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27)
흑백무제 1327화(1326/1351)
1327화. 도모(圖謀) (2)
목줄을 잡기도 전, 연호정은 사문향의 행동을 읽었다.
‘이거다.’
심검으로 읽은 후발선제가 아니다.
심검을 온몸에 두른 상대는 심검의 묘리를 써서 다음 행동을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사문향의 동작은 심검을 쓰지 않았다.
신왕기를 불태우지 않아도 예측이 가능한 것은 곧 상대의 표정과 감정을 읽고 있다는 뜻.
반신에서 사람이 된 사문향의 행동을, 연호정은 너무나도 익숙한 감각으로 잡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부르르르르.
연호정의 목줄을 잡은 사문향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반대로 사문향의 목을 움켜쥔 연호정의 손엔 힘이 들어갔다.
“이놈…….”
사문향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시뻘건 핏빛으로 물든 그의 눈을 마주한 연호정의 눈도 점점 붉어졌다.
“죽어라!”
사문향의 손에서 강렬한 폭발이 일었다.
쾅!
폭음과 함께 두 사람 주위로 강렬한 역장이 발생했다.
‘……!’
사문향은 눈을 부릅떴다.
연호정은 죽지 않았다. 직접 목에 손을 대고 극대 위력의 발경을 터트렸는데도 머리통이 날아가지 않았다.
‘동조(同調)?!’
심검의 동조다.
상대의 감정을 읽을 수 있으니, 어떤 심검으로 어떤 발경을 터트릴지, 어떤 식의 구결로 힘을 쓸지까지 읽어 낸다.
똑같은 심검, 동조를 이용해 그와 함께한다.
공격을 무효화시키는 걸 넘어 정신과 마음까지도.
‘들어간다.’
연호정의 눈빛이 점차 사문향의 눈빛과 똑같아졌다.
심검 동조로 그의 내부로 파고든다. 강제적인 동조화다. 불현듯 떠오른 방법이지만 반드시 먹힐 거라 확신했고, 그의 무한한 상상력은 곧 사문향의 절대적인 공력마저 헤집은 채 그의 무의식으로 파고들었다.
극단에 서 있는 두 천적의 심검합일(心劍合一).
두 사람은 껍데기만 남긴 채 서로의 머리로, 마음으로, 과거로, 영혼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 * *
“학! 학!”
거칠게 헐떡이는 사문향의 얼굴은 극도의 좌절과 공포로 가득했다.
“대단하군.”
그림자 너머에서 감탄 어린 목소리가 들린다.
들은 적 있는 목소리다. 사문향은 의아했다.
아니, 연호정은 의아했다.
‘누구지?’
그러자 또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대(二代) 무간지수(無間之秀)라…… 그래 봤자 나 때만 하겠는가 싶었거늘, 이건 기대 이상이군. 설마하니 혈장(血將) 셋을 상대로도 무사하다니.”
결코 무사하지 않다.
양팔이 부러졌고, 귀 하나가 날아갔다. 마지막 일격을 피하지 못했다면 눈알 하나도 뽑혀 나갔을 것이다.
무간동(無間洞)에서도 이렇게까지 목숨의 위협을 받은 적은 없었다. 차라리 깔끔하게 죽는 게 낫지, 이런 살 떨리는 싸움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에 든다. 너라면 우리 마가(魔家)의 마충(魔蟲)으로 키우기에 충분해.”
그림자 속에서 손이 튀어나왔다.
상처투성이의 거대한 손이.
“잠들거라. 앞으로 할 일이 많을 것이다.”
눈을 뜨니 손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연호정은 그 손을 보고도 아무런 혐오감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점점 끈적해지는 핏물의 감촉에 묘한 감흥을 느꼈다.
“과연, 대단하다.”
연호정은 본능적으로 무릎을 꿇었다.
지금은 피에 황홀해할 때가 아니었다.
“네 나이가 몇이라고?”
“올해로 마흔일곱이 됩니다.”
“허허허.”
만족감이 가득한 너털웃음은 그 감정과 달리 무척 사이하고 기괴하게 뒤틀려 있었다.
“육십 전에 혈왕(血王)이 된 자는 본교 역사에서도 손에 꼽힌다. 한데 너는 오십도 전에 혈왕을 죽일 정도로 성장했구나.”
