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25)
흑백무제 1325화(1324/1351)
1325화. 하늘이 내린 숙적 (11)
치이이익!
의지가 이는 순간, 신왕기의 영력이 상처를 통해 들어온다.
상처가 안에서부터 무섭게 아물어 간다. 동시에 사문향의 손 역시 점점 밖으로 밀려 나가고 있었다.
“대단하다는 말이 몇 번이나 튀어나오는지 모르겠다.”
우둑!
꺾인 팔목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간다.
치유의 심검, 영력을 기반으로 한 신체의 수복화다.
연호정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후우우웅!
사문향의 전신에서 핏빛 기운이 넘실거렸다.
그가 발하는 핏빛은 지금껏 봐 왔던 핏빛과는 뭔가가 달랐다.
어둡지만 밝고, 선명하지만 모호하다. 정말 사람이 쏟아 낸 선혈처럼 보이는데, 그 안에 인세에는 존재하지 않는 신(神)의 그림자가 보인다.
피를 탐하고 인육을 즐기는, 도탄에 빠진 세상을 만들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 준비가 된 악신(惡神)의 그림자가.
‘악신이라.’
어디선가 들어 본 말이다.
그렇다면, 이놈이나 나나 똑같은 놈이란 의미일까.
“과연 숙적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다. 천위룡과의 싸움 때도 이랬을까? 너는 정말이지, 혈신을 가슴에 둔 우리에게 있어 재앙과도 같은 놈이로구나.”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능력을 떠나, 연호정은 혈교 지파의 고수들과 싸우며 언제나 한계를 뛰어넘었다.
광혈교의 전(前) 사제장들과 싸우며 무극에 이르렀고, 사음교의 호법이란 놈과 싸우며 ‘지금’ 육신에 걸맞은 깨달음을 얻었다.
신화교의 고수들과 싸우며 그 자신의 무공을 재정립할 수 있었으며, 광혈교주 천위룡과 싸우며 황룡신왕공의 진체(眞體)에 이르는 단초를 얻었다.
그리고 지금.
사음교의 수장이자 하늘이 내린 숙적과 싸우며, 비로소 자신이 얻은 심검의 한계를 넓힌다.
후우우웅!
날뛰는 황룡기가 다시 한번 현현환상을 일으켰다.
이전처럼 거대한 황룡이 아니었다. 마치 진짜 몸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작은 용 한 마리가 사문향의 코앞에서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작지만 선명하다.
이 세상에 진짜 용이 있다면 이런 생김새일 것이다. 비늘 하나, 수염 한 가닥까지도 실재하는 생물처럼 섬세하게 조각된 황룡이 사문향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문향은 오랜만에, 실로 오랜만에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파아아악! 콰앙!
본능적으로 손을 빼고 물러나니 심검의 역장이 사라진다.
백룡부가 지면을 파고들었다. 형상화된 황룡이 연호정의 몸으로 스며들며 신체 회복의 속도를 올렸다.
그리고 다시, 사문향이 달려들었다.
‘온다.’
박차고 돌파하는 순간 연호정은 알았다. 상대가 어떻게 달려올지, 그리고 어디를 공격할지.
예전에도 적의 움직임을 사전에 예측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것만큼은 타고났다고 생각했다. 실전 능력으로 개화한 재능, 천재의 전투 감각이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야 연호정은 깨달았다.
감각의 천재인 동생처럼, 그 역시 부모를 통해 대단한 재능을 타고났다는 걸.
강인한 집중력과 절대 꺾이지 않는 천품이 자아낸 선택받은 자들의 권능, 심검의 재능이다.
심검이란 곧 강력한 의지를 현실로 구현해 내는 무도의 정점이다. 말이 심검의 재능이지, 결국 정신력을 타고났다는 말이다. 강한 정신은 그를 심검에 이를 수 있도록 끊임없이 연마시켰다.
연지평이 어머니를 닮았다면 그는 아버지를 닮았다.
반대로 아버지의 차분함은 연지평에게로 이어졌고, 어머니의 유쾌함과 격정적인 면모는 그에게로 이어졌다.
천하에 다시없을 협사와 천하에서 가장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두 남녀의 자식들은 부모가 가진 장점들을 나누어 물려받았다.
무엇이 더 좋은 재능이라 말할 순 없다. 둘 다 똑같이 노력했다면, 똑같이 살아남아 자신의 재능을 갈고닦았다면 결국 스스로를 재능에 더 깊이 던진 자가 우위를 차지할 것이다.
