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24)
흑백무제 1324화(1323/1351)
1324화. 하늘이 내린 숙적 (10)
우우우웅.
구슬이 운다.
백여덟 개의 생령(生靈)으로 기반을 다진 채정마진 속, 아직 팔 할밖에 차지 않은 사옥이 울음을 토해 내고 있었다.
‘된다.’
사괴술사의 얼굴에 격동이 어렸다.
‘되는구나.’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제아무리 교주님의 신학(神學)이 극치에 이르렀고 온갖 사술이학에도 정통하셨다지만, 진짜로 태산의 정기를 끌어와 채정마진을 완성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가능했다. 교주님의, 신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쿠르르릉.
태산의 정기가 몰려들고 있었다.
바다와 같은 깊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의 광대함을 품은 태산영령의 힘이 채정마진으로 빨려 들고 있었다.
‘이걸로 기반은 갖추었다.’
역천사주 중 하나가 깨졌으나, 태산의 정기로 일주(一珠)를 대체할 수 있다.
물론 교주님께서 직접 이곳에 오셔서 삼주(三珠)를 하나의 역천신주(逆天神珠)로 만들어야 이 작업에 의미가 있을 테지만, 사괴술사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늘의 숙적이건 뭐건 사신(邪神)의 앞을 가로막을 수 있는 존재 따위는 없다.
화르르륵!
사괴술사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평범한 무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상단전이 극단적으로 발달한 술사의 눈에만 보이는 뜨거운 기운이 몰려오고 있었다.
‘화옥!’
사옥이 화옥을 부르고 있다.
완성된 화옥은 불의 성질처럼 유일하게 형태를 제멋대로 바꿀 수 있다. 역천사주 중 물리력으로 절대 깰 수 없는 유일무이한 구슬이다.
‘화옥의 정수가 몰려들고 있다! 진정 이곳에서 역천신주가 만들어지는구나!’
쿠르릉! 쿠르르릉!
저 멀리, 태산 자락의 작은 봉우리 하나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지맥(地脈) 붕괴다. 순환하는 지기를 빼앗긴 땅이 스스로 붕괴를 일으키고 있었다.
앞으로 저 땅은 무너지지 않아도 죽은 땅이 될 것이다. 풀 한 포기 나지 않을 것이요, 짐승도 오가지 않을 것이다. 내리는 비도 생명력을 끌어낼 수 없는 죽은 산이 된 것이다.
사괴술사의 얼굴에 광기 어린 웃음이 떠올랐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그때였다.
콰쾅!
운해 때문에 보이지 않는 저 머나먼 곳.
점점 어두워지는 세상 속에서도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의 굉음이 마치, 태산이 울부짖는 비명처럼 들렸다.
* * *
푸화아악!
터져 나가는 핏물이 느릿하게 보였다.
흩어지다가 하나로 합쳐지고, 합쳐졌다가도 꿈틀대며 다시 흩어지는 핏물은 마치 통일되었다가도 찢어지는 천하를 보는 듯했다.
콰콰쾅!!
밀려 나가는 몸을 세우는 두 다리가 내 것 같지 않다.
‘처음이다.’
온몸이 만신창이였다. 황룡신왕공은 건재함에도 몸이 버티지 못하고 있었다.
무극에 오른 신체, 완벽에 이른 육신으로도 혈신 강림(血神降臨)의 위용을 선보이는 고금제일사(古今第一邪)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무공이 있었단 말인가.’
연호정은 흐릿해지는 눈을 애써 치떴다.
온다. 사신이.
사신(邪神)이자 사신(死神)이다. 두 손 가득 붉은 기운을 담은 철천지수가 무표정한 얼굴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 속도가 음속을 가볍게 돌파하는데도 폭음이 없다.
대자연의 진리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사신을 보며, 최고조로 날 선 연호정의 정신이 더욱 날카롭게 벼려졌다.
‘참혼.’
의지가 이는 순간 광룡부는 이미 사선으로 참격을 발하고 있었다.
참혼광룡. 광룡공의 칠초로, 미완의 초식을 제외한 연호정 최강의 일격이었다.
훅!
소리 없는 폭발과 함께 전방의 외물들이 빛이 되어 사라진다.
참혼광룡의 참격이 끝나기도 전에 연호정은 깨달았다. 이번 일격은 실패다.
‘온다.’
