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28)
흑백무제 1328화(1327/1351)
1328화. 도모(圖謀) (3)
세월이 흘렀다.
혹독한 날씨는 세상을 할퀴면서 성장을 촉진시켰다. 황폐한 땅을 기어이 뚫고 올라온 잡초들은 아직도 살아 있었다.
“예?”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소교주님?”
천인룡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흐릿해 보였다.
“나는 모르겠네.”
“…….”
“시간이 흘러 더 많은 것을, 더 깊게, 더 넓게 볼 줄 알게 되면 답이 나올 거라고 믿었어. 하지만…….”
“…….”
“갈수록 모호해지고 있네.”
연호정이 조심스레 말했다.
“송구하오나 소교주님. 혈교 천하를 위해 불신자들을 소각하고 그 땅 위에 새로운 씨앗을 발아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그들을 다 죽이면서까지 말인가?”
“……!”
“불신자라 해도 그들은 사람이야. 자네나 나와 같은.”
“소교주님!”
연호정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어찌 그런 천한 자들과 소교주님이 같은 사람일 수 있습니까? 소교주님께서는 위대한 신의 씨앗이십니다. 다시는 그런 말씀 마십시오.”
천인룡이 굳은 눈으로 연호정을 노려보았다.
“자네도 그러한가?”
“예?”
“삼 년 전, 내 잘못으로 자네가 뇌옥에 갇혀 있을 때 내가 말했었지. 자네나 나나 같은 사람이라고.”
“……!”
“사람은 사람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없어. 나는 그것을 깨달았네. 그리고 나의 뜻을 자네도 알아줄 거라고 생각했다네.”
연호정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송구하옵니다! 미천한 소신이 소교주님의 높으신 뜻을 어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불학무식한 놈이라도 하나는 알고 있습니다.”
고개를 든 연호정의 두 눈에 광기가 깃들었다.
주인을 향한 광기 어린 충성, 주인을 진정 신으로 아는 광기 어린 신심.
“소교주님께서는 하늘이 내린 분이십니다. 저 하늘이 신으로 점지한 단 한 분의 천자(天子)이십니다!”
“…….”
“부디 그런 황망한 말씀은 마십시오, 소교주님. 소교주님의 어깨에 드리워진 짐이 너무나도 크옵니다만, 소신이 목숨 바쳐 소교주님을 도울 것입니다!”
천인룡의 얼굴이 허탈해졌다.
“나는 자네를 충신이기 전에 내 친구로 생각했다네.”
“……!!”
“한데 이제 보니, 자네 역시 나를 그저 한 명의 신으로만 보고 있었어.”
“소, 소교주님?”
“혈교 천하? 그래, 이 세상을 하나로 만들 수는 있겠지. 내게는 그러한 자신감이 있네. 하려고만 하면 못 할 것도 없다는 심정이야.”
천인룡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래서야 이 세상이 세상이라 할 수 있겠나?”
“소교주님!”
“차라리 천하제일의 권력을 얻기 위해 천하 일통을 바란다면, 그것은 이해할 수 있네. 사람이라면 누구나 힘을 원하니까. 하지만 이건 권력을 얻기 위함이 아닌 신으로서 군림하기 위한 길이야.”
“…….”
“나는 비록 혈교의 후계자이지만, 사람의 자유 의지가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네. 혈신을 믿지 않으면 그들의 사후 세계가 엉망진창이 되어 버리는 것인가? 그들이 혈신을 위해 봉사하지 않으면 진정 죄인이란 말인가?”
“소, 소교주님?!”
“사람은 저마다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며 사네. 그 믿음과 함께 생(生)은 장절한 날개를 펴고 이 땅 위를 수십 년간 배회하지. 인생이란 그런 것이 아니던가?”
천인룡의 눈이 독해졌다.
“자네가 나를 신으로 여기는 것을 알고 있네. 신의 씨앗이라고 불리는 내가, 자네에게는 이미 신인 것이지.”
“……!!”
“아버지께서 멀쩡히 살아 계시는데도.”
연호정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자네는 아버지를 무시하고 나를 신으로 섬기고 있어. 같은 교단에서조차 서로 믿는 바가 이리 다르거늘, 다른 세상의 사람들을 힘으로 짓밟아 혈신을 위한 제물로 바친다? 이게 정녕 맞는 일인가?”