“과찬이십니다. 혈신의 가호가 아니었다면 언감생심 어찌 제가 이 자리에 있겠습니까.”
“허허! 혈신의 가호라…… 네 녀석이 혈신에게 간택 받은 인재라는 뜻인가?”
순간 연호정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죽여 주십시오.”
곧장 절을 하고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그런 뜻이 아니었다, 교주님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등등 변명거리는 많았다. 사실이기도 했다.
그러나 연호정의 담백한 태도가 오히려 천곽룡(天槨龍)을 흡족게 한 모양이었다.
신을 모시는 자, 그저 믿고 따르며 고개를 조아리면 그뿐이다. 이렇게 재능 넘치는 녀석이 변명 없이 죽음부터 입에 담는다면, 정말이지 혈교 역사상 최고의 사제장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고작 말실수 한 번으로 너만 한 인재를 버리는 것은 우매한 짓이겠지. 일어나라.”
연호정은 일어났다.
머리가 깨져 피가 줄줄 났지만, 고통 따위는 느끼지 못했다.
“차기 교주의 스승이 되기에 충분한 역량이다. 그러나 실력과 가르치는 능력은 별개인 법, 삼 년 동안 교단에 남아 교관으로서 많은 것을 배우도록 하라.”
“영광이옵니다, 교주님.”
다시 한번 절을 올린 연호정이 고개를 들었다.
문득 느껴지는 인기척에 시선을 돌리니, 그곳에 두 명의 아이가 있었다.
한 명은 이제 소년이라 불릴 만한 나이인 듯했고, 다른 한 명은 서너 살이나 되었을 법한 어린 유아였다.
“저 어린아이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그러나 첫째는 달라.”
같은 아들인데도 차남은 어린아이라 하고 장남은 첫째라고 한다.
자식이지만 같은 자식이 아닌 것이다. 오롯한 한 명의 신을 탄생시키기 위해 혈육이라도 내치는 비정한 교단이었다.
“훗날 네가 가르칠 아이가 본교의 유일무이한 희망, 첫째 인룡(仁龍)이다.”
연호정이 다시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새 시대의 신이 될 씨앗께 삼가 인사드립니다! 사음마가 출신의 문향이 온 마음을 다해 경배드립니다!”
말을 하면서도 연호정은 기함했다.
인룡이라니? 첫째?
소년이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삼 년 동안 많은 걸 배우고 오길 바라.”
이제 열 살이나 먹었을 법한 소년의 말투라고는 감히 상상조차 못 할 만큼 어른스럽다.
연호정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다시, 어둠이 내려앉았다.
“어떤가?”
이제는 어엿한 청년이다.
열일곱밖에 되지 않았지만, 눈빛과 위엄은 수십 년간 군림한 위정자의 그것이었다.
연호정은 알고 있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위엄을 ‘따위’ 취급할 정도로 천인룡이 엄청난 인재라는 것을.
“괜찮아 보이나?”
“놀랍습니다.”
목소리가 저절로 떨려 왔다.
“고작 사흘 만에 기존 마공들을 융합하여 한 차원 높은 단계의 마학으로 일구어 내시다니, 고금의 역사를 다 뒤져도 이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런 입에 발린 공치사 따위 듣고 싶은 게 아니야.”
천인룡의 얼굴은 냉정했다.
진심으로 자신이 이룬 업적을 위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지금 자신이 만들어 낸 무공에 허점은 없는지, 진정 완성도가 괜찮은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십이초 삼십육식 부분이 걸려. 연환초로는 좋지만, 힘이 부족하다는 느낌이야. 자칫 반격에 능한 권법가와 부딪치면 파훼를 당하겠지.”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런 권법가를 만나는 건 평생에 한 번도 어렵다는 것이 연호정의 생각이었다. 그 정도로 신의 씨앗이 만들어 낸 마공의 위력은 대단했다.
“시험이 필요해. 받아 줄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연호정은 천인룡과 싸웠다.
묘한 기분이었다.
그는 사문향이었지만, 드문드문 연호정으로서의 자신을 기억했다.
그래서일까? 비록 역겹기 그지없는 철천지수의 몸으로 싸우고 있지만, 젊은 시절의 스승과 비무를 하는 이 순간이 너무나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그의 감정은, 싸움이 끝남과 동시에 사라졌다.
“쿨럭!”