피한 게 분명한데 여전히 정면에서 달려오고 있다. 어떻게 피해 냈는지는 연호정의 신안(神眼)에도 잡히지 않았다.
사문향의 손이 연호정의 가슴에 닿았다.
펑!
강하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하얘졌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정신력은 더 날카롭고 단단해지는데, 그 집중과 강단을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 만큼 충격이 대단했다.
피를 토하고 물러나면서도 연호정은 생각했다.
‘이런 놈을 어떻게 잡았지.’
과거 자신과 모용군, 그리고 당관 셋이서 이놈을 잡았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땐 이런 무공을 쓰지 않았다.’
혈제공이라 했다.
도대체 어떤 무공인지 해석이 안 된다. 그저 엄청나게 빠르고 엄청나게 강하다. 그게 전부였다.
어떤 의미론 이 또한 궁극의 무공이라 할 만했다.
무의 이치란 셀 수 없이 많지만, 결과적으로 진리는 단순한 법이다.
상대적으로 더 빠르면 내가 죽기 전에 적을 벨 수 있다.
상대적으로 더 강하면 상대의 힘을 무시하고 이길 수 있다.
더 빠르고 더 강한 것이 우월한 것은 상식이다. 하지만 중원의 여러 무공은 후발선제(後發先制)니 이화접목(移花接木)이니 하는 술수로 빠름을, 강함을 무시하는 우월성을 얻었다.
그러나 후발선제가 통하지 않는 상대, 이화접목을 무시하는 상대라면 그 또한 잡스러운 무리에 불과할 뿐이다.
사문향의 무공이 바로 그러했다. 단순히 빠르고 강하다. 하지만 그 속도와 위력이 규격 외다.
어떤 의미론 소림의 무공보다도 고급스러운 무리를 지닌 것이 무당파인바, 그 무당파의 정점이란 탁무자라 해도 이 속도와 위력에 반응하긴 어려울 것 같았다.
‘쓰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쓸 수 없었던 것인가.’
생각을 거듭하는 동안에도 광룡부는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강자와 싸울 때마다 한계를 돌파하는 연호정.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이렇게까지 빠르게, 그리고 강하게 광룡부를 휘두른 적이 언제 또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팡! 파팡!
사문향의 대처는 놀라웠다.
대처라고 할 만한 행동이 아니기에 더더욱 놀랍다. 불그스름한 기운이 담긴 손으로 광룡부의 도끼날을 아무렇게나 쳐 내는데, 그때마다 참혼광룡의 힘이 깨지고 박살 나 허공으로 흩어졌다.
“좋구나.”
소리가 들리지 않는 영역이다. 그런데도 사문향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짜 육성인지, 아니면 마음으로 발하는 소리가 귀로도 들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혈제공 앞에서 이렇게까지 대응하다니. 사색광인의 무공이라 한들 쉽진 않을 터. 실로 본능이구나.”
부우우우웅!!
어디선가 날아온 백색의 돌풍이 사문향의 뒤통수를 노렸다.
회전하는 백룡부, 광룡섬 일격이다.
사문향은 냉정한 얼굴로 팔을 휘둘렀다. 뒤를 향해서 휘두른 것도 아니요, 대충 허공에다 허우적대는 것 같다.
그런데도 백룡부는 사문향의 머리를 비껴 나가 날아올랐다. 발경의 충격파 따위는 없었다. 말 그대로 힘을 잃고 날아오른 것이다.
그 순간,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퍽!
끔찍한 고통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사문향의 손가락 네 개가 그의 옆구리를 뚫었다. 섬뜩한 감각을 느끼자마자 전신이 마비되기 시작했다.
우우웅!
황룡기가 몸부림을 쳤다.
진기가 움직이질 않는다. 마치 마비독에 중독되기라도 한 것처럼, 신체부터 내공 등 모든 것이 멈춰 버렸다.
사문향이 미소를 지었다.
“여기까지구나.”
과연 그럴까?
주르륵.
손을 타고 흐르는 핏물이 바닥을 적신다.
고약한 기분이었다. 철천지수의 손가락이 내장에 닿아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죽음의 문턱에 한 발 걸친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극한의 내공력으로 상처를 수복하는 게 불가능하진 않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워도 이기기 힘든 적을 상대로 그렇게까지 내공을 소모할 수는 없었다.
결국, 치명적인 일격을 당한 것이다.
“놀라운 육체다. 어찌 이렇게까지 연마되었을까 싶어. 적흠의 몸뚱이만큼 연마된 육체는 처음 본다.”