“소신은…… 잘 모르겠습니다.”
정녕 모르겠다.
소교주님은 신이다. 백번 양보해서 아직은 신의 씨앗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분께서 어찌 이리 참담한 발언을 입에 올리시는가. 신께서 어찌 인간과 같은 세상으로 내려오려 하시는가.
연호정은 정말이지 알 수가 없었다.
천인룡이 한숨을 쉬었다.
“이만 쉬도록 하게.”
그 말을 끝으로 천인룡은 교를 나갔다.
단순한 외출이었지만, 연호정은 그를 따라가고 싶었다. 하지만 천인룡은 그것을 거부했다.
연호정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찝찝함을 지울 수 없었다. 이번 외출이 어쩐지, 혈교의 운명을 크게 바꿀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의 예감은 적중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실로 오랜만에 하는 비무다.
연호정은 기뻤다. 지난 몇 년간 주군과 자신의 사이가 소원해졌음을 느꼈다.
한데 몇 년 만에 대뜸 비무를 하자고 부르시더니, 놀랍도록 대단한 무공을 선보이셨다.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이것은…… 전혀 새로운 무공입니다.”
“새롭다?”
“그렇습니다. 공격과 방어, 회피와 반격에 있어서 완전무결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마공의 출력으로 끌어낸 힘이 아닌, 지극히 자유로운 투로만으로 어찌 이런 수법들이 탄생할 수 있는 것인지요?”
연호정은 진심으로 탄복했다.
“진정 소교주님께서는 하늘이 내린 재인이십니다.”
차마 신이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그 호칭을 좋아하지 않으신단 걸 알기 때문이었다.
천인룡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몇 합이나 상대할 수 있겠나?”
“소교주님께서는 이미 혈마의 경지에 올라 본교의 마공을 집대성하신 것도 모자라,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신 분입니다.”
연호정은 고개를 숙였다.
“소신으로서도 감히 십 합을 받아 낼 수 있을까 싶습니다.”
천인룡이 쓴웃음을 흘렸다.
“그런가.”
“소교주님께서 근래 오색지옥공을 공부하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순간 천인룡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소교주님의 안위를 위해 허락도 없이 이것저것 알아보았습니다. 부디 죽여 주십시오.”
“……문향.”
연호정은 가슴이 진탕되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얼마 만에 듣는 이름인가. 소교주님께서 얼마 만에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시는가.
“예, 소교주님.”
“오색지옥공은 악마의 무공이야. 사람이 연마할 수 없는, 이름 그대로 지옥의 마공이지.”
“…….”
“하지만 왜인지…….”
천인룡의 얼굴에 웃음기가 어렸다.
“빛이 보이는 것 같네. 오색지옥공을 연마할 수 있을 것만 같아.”
“소교주님이라면 능히 가능하실 것이옵니다.”
아부가 아니었다.
연호정은 천인룡의 재능을, 하늘이 내린 능력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런 분께 오색지옥공 따위는 흥미 있는 공부거리 이상도, 이하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진심으로 그리 믿었다.
“이만 들어가서 쉬게.”
“소교주님.”
어째서일까?
연호정은 불현듯 치솟는 만용을 짓누를 수 없었다.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소신께 술을 따라 주실 수 있으신지요?”
천인룡의 얼굴이 조금 더 환해졌다.
신으로 모시기만 할 뿐, 단 한 번도 인간적인 교류를 청한 일이 없는 수하다. 그런 수하가 술을 따라 달라 하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본교에서 가장 좋은 술을 대접하겠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소교주님은 사라졌다.
혈교의 보물, 혈옥과 함께.
“쓸모없는 놈!”
더 늙고, 더 약해진,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광기는 더 깊어진 천곽룡의 두 눈은 천하 누구라도 마주하기 힘들 만큼 위험해 보였다.
“대륙을 향해 위대한 일 보(一步)를 내디딜 이 중요한 시기에 소교주를 놓쳐! 찢어 죽여 마땅할 놈!”
“죄, 죄송합니다.”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미 온몸이 만신창이였다.
