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19) - 1321
흑백무제 1321화(1320/1320)
1321화. 하늘이 내린 숙적 (7)
연호정이 미친 듯이 뒤로 물러났다.
‘빌어먹을.’
창백해진 안색, 입 밖으로 울컥 핏물이 쏟아져 나온다.
다급히 황룡기로 방비했지만 미세하게 늦었다. 대부분 튕겨 냈지만 막지 못한 하나의 음황지가 요혈을 두들겨 진기 흐름에 파탄을 일으켰다.
‘청룡!’
파아악!
빛살처럼 침투한 음황사기를 해독하고 금빛 백호를 소환해 발경을 날렸다.
그 일련의 흐름이 벼락과도 같았다. 순간적으로 침투경을 분해하고 날려 버리는 기공 운용,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상대 역시 마찬가지다.
지이잉! 지이이잉!
백룡부는 여전히 고속으로 회전하고 있었다.
회전하는 상태 그대로 허공에 떠 있다. 사문향이 뻗은 오른손, 그 손에서 나온 알 수 없는 힘 때문에 전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제법이구나.”
연호정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왜일까? 한순간 사문향의 목소리가 달라진 것 같았다.
“이기어를 유지하며 본체로 영력을 더한 공격을 가한다…… 극사경에 오른 고수 중 그런 것이 가능한 자는 몇 명 안 되지.”
치이이익!
회전하는 백룡부에서 희뿌연 연기가 새어 나왔다.
주변 온도가 점점 상승했다.
“놀랍도록 인상적인 전투력이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정말로.”
사문향이 손을 우측으로 뻗었다.
카앙!
회전하던 백룡부가 그의 손짓을 따라 땅에 박혔다.
우둑. 우두둑.
그의 큼직한 양손에서 살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럼.”
스르륵.
서서히 자세를 낮추는 사문향.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드디어.’
살짝 굽힌 무릎, 앞으로 기울어진 상체.
그리고 자연스럽게 내려간 두 팔.
‘오는가.’
음황무 지모신룡세(地母神龍勢).
음황무를 극성으로 연마한 자만이 구현할 수 있는 비기 중의 비기다.
호흡 한 번에도 음황사기가 묻어 나오며, 극단적인 공력 운용으로 힘과 속도를 상승시키고 기괴한 투로로 상대의 무공 전개까지 파괴하는 궁극의 기법.
바로 저 기법에 모용군이 원정까지 소모해 시력을 잃었고, 별안간 떨친 음황지에 당관이 치명상을 입었으며, 그도 치명적인 내상을 입어 회생 불가의 상황에 처했다.
그 죽음의 무공을 다시 보고 있는 것이다.
당시 중원 최고수로 손꼽히던 세 명의 고수를 죽인, 사음교주만이 구사할 수 있는 절학을.
‘광룡.’
연호정은 광룡부의 도끼날에 금이 갔음을 알았다. 사문향의 수도와 부딪치며 생긴 일이었다.
흑암제 시절에 휘둘렀던 풍뢰부보다 단단하다고 생각했던 광룡부에 금이 갔다. 당시보다 무력이 더 상승했는데도 도끼날에 균열이 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때는 셋이었고 지금은 하나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일까?
하지만 연호정은 의아함을 느꼈다.
‘놈의 무공은 진짜다. 한데 지금은?’
지모신룡세를 끄집어내는 순간, 자꾸만 무언가가 뇌리를 자극했다.
‘지모신룡세가 분명하긴 하지만 그때와는 조금 달라.’
내가 강해져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그때와는 시대가 달라서 그런 것일까.
뼛속까지 저릿저릿해지는 저 기세는 분명 중원 무림의 천하제일을 논할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흑암제 시절에 겪었던 지모신룡세는 저보다 더 대단했다.
그야말로 숨도 못 쉴 것 같은 기도. 붙기도 전인데 무공 전개가 어려웠을 만큼 압도적인 기파에 얼마나 놀랐던가.
당시 뇌정공을 극성으로 연마한 검신 모용군이 아니었다면, 극단적인 전투 능력으로 몇 수 위의 고수도 쳐 죽인 연호정의 경험이 아니었다면, 천하에서 가장 지독한 독술을 지닌 당관이 아니었다면 절대 죽일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일단은.’
연호정이 창봉을 살짝 돌렸다.
금이 간 쪽을 반대로 돌리고, 내공을 집약해 병기 자체를 더 단단히 조여 두었다.
사문향이 미소를 지었다.
점점 포악해지는 눈빛, 지금까지 보여 주던 여유는 온데간데없었다.
“받아 봐라, 연호정.”