피를 토하는 천인룡.
연호정은 깜짝 놀랐다.
“소교주님!”
“우웨에엑!”
한 사발의 피를 쏟아 낸 천인룡의 얼굴은 지극히 창백했다.
아직 극사에 이르지 못했음에도 극사경에 달한 자신에게 위협을 줄 만한 무공을 구사하는 천재다. 점점 흥이 올라 싸웠지만, 결국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제대로 반격하고야 말았다.
“소교주님!”
그때, 천곽룡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룡아!”
서둘러 천인룡을 부축하는 그의 얼굴에 걱정의 기색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걱정은 곧 상상을 초월하는 분노가 되었다.
“이 미친놈이 감히!”
쾅!
연호정의 머리통을 바닥에 찍고 연신 발로 밟아 대는 천곽룡의 눈에는 광기가 가득했다.
연호정은 반항하지 않았다. 반항할 실력도, 위치도 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공포에 질린 채로 교주의 무자비한 폭력을 받아들였다.
“그만하십시오.”
어느새 정신을 차린 천인룡이 천곽룡을 말렸다.
“제가 고집을 부린 승부입니다. 그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하지만 천곽룡은 화를 풀지 않았다.
“이놈을 마옥(魔獄)에 가두어라!”
한 달이 지났을까, 석 달이 지났을까.
하루가 지났을까, 사흘이 지났을까.
눈도 뜨지 못한 채 쓰러져 있던 연호정은 문득 철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꿈틀거리며 고개를 들고 어떻게든 눈을 떴다.
순간 연호정은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누군가가 열린 철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등 뒤로는 후광이 가득했다.
‘아아!’
아름답다. 숭고하다.
진정 신(神)이 강림하기라도 한 듯 성스러운 기운이 가득했다. 썩은 뇌옥 구석구석에 빛을 전하는 후광이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괜찮은가.”
무뚝뚝한 목소리에 어찌 그리 생동감 넘치는 감정이 담겼는가.
연호정은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쉽게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극사의 고수라도 내공이 봉쇄당한 채 갖은 고문을 당했다. 먹은 것도 없이 뇌옥에 처박힌 채로 오랜 시간을 보냈다. 죽지 않은 게 용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그는 일어나야만 했다.
“잠시 기다리게.”
우우우웅.
등으로 강력한 마기가 스며들었다.
극사, 아니 혈마(血魔)에 이르지 못한 마기인데도 전신에 활력이 넘친다. 그 마기가 전신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가는데, 마치 얼굴도 본 적 없는 어미의 손길과도 같았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연호정이 절을 올렸다.
“소교주님.”
“아버지는 이래선 안 되었어.”
한쪽 무릎을 꿇고 연호정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천인룡의 얼굴에는 말 못 할 감정이 가득했다.
“오직 후계를 위해, 새 시대를 위해 살아가는 분이지. 어린 시절 아버지가 보여 주던 웃음과 따뜻함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네.”
“…….”
“하지만 아버지는 달라졌어. 그분의 광기는…… 이제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게야.”
“……소교주님.”
“미안하네. 나 때문에 자네가 이런 취급을 당해선 안 되는데.”
연호정은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저의 잘못입니다. 소교주님의 옥체에 손을 대었으니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허튼소리.”
소리치지 않았는데도 어떠한 일갈보다 강렬하다.
천인룡이, 신(神)이 말했다.
“나는 소교주고 자네는 혈왕이지. 그러나 나나 자네나 똑같은 사람일세. 우리는 결단코 신이 될 수 없어.”
“소교주님?!”
“시간이 좀 걸릴 거야. 내 있는 힘껏 아버지를 설득하고 있으니, 자네는 아무 걱정 하지 말고 몸을 보하도록 하게. 간수에게 따로 챙겨 달라 말은 해 놨네.”
“소교주님.”
“자네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어. 못난 소교주 때문에 자네가 이런 꼴을 당하는군. 정말이지 면목이 없네.”
눈물 때문에 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때, 연호정은 결심했다.
‘이분이야말로 나의 주인이시다.’
혈교를 집어삼키기 위해 마충으로 키워진 사음마가의 세작, 이 대 무간지수.
그따위 과거는 이제 아무 의미도 없다.
연호정에게 있어 천인룡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신이었다. 그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니 영혼도 바칠 수 있다.
진정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