뭐가 됐든, 연호정에겐 언제나 그러한 재능이 함께했다. 어린 시절 엇나갔을지라도 가문에 위기가 닥친 순간 기어이 되살아난 것도 특유의 정신력 덕분이요, 모든 것을 잃고 방황하면서도 스승의 가르침 이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 역시 정신력 덕분이다.
상식을 초월하는 집중력은 곧 무한한 상상력의 원동력이 되었고, 온갖 변수를 상정할 만큼 발달한 상상력은 적의 공격 몇 수 앞을 읽어 낼 만큼 예리한 감각으로 발전했다.
정신, 그리고 마음.
분노와 회한, 증오와 슬픔, 격정과 차분함 등 모든 감정을 아우르는 심검의 재능.
그 재능이 빛을 받아 지금 이 순간, 또 한 차례 성장한다.
콰아앙!
사문향의 공격이 들어오기도 전에 광룡부가 대지를 박살 내는 참격을 뿜었다.
선(先)의 선(先)이다. 적의 공격을 예측하자마자 공세를 취해 들어오는 길을 방해한다.
궁극에 이른 후발선제(後發先制)의 무리다. 사문향보다 빠르지 않아도 공격선을 차단하며 선택지를 봉쇄했다.
부아아앙!
백열(白熱)하는 신왕기가 그의 머리카락마저 새하얗게 물들이는 것 같았다.
황룡과 신왕, 둘이자 하나인 신공의 힘이 모조리 하얗게 물들기 시작한다. 황룡으로 시작해 황룡과 신왕을 하나로 만들어 우화등선한 스승과 달리, 신왕으로 시작해 스스로의 존재를 완전무결(完全無缺)의 신인(神人)으로 만든 이십육 대 사신무장 연호정의 힘이었다.
과거, 혈교지란을 끝장낸 전설의 고수 천인룡이 황룡제라 불렸다면.
당대, 혈교의 부활을 위해 천하를 도탄에 빠트리는 적의 수괴를 맞이하여 황룡신왕공의 극성으로 나아가는 연호정에겐 백룡제(白龍帝)라는 호칭이 어울릴까.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아직도 흑암이 있어, 신선(神仙)의 길을 무시하고 적의 파멸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흑(黑)의 마음, 백(白)의 육신.
전 무림이 경탄하며 붙여 준 흑백무제라는 별호를 스스로 완성시키는 그였다.
쾅! 콰콰쾅!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치고받는다.
광룡이 하늘을 날면 혈광이 지상을 배회한다. 백룡이 회전하면 음황이 하늘을 어둡게 물들이고, 금룡이 일깨워지면 혈영(血影)이 태산을 뒤덮었다.
울컥!
연호정의 몸은 순식간에 피범벅이 되었다.
‘너무 강해!’
심검을 담아 후려치는 무공들이다.
일격, 일격이 언덕 하나를 지워 내는 파괴력을 지녔다. 그런 공격이 눈 몇 번 깜빡이는 순간 수십 번이나 오간다.
심검을 깨닫지 못했다면 삼초를 넘기기도 전에 죽었다. 육신이 심검의 파괴력을 이기지 못하고 붕괴하였을 것이다.
다만, 이 싸움에서 연호정이 밀리고 있는 것은 절대적인 공력의 차이 때문이었다.
‘마르지 않는 바다와 같다.’
사문향의 공력 깊이는 참으로 놀라웠다.
철천지원수라도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부정한 방법으로 쌓은 내력이라고는 하나 그 밀도는 명백히 천하제일이요, 깊이는 명실공히 고금 제일이다.
그 한계가 없는 힘으로 심검을 다루니 상대적으로 공력 열세에 처한 연호정이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놀란 것은 연호정만이 아니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단 말인가.’
사문향의 얼굴은 완전히 얼어붙어 버렸다.
‘열세인 공력으로 어찌 이렇게!’
심검의 깨달음을 육신에 담아 싸우면 먼저 집중이 깨진 자가 죽는다.
두 사람 다 집중이 깨지지 않으면, 공력이 얕은 자가 죽는다.
저놈이 피범벅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놈의 몸은 붕괴와 회복을 반복하고 있었다. 자신의 공격에 타격을 받으면, 그 즉시 심검의 능(能)으로 초고속 치유를 감행하는 것이다.