사문향의 손가락이 꿈틀거린다.
연호정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몸 안의 피가 몽땅 역류하는 것 같았다. 황룡기로 제어하려 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참으로 탐이 나는 육체야. 너와 같은 육체를 타고났다면, 굳이 먼 길을 돌아갈 필요가 없었겠지.”
사문향의 얼굴이 다시 냉정해졌다.
“잘 가거라, 숙적이여.”
그때였다.
훅!
하늘 높은 곳에서 새하얀 무언가가 벼락처럼 쏟아졌다.
“……!”
사문향의 눈이 부릅떠졌다.
천천히 올라와 그의 팔목을 잡는 연호정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제대로 힘을 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움직였다는 것이다.
‘혈제기(血帝氣)의 통제를 벗어났다?!’
손도 손이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의 머리 위에서 회전하는 백룡부였다.
우우우우웅!!
초고속으로 회전하는 백룡부가 사문향의 정수리 위에서 무서운 살기를 발했다. 당장이라도 내리꽂혀 머리통을 부숴 버릴 기세였다.
하지만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무언가에 턱 막힌 듯, 그 자리에서 맹렬하게 회전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기어(以氣馭)의 한 수였다. 광룡공의 사초 광풍섬이 아직도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실수였어.”
말까지 한단 말인가.
수백 년을 살아오며 갖은 쾌락과 환희를 느꼈지만, 반대로 놀라움이라는 감정에는 무뎌졌다.
한데 오늘, 근 이백 년 만에 가장 크게 놀라는 것 같았다.
“내 몸에 손을 댄 것은 실수였다.”
사문향의 팔목을 잡은 연호정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황룡기가 꿈틀대고 있었다. 힘이 돌아온다.
연호정의 두 눈이 찬란한 금빛으로 물들었다.
“신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 그것은 네가 사람이라는 뜻이지.”
이미 신이 된 자는 신이 되기를 갈망할 필요가 없다. 오직 사람만이 신이 되기를 바란다. 닿을 수 없는 영역이라는 걸 아는데도.
“그러나 너처럼, 사람임에도 신의 영역에 닿은 힘을 발할 수는 있지.”
황룡기가 움직이자 점점 속도를 잃어 가던 신왕기가 다시 맹렬하게 회전했다.
동시에, 어두워진 세계가 다시 활짝 기지개를 켰다. 보이지 않는 것, 보아서는 안 될 것들이 모두 보였다.
“좋은 심검이었다.”
사문향의 얼굴이 굳어졌다.
콰르르릉!!
백룡부가 한 치 더 내려왔다. 그 한 치를 움직이는데도 천둥소리가 났다.
어검(馭劍)이란 마음으로 검을 조종하는 지고의 경지인바, 어검에 이른 자는 곧 심검(心劍)을 코앞에 둔 것과 같다. 연호정은 이미 본능적으로 심검을 구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심검이 구체화되고 있었다.
눈앞의 사문향, 일생일대의 난적이 실로 교묘하고 파격적인 방법으로 심검을 다룬다는 걸 깨달은 지금, 연호정의 심검 역시 진화를 거듭하고 있었다.
연호정이 사문향의 움직임을 보지 못한 것은, 사문향이 그의 인지 능력을 저하시키는 심검을 썼기 때문이다.
사문향의 무공이 그토록 빠르고 위력적인 것은 연호정처럼 심검의 묘리로 내공 경파의 파괴력 자체를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나아가 복부에 손을 박아 넣고 직접적으로 연호정의 진기와 신체의 자유를 박탈한 것 역시 심검이다.
심검을 깨달았기에 수많은 영혼을 육신에 담을 수 있고, 심검을 깨달았기에 영력으로 육신을 치료할 수 있다.
종류가 다른 심검을 숨 쉬듯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자. 연호정은 지금껏 천하가 본 적이 없는 심검의 달인을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불안정한 심검의 달인을.
“이렇게까지 다채로운 심검을 구사할 수 있는 건 네놈이 받아들인 영혼들 덕분일 테지. 군령으로 깨달은 심검의 다양화, 그것이 너를 강하게 만든 것이다.”
사문향의 눈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넌 실수했어.”
연호정의 얼굴에 지친 미소가 어렸다.
“난 보고 베끼는 거 하나는 천하제일이지.”
우둑!
사문향의 팔목이 꺾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