연호정.
숙적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온 나의 이름.
‘온다!’
사문향이 땅을 박찼다.
콰콰콰쾅!!
직선으로 달려오는 그의 발 뒤로 땅거죽이 박살 나기 시작했다.
마치 물 위를 고속으로 돌파하는 것처럼 좌우로 갈라지며 솟구치는 땅이 거대한 뱀이 지나간 것 같은 흔적을 남겼다. 무서운 속도, 강력한 내공력이었다.
삽시간에 연호정의 전면에 다가온 사문향이 좌수를 휘둘렀다.
‘빠르다!’
휘어져 들어오는 투로가 절묘함 그 자체다.
연호정이 금룡번천장을 쳐올렸다.
쾅!
번천장력을 그대로 깨부순 왼손이 연호정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
한발 늦었다면 목이 잡혔을 것이고, 그걸로 승부는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위험했다.
‘안 뜯어져?’
스스로 옷깃을 뜯으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옷 자체가 전설의 천잠사로 만든 것처럼 질겨졌다.
‘내공 침투!’
벗어날 것을 짐작한 사문향이 한발 빠르게 공력을 침투시켜 연호정의 의복을 단단하고 질기게 만든 것이다.
일대 사건이라 할 만했다.
그간 숱한 싸움을 벌였지만, 상대의 움직임과 의도를 예측하고 행동하는 것은 늘 연호정이었다. 진기는 곧 의념의 영향을 받으니, 불리한 상황에서도 언제나 내공 운용은 먼저 했다.
하지만 지금 그 진기 운용 싸움에서 최초로 패배했다.
사문향이 그대로 손을 휘둘렀다.
부우웅!
너무나도 허무하게 허공을 난다.
광룡부를 휘두를 수도, 권장을 내칠 수도 없었다. 연호정의 몸이 그대로 땅에 처박혔다.
콰앙!
무서운 고통이 엄습했다.
호신강기를 둘렀는데도 등판이 부러질 것 같았다. 의복으로 스며든 음황사기가 순식간에 호신강기를 절반가량 풀어 냈기 때문이다.
사문향이 냉정하게 오른손을 휘둘렀다.
콰득!
그의 손이 땅을 뚫고 들어갔다. 고개를 틀어 피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머리통이 부서졌을 것이다.
파악!
사문향의 멱살을 잡은 연호정이 복압을 올렸다.
쾅!
싸움꾼다운 일격이랄까.
황룡기로 보호한 머리로 박치기를 시도했는데 폭음이 울렸다. 이미 연호정의 공격을 예측한 것인지, 사문향 역시 코앞에 무형의 방벽을 세워 놓은 것이다.
찌이익!
연호정의 옷깃이 찢어졌다.
박치기를 한 그 순간, 사문향의 내공력도 잠시지간 흔들렸다. 그 틈을 파고든 신왕기가 사기를 몰아내고 경화된 의복을 본래대로 돌려놓은 것이다.
사문향의 두 손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콰콰콰쾅!
무시무시한 쾌공이었다.
번개처럼 광룡부를 세워 막았지만, 그 충격이 머리와 경부로 들어온다. 연호정은 눈앞이 번쩍이는 것을 느꼈다.
‘위험!’
연호정이 허리를 뒤틀었다.
콰앙!
그 자세에서 몸을 틀어 사문향의 옆구리에 슬격(膝擊)을 먹였다.
날아가진 않았지만 자세를 흐트러트리기엔 충분한 위력이었다. 사문향이 주춤한 사이, 탄력적으로 움직인 연호정이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가 일어난 순간, 이미 사문향의 손은 가슴 앞에 이르러 있었다.
콰앙!
연호정이 울컥 피를 토하며 날아갔다.
날아가는 중에도 계속 핏물이 올라온다. 연호정은 끝끝내 참다가, 또 한 번 접근한 사문향에게 핏물을 뱉었다.
푸화악!
설마하니 입으로 핏물을 뱉는, 삼류 파락호들이나 할 법한 저급한 술수를 쓸 줄은 사문향도 몰랐다.
치익!
반투명한 호신강기에 닿은 핏물이 그대로 증발했다. 몸에 묻지는 않았지만 반 박자의 시간을 버렸다.
연호정이 돌진했다.
콰득!
내리친 광룡부에 붕산의 힘이 담겼다.
사문향의 이마에 핏줄이 불거졌다. 어깨를 내리친 광룡부가 살을 파고들었다. 지모신룡세로 강화된 사황체가 아니었다면 팔 하나가 날아갔을 것이다.
“이놈!”
파파팡!
분노의 연환삼장이 그대로 연호정에게 꽂혔다.
