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26)
흑백무제 1326화(1325/1351)
1326화. 도모(圖謀) (1)
“접근 불가!”
저 멀리서 거지가 하나가 뛰어오며 외쳤다.
“접근 불가입니다! 물러나야 합니다!”
굳이 말을 듣지 않아도 가득상은 알 수 있었다.
‘미친!’
쿠르르릉!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이 신음하고 있었다.
상공에 모인 구름이 원을 그리며 회전했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마치 하늘에서부터 시작된 용권풍이 지상으로 강림하며 구름을 뒤트는 듯했다.
‘뭐야, 시발? 천지개벽이라도 일어나는 건가?’
기상 이변이다.
비록 아직 스승의 경지를 따라잡지는 못했지만, 천재라 인정받은 그의 감각은 산동 전체로 퍼져 나가는 기괴한 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대체 무슨…….’
마치 천기(天氣)가 뒤틀리는 것 같았다.
문제는 또 있었다.
쿠르릉! 쿠르르릉!
땅이 흔들린다.
단순한 충격파라고 생각하기엔 지진의 강도가 심상치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고수들끼리 싸운다고 이런 충격파가 일지는 않는다.
자연 현상, 진짜 지진이다. 땅의 축이 비틀려 맞부딪치는 느낌, 잘 맞물려 돌아가던 기관 장치의 주요 부품 몇 개가 빠져 버린 것 같았다.
가득상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금방 멈출 것 같다. 지진은 지진이지만, 그리 심각한 건 아니야.’
어릴 적 몇 번 지진을 겪어 봐서 안다. 이번 지진은 얼마 되지 않아서 멈출 것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믿을 수가 없군. 마치 천지가 신음하는 것 같아. 단순한 우연인가?’
쿵! 쿠구궁!
지진의 굉음 위로 귀청을 멀게 할 폭음이 터진다.
상공이 비틀리는 것보다도, 지진보다도 더 무사들을 섬뜩하게 만드는 폭음이었다.
충격파가 여기까지 전해지진 않지만, 그 폭음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유례없는 힘들이 부딪치고 있다는 것을.
마치 용과 용, 괴물과 괴물이 몸싸움을 벌이는 듯했다. ‘소리’ 그 자체가 형체를 가진 것처럼 산동에 집결한 개방도들을 움찔거리게 했다.
가득상은 손으로 땅을 짚었다.
개방 비기, 항룡의 진기가 대지로 스며들며 지기(地氣)의 흐름을 읽어 내기 시작한다.
‘기가 비틀렸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기의 흐름이 태산 방향으로 모이고 있다.’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기운이란 어느 한 곳으로 향하기도 하고, 잠시 고이기도 하며, 그러다가 다시 제멋대로 뻗어 나간다. 대자연의 기가 다 그렇다.
하지만 이 흐름은 지극히 인위적이었다. 술법의 대가들이 모여 기운을 조종하기라도 한 양, 지기의 흐름이 지나치게 비정상적이었다.
‘뭔가 일을 꾸미고 있어. 사음교 무리가 이곳에서 뭔가를 획책하고 있다면 결코 평범한 짓은 아닐 터. 중원의 지맥을 뒤흔들기라도 할 셈인가.’
그렇다고 보기에는 하늘의 움직임도 심상치가 않았다.
천기를 읽을 줄 아는 건 아니지만, 기를 다루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하늘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천지가 신음하지만, 서로 다른 이유로 비틀리고 있다. 이 지진은 분명 인위적이야. 사음교 놈들이 뭔가 술수를 쓴 것이 확실해. 하지만 저 하늘은…….’
종종 저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걸 듣기는 했지만, 하필이면 연호정이 적과 싸우는 곳에서 이런 광경을 보게 되었다.
하물며 이 심상치 않은 폭음을 주고받는 때에.
‘설마하니 고수들끼리 싸운다고 하늘이 저 모양이 된 것은 아닐 터이고.’
흔들리는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던 가득상이 다시 고개를 내렸다.
“모두 들어라.”
수천 명의 개방도들이 가득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싸움의 결과는 우리의 손을 떠난 문제일 것이다. 너희도 느꼈겠지만, 우리가 돕는다고 이긴다거나 손 놓고 구경한다고 패배할 만한 싸움이 아니야. 흑제성주는 희대의 강적과 싸우고 있다.”
