아니다.
화아아악!
마음이 정리되니 자연스레 황룡신왕공이 풀려나왔다.
훅!
몰려들던 안개가 비명을 지르며 재차 흩어졌다.
번쩍!
사문향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한 가지 더.”
우우웅! 우우웅!
고요히 울었던 광룡부가 점점 매서운 용음(龍吟)을 터트렸다.
“네놈이 어떻게 사색광인의 신공을 알고 있는 것이더냐.”
쿵!
황룡보법의 일 보가 대지를 좀먹던 사문향의 사기를 정화하기 시작했다.
“사색광인의 무공은 삼교의 마학과 상극. 천위룡이 네놈에게 죽은 이유가 거기에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무공이 누군가에게 전수될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사아아아악.
조금씩, 미세하게 낮아지는 자세가 연호정의 전투 의지를 조여 왔다.
“설마…… 네놈이 사색광인인가?!”
그리고 지금.
연호정은 언제나와 똑같은 마음으로, 한 점 얼룩지지 않는 투쟁심으로.
숙적을 향해, 운명을 향해.
천하 모든 것을 향해 달려들었다.
파아아앙!
땅을 박차고 직선으로 돌진하니 어느새 사문향 앞이요, 사문향 앞에 도달한 순간 이미 광룡부는 상대의 머리통을 향해 휘둘러지고 있었다.
자연스럽고 빠르다. 빠르고 자연스럽다.
황금빛 벼락이 되어 내리친 광룡부는 광룡공의 투로조차 따르지 않았지만, 그간 구사했던 어떤 참격보다도 강력했다.
콰아아앙!!
단 일격에 땅이 뒤집혔다.
땅을 부순 광룡부 너머로 십 장이 넘는 거리가 초토화되었다. 혼신의 힘을 다한 발경이 아닌데도 강하고, 자연스레 휘둘렀는데도 이치에 맞는 힘을 발산했다.
이상적인 무(武), 도끼가 보여 줄 수 있는 궁극의 투로였다.
“그래, 그건 아니겠지.”
푸스스스.
가라앉는 먼지.
사문향은 땅을 찍은 광룡부 앞에 서 있었다.
어떻게 그 일격을 피했는지, 아니 피하기는 한 건지 알 수가 없다.
그저 그는 멀쩡했고, 두 눈은 확연히 굳어져 있었다. 싸움보다 상대의 존재 자체에 더 집중하는 것 같았다.
“사색광인의 무공은 한없이 천하무적에 가까운 것이었다. 진정 혈신의 경지를 엿보지 않는 한, 설령 나조차도 그를 상대할 수 없다.”
쩍!
땅에서 뽑힌 광룡부가 다시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상대가 자신을 공격하지 않으리란 걸 알기라도 하는 듯, 연호정은 한가롭게 손으로 도끼날을 털어 내기까지 했다.
“너는 사색광인이 아니다. 그러나 결코 알 수 없는 무공을 알고 있어.”
화아아악!
사문향의 몸에서 지독한 사기가 흘러나왔다.
그 사기는 놀랍게도 그 천위룡의 마기보다도 더 지독했다. 밀도는 쌍룡광세마공에 준하지만, 알 수 없는 여러 기운이 섞여 숨도 못 쉴 것 같은 기운을 퍼트리는 것이다.
“설마 나처럼 역천(逆天)의 수를 쓴 것이냐? 새 몸을 구해 본인을 욱여넣은 것인가?!”
“알아듣지도 못할 개소리는 그쯤 하지.”
연호정이 광룡부를 아무렇게나 휘둘렀다.
부웅, 부웅 소리를 내는 광룡부가 다시금 힘을 받았다. 조금 전보다 더 탄력적이고 더 막강한 힘을 발할 것 같았다.
“준비는 다 됐나, 색골?”
“…….”
“능욕밖에 모르는 그 더러운 삶, 지긋지긋한 악연을 여기서 끊어 주마.”
콰앙!!
폭음을 내며 휘둘러진 광룡부가 사문향의 어깨를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