역천, 불사를 이뤄 낸 마(魔)의 회복과는 다르다. 순수한 영력으로 끌어낸 수복력인 만큼 한계가 있다. 상단전의 신기도 무한한 것이 아니요, 내공의 영향을 안 받는 것도 아니기에 진즉 몸이 절단 나야 정상이었다.
한데도 놈은 쓰러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빠르고 더 막강한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치이이익!
상처 부위에서 뿜어져 나온 연기가 사라졌다 싶은 순간, 혈제극사도(血帝極邪刀)에 베여 뼈가 드러났던 상처가 싹 아물어 버렸다.
상처 수복 속도까지도 한층 빨라진 것이다. 몇 합 지나서야 치유되기 시작했던 몸이, 이제는 한 합이 교환되는 순간 거의 다 아물어 버린다.
정신이 육체를 완벽하게 장악하는 순간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화아아악!
연호정 주변의 외기(外氣)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상단전의 신기가 중단과 하단을 장악한 걸 넘어, 대자연의 기운까지 끌어다가 휘하에 두고 있었다.
사문향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무한의 외기를 받아들인다. 선무지도(仙武之道)……!’
수십, 아니 수백 합을 나누었지만 두 사람 모두 음속을 돌파하는 영역에서 싸운 만큼 흐른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 짧은 사이, 저 미친놈은 몇 단계를 발전해 버린 것이다. 심검의 회복 능력을 따라 쓰는 것만도 기가 찰 일인데, 공력이 모자라니 외기까지 끌어다 쓰다니? 세상에 이런 괴물이 있단 말인가.
‘반드시 죽여야 할 놈이다.’
사문향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유희로 대해서는 안 될 놈이야.’
하늘이 내린 숙적이라도 경시하는 마음이 있었다. 애초에 그는 하늘 자체를 증오하는 사람이었으며, 천리(天理)를 발아래 두려는 자였다. 하늘이 내린 숙적의 존재 따위, 유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흑백무제라 불리며 중원 최고수로 성장한 이 숙적은 진실된 천적이었다. 유희라도 내치는 공격마다 진심이 깃들었거늘, 죽기는커녕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발전했다.
후웅!
공기가 압축되며 두 사람을 각기 다른 방향으로 부드럽게 밀어 냈다.
그 순간, 한 줄기 벼락이 떨어졌다.
번쩍!
천지를 반으로 가르는 빛이었다.
그 빛을 뿜는 사문향을 본 연호정은, 이미 그곳에 사문향이 없다는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경우의 수를 떠올렸다.
쩌저저저정!!
황금빛 광룡부의 도끼날이 조금씩 깨져 나갔다.
그래도 막는다. 사문향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가능해.’
연호정의 얼굴엔 강한 자신감이 떠올랐다.
‘이길 수 있다.’
사문향의 공격을 막기 위해 사전에 공격하고, 사전에 공격하면 놈이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를 계산해 낸다.
계산한 대로 움직이면 또다시 사전에 차단하여 반격할 것이요, 계산한 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물러나 반격을 준비할 것이다.
선택과 선택이 이어지며 경우의 수를 기하급수적으로 증폭시켰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넷, 넷이 열여섯, 열여섯이 이백쉰여섯 가지의 길을 만들었다.
그 수없이 많은 선택지가 찰나지간 떠오르다가 붕괴된다.
괴물 같은 연산 능력, 인간이 지닌 두뇌 용량의 한계를 초월하는 순간이었다.
치익!
코피가 쏟아지자마자 증발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몸에서 쏟아 낸 핏물 모두가 그리 증발했다.
새빨간 안개 속에서 싸움을 이어 간다. 한계 따위는 넘어선 지 오래다. 하지만 그의 정신은, 무섭게 발전한 심검은 ‘한계 돌파’를 ‘상정 내’의 상태로 바꾸었다.
‘이긴다.’
황금빛 도끼날이 부스러지며 산란하는 빛처럼 퍼져 나간다.
‘이길 수 있다!’
사문향의 얼굴에 다급함이 어렸다.
콰드드득!!
음속 돌파의 영역에서 싸우던 두 사람이 어느새 멈추었다.
“…….”
갑작스러운 침묵이었다.
서로의 멱살을 잡고 주먹을, 도끼를 뒤로 젖힌 채로 정지한 천적들의 호흡이 정확하게 같은 순간에 멈추었다.
한 폭의 명화와 같은 순간을 자아낸 흑과 백.
후우우우웅!!
두 사람 안쪽에서 발생한 진공이 무한의 충격파가 되어 퍼져 나갔다.
콰콰콰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