“……!”
“어차피 우리가 이곳에 온 것도 사음교 놈들을 막고 산동을 안정화시키기 위함이다. 산동에 침투한 교도들의 숫자는 너희도 알 터, 흑제성주가 그 많은 놈들을 상대로 이렇게까지 무리하고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가득성은 애써 진심을 숨겼다.
일천, 아니 일만의 적과 싸운다 한들 이런 폭음을 자아낼 수 있을까?
실제 싸움터에서 오고 가는 충격파는 필설로 형용키 어려운 것이리라.
‘사음교주…….’
광신삼교 최후의 적.
그가 아니라면 연호정이 이렇게까지 무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무리한다고 이 정도 무력을 뽐내는 게 가능한 일인지부터가 의아하지만.
“우리는 지금 즉시 싸움터를 우회하여 양민들의 안전을 챙긴다! 그리고 나와 용호풍운의 정예들은 태산으로 향할 것이다! 이 심상치 않은 지기의 흐름 끝에는 태산이 있어!”
초절정고수라고 지기를 민감하게 읽어 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위급한 순간 발휘되는 또 다른 천재의 재능이었다. 수많은 정보를 다루며 발달된 그의 상단전은 지닌바 재능의 한계를 열어젖히며 천하를 담아내고 있었다.
“가자!”
* * *
‘믿을 수가 없다.’
연호정을 밀치고 진기를 다독이는 사문향의 얼굴은 금이 간 유리와 같았다.
‘천적이라 한들 이렇게까지 막무가내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인가.’
혈신을 마음에 둔 자들에게 있어 재앙과도 같은 존재라는 말을 꺼내긴 했지만, 이 성장세는 지나치다.
아니, 지나치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마치 하늘의 의지 그 자체가 몸에 깃들기라도 한 듯, 놈은 무섭게 성장하여 자신의 모든 무력을 받아 내고 있었다.
“믿기지 않나?”
연호정의 목소리에 사문향의 눈이 깊어졌다.
“막후에서 삼교를 조종하고 사람을 멋대로 가지고 놀았던 세월이 얼마이던가. 백 년, 이백 년에 달하는 긴 시간 동안 사음교라는 집단을 너만을 위한 신전으로 만들었으니 이와 같은 상황이 당황스럽기도 할 것이다.”
당황스럽다? 그 정도가 아니다.
사문향은 정말 오랜만에 몸이 굳어지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상대의 성장세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면 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게다가 놈이 성장하기 직전, 현실로 구현된 그 기묘한 황룡의 존재는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로 공포스러웠다.
그렇다. 그는 공포를 느꼈다.
연호정, 아니 그가 품고 있는 의지에.
저 하늘의 뜻을 받드는 것이 아닌, 하늘의 의지마저도 자신의 것으로 삼아 무한의 재능을 휘두르는 연호정의 의지가 사문향에게 섬뜩함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이,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재미있군.”
사문향은 웃었다.
반대로 연호정의 얼굴은 굳어졌다.
츠츠츠츠.
사문향이 피워 내는 혈제기가 주변을 잠식하는 것 같았다.
“하늘을 저주하면서도 동경했고, 나아가 하늘을 발아래에 두고자 하는 나다. 그런 내가 천적의 존재를 앞에 두고 두려움을 느꼈다.”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인정한다.
적에게 쉽게 할 말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그는 두려움을 떨쳐 냈다.
“나는 신이 되려 하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신이 될 생각은 없다.”
사문향이 손으로 허공을 저었다.
“나는 실재하는 신이 될 것이며, 인간으로서 신이 되려는 자다. 인간의 감정을 오롯이 이해하기에 쾌락을 느끼고, 증오를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
“그래서 걱정했지. 삼백 년, 아니 사백 년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인간으로서의 감정에 무뎌졌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게 했어.”
사문향이 주먹을 쥐었다.
훅!
주변 공기가 주먹 안으로 압축되는 듯했다.
“너는 그런 나로 하여금 두려움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줬다.”
“…….”
“인간에게 있어 환희만큼이나 강렬한 감정이 공포요, 두려움이지. 그러한 감정을 느낀 지금의 난, 권태로 가득한 반신(半神)이 아닌 멀쩡한 인간임을 자각했다.”
“…….”
“진심으로 고맙다.”