벼락같은 반격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연호정의 몸에 별다른 충격을 주지 못했다. 황룡수기, 북천십이벽의 수법으로 충격을 받아 낸 연호정은 황룡보를 밟으며 금룡진악권을 날렸다.
콰앙!
폭음과 함께 사문향이 대여섯 걸음이나 뒤로 밀려났다.
훅!
한 방 먹였다고 방심하지 않는다. 곧바로 치고 들어간 연호정이 폭우강룡, 질주광룡의 이연초를 먹였다.
화아아아악!
쏟아지는 거력에 공기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난다.
성벽도 일거에 날려 버릴 만한 힘의 집중. 사문향의 두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콰콰콰콰쾅!!
유성처럼 떨어지는 참격은 음황신장으로 막고, 강성으로 밀고 들어오는 질주광룡의 참격은 극사도로 막아 낸다.
파바바박!
힘과 힘이 부딪치며 무서운 폭발을 일으켰다. 사문향과 연호정이 삼 장이나 뒤로 밀려 나갔다.
그 순간, 연호정은 깨달았다.
‘멀쩡하다.’
거의 똑같은 힘이었지만, 이전에는 극사도와 마주한 광룡부의 도끼날에 금이 갔다.
하지만 지금은 멀쩡했다. 지모신룡세로 힘과 속도가 더 상승한 상대의 극사도에도 이 하나 나가지 않은 것이다.
우웅! 우우웅!
본능적으로 신왕기에 힘을 실었다.
시계(視界)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사문향이 분노한 얼굴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느려진 시계에서도 빠르다. 중원에서 손꼽히는 속도를 지닌 연호정보다 한 수 위였다.
그래도 연호정은 볼 수 있었다.
‘저놈, 이상하다.’
두 눈에 어린 광망이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달랐다.
숙명을 논하고 천리를 저주하던 사문향. 자신을 향해 분노하기보다는 하늘에게 분노했고, 동시에 숙적의 존재에 기뻐하기도 했던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 주던 그 사문향의 눈빛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더 광포하고 훨씬 더 ‘인간’적이다. 중원 정점을 노릴 만큼 막강한 무력을 발하고 있지만,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른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눈빛이 달랐다.
‘……?!’
불현듯 사문향의 말이 떠올랐다.
‘설마 나처럼 역천(逆天)의 수를 쓴 것이냐? 새 몸을 구해 본인을 욱여넣은 것인가?!’
새 몸? 본인을 욱여넣어?
의아함이 놀라움으로, 놀라움이 당황으로 이어진다.
그 순간, 연호정은 또 하나의 광경을 떠올렸다.
황궁 전투가 시작되기 전, 그는 과거의 꿈을 꾸었었다.
놀랍게도 그 꿈은 그 자신이 겪은 일이 아니었다.
자신이 죽은 후, 당관이 모용군을 향해 화를 냈다. 왜 내게 연호정을 죽이라 했냐며 소리를 질렀다.
모용군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며 자책했고, 당관은 전쟁 때문에 미쳐 버린 자신의 모습에 자괴감을 느끼며 죽어 갔다.
그리고 그때.
목이 날아간 사문향이 벌떡 일어나 모용군에게 다가갔다.
잘린 목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오는 광경.
그 허연 연기 같은 것이 모용군의 입으로 들어가는 광경을 마지막으로 꿈도 끝났다.
‘죽은 사람이 움직였다. 마치 몸은 죽었어도 혼은 죽지 않은 것처럼.’
자신이 죽은 이후의 일을 꿈에서 봤다. 당연히 그게 사실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저 개꿈으로 치부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연호정은 그 꿈을 잊을 수가 없었다.
마치 저 하늘의 누군가가 강제로 자신에게 알려 주는 것처럼 생생한 현실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제 와서는 정말 사문향이 죽어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될 정도였다.
사문향을 백 조각, 천 조각으로 찢어 죽일 마음으로 전투에 임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우웅!
신왕기가 흔들리고 시계가 다시 빨라졌다.
콰아앙!!
폭음과 함께 주르륵 뒤로 물러난 연호정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사문향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정말 제법이구나. 흥이…….”
“너, 누구냐.”
“뭐?”
연호정이 입가의 피를 닦으며 물었다.
“너는 사문향이냐? 아니면 사문향의 몸뚱이에 들어간 누군가냐?”
“…….”
“너 뭐냐고 묻잖아!”
사문향, 아니 사문향의 모습을 한 남자가 흉흉한 미소를 흘렸다.
“그걸 이제 읽는다…… 숙적이라는 호칭이 무색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