어인 일인지 연호정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들어 주었다.
사문향의 얼굴에 쓴웃음이 걸렸다.
“사색광인은 대체 어찌 이 세상을 살아갔는지 모르겠군. 감정이란 감정은 모조리 마모되어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았을 터인데.”
“틀렸다.”
“음?”
연호정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분은 너처럼 신이 되기를 바라신 적이 없었다. 그저 인간으로서 살아가려 하셨지. 그러나 그분은 죽지도 못하셨어. 너희 혈교 놈들이 언제 또 천하를 불바다로 만들지 몰라, 인간성을 상실하면서도 꿋꿋이 대지를 활보하셨지.”
“……!”
“그리고 나를 만나, 그분은 비로소 모든 짐을 내려놓고 하늘에 오르셨다.”
하늘에 올랐다.
귀천(歸天)은 곧 죽음을 뜻한다. 하지만 사문향은 연호정의 말에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
“하늘에 올랐다…… 설마 우화등선이라도 했단 말인가?”
“그렇다.”
사문향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흔들렸다.
비웃고 싶지만 차마 비웃음이 나오지 않는 듯한 얼굴. 오늘 본 사문향의 표정 중 가장 인간적인 표정이었다.
“거짓말을 하는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앞에서?”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리 반응하는 걸 보면, 확실히 너도 평범한 사람이다.”
“…….”
“사람은 신이 될 수 없지. 신 노릇 비슷한 걸 할 수는 있어도.”
사문향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모르겠다, 도통 모르겠어.”
“…….”
“너는 도대체 누구냐? 기억을 뒤지고 또 뒤져 봐도 나는 너를 알지 못한다.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상실해 가는 와중에도 나의 능력은 비대하고 강대해졌다. 기억을 잃는 일 따위는 없단 말이다.”
“…….”
“도대체 넌 누구냐!”
“네가 그렇게 환장하는 숙적인 모양이지.”
연호정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사문향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렇군.’
그 모습을 보며, 연호정은 깨달았다.
‘이놈은 점점 사람이 되고 있어.’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연호정은 안도감을 느꼈다.
자신을 모르는 철천지수를 상대로 살수를 가하면 통쾌한가?
통쾌할 것이다. 하지만 복수의 맛이 깔끔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이러나저러나 없애 버려야 할 놈인 것은 분명하다. 내 복수심과 통쾌함 따위는 그다음 문제다. 중요한 것은 저놈을 이 세상에서 지워 버리는 것, 그로 인해 천하가 안전해지고 내 사람들이 웃으며 살 수 있다면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지금, 점차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사문향을 보며.
연호정은 실감했다.
‘의무는 버리겠다.’
천하를 위해, 내 사람을 위해.
그런 생각은 버리기로 했다.
“사문향.”
“…….”
“너는 나를 봐야 한다. 내가 너를 보며 이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것처럼.”
“……?!”
사문향의 표정이 또 달라졌다.
찌푸려진 미간, 핏발 선 두 눈.
파르르 떨리는 볼, 비틀리는 입매.
연호정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상대가 인간으로 내려올 때마다 그의 기쁨은 커져만 가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그는 깨달았다.
“점점 너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감이 잡힌다.”
“……다룬다?”
자존심에 금이 가게 만드는 한마디.
“감히, 나를 다룬다고 했느냐?”
“어.”
사문향이 인간으로 돌아오고 있으니, 연호정 역시 평소의 그로 돌아온다.
어떤 적을 맞아도 여유를 잃지 않는, 무서운 도발로 상대의 억장을 무너트려 빈틈을 유발하는 특유의 기만적 화술의 달인으로.
“사백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열중한 일이라는 게 결국 추잡한 하물로 어린 여자들 신세 망쳐 대던 거 아니었나? 그런 놈 하나 제대로 못 다뤄서야 흑백무제라는 별호가 울지.”
“……!!”
“그나저나 진짜 어처구니가 없군. 사십 년을 제대로 살면 성인으로 추앙받고, 사 년을 제대로 산 사람도 존경받을 수 있는데 너는 사백 년 동안 한 일이 고작 그따위 거였잖아?”
연호정이 백룡부로 머리를 긁적였다.
“정력은 인정한다만, 쪽팔리지는 않던?”
콰아앙!!
사문향의 손이 연호정의 목줄을 틀어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