천곽룡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연호정을 박살 냈다. 팔다리가 다 부러지고 얼굴이 퉁퉁 부어올랐다. 사람 꼴이 아니었다.
“죽일 놈! 이 개만도 못한 놈!”
퍽! 퍼벅!
기공을 써서 후려치지 않는다. 그래서 더 고통스럽다.
결코 쉽게 죽이지 않겠다는 교주의 의지가 느껴졌다.
그런 와중에도 연호정은 소교주를 생각했다.
‘소교주님. 소교주님.’
그분은 이 중요한 시기에 어디로 가신 것일까.
밥은 잘 드시는 걸까? 하늘에 이른 무력을 거머쥐셨으니 누구라도 쉬이 건드리진 못하겠지만, 혹시라도 나쁜 놈들의 함정에 빠져 사경을 헤매고 계신 것은 아닐까?
연호정은 눈물을 흘렸다. 교주의 무자비한 폭행은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았다.
아니, 이렇게라도 박살이 나지 않았다면 스스로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신이시여! 신이시여!
“이놈을 마옥에 가두어라! 절대 죽게 내버려두지 마라! 내 아들을 찾아 돌아오는 그날, 가장 끔찍하게 죽일 것이다!”
그렇게 또 시간이 지났다.
모든 것을 잃은 와중에도 그는 끈질기게 목숨줄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리고.
하늘은 다시 그를 살려 냈다.
“괜찮은가.”
익숙한 음성이었다.
너무나도 인간적인, 눈을 뜨지 않고서는 도무지 견딜 수 없는 그 목소리.
“문향.”
천천히 눈을 뜬 연호정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소교주님.”
목소리가 다 갈라졌다. 바짝 마른 입술이 쩍쩍 갈라지며 피가 배어 나왔다.
그의 앞에는 천인룡이 있었다.
언제나처럼, 언제나와 같은 모습으로.
“내가 전생에 자네에게 어지간히 몹쓸 짓을 했나 보네. 나 때문에 또 이런 신세가 되었나.”
“아닙니다…….”
단 한시도 소교주님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내 몸뚱이 따위,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 그저 소교주님이 멀쩡한 모습으로 이렇게 나타나 준 것만으로도 그는 하늘에 감사했다.
우둑! 우두둑!
부러졌다 잘못 붙어 버린 팔다리가 본래대로 돌아왔다.
그 잠깐 사이 또 얼마나 대단한 성취를 이루신 것일까? 순식간에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변화였다.
“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홀린 듯 세상에 나갔으나 줄곧 자네와 내 사람들이 마음에 걸렸네. 설마 싶어 돌아왔는데…….”
“저는 괜찮습니다, 소교주님.”
연호정이 환하게 웃었다.
“신께서 돌아오셨으니 본교도 드디어 완벽해졌습니다.”
“…….”
“이제 천하에 거대한 족적을 남길 때가 되었습니다, 소교주님.”
“나는 그러지 않을 것이네.”
“예?”
“아니.”
천인룡의 두 눈이 형형해졌다.
연호정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나는 본교를 막을 것이네.”
“소, 소교주님?!”
“자네에게 이해를 바라진 않겠네. 하지만 나는 내 뜻을 거둘 생각이 없네.”
“……!!”
“과거 스승님을 만났을 때부터 깨달은 게 있네. 아니, 진즉 깨닫고 있었던 것을 그제야 명확히 보기 시작했네. 그리고 세상에 나가 많은 것을 보고 온 나는, 비로소 확신하네.”
천인룡의 얼굴에 결심의 기색이 어렸다.
“본교는 잘못되었어.”
“소교주님…….”
“나는 목숨을 걸고 본교를 막을 것이네.”
연호정의 얼굴이 멍해졌다.
목숨을 걸다니? 아니, 목숨을 걸고 뭘 해? 본교를 막아?
왜?!
“그 어인 황망하신…….”
“말했듯, 자네의 이해를 구하고 싶지 않네. 알아주기를 바라지만, 자네와 나는 달라. 굳이 이해할 수 없는 사안을 두고 억지로 이해하라고 명령을 내리고 싶지도 않아.”
“…….”
“그저, 나는 그렇게 할 거라는 것만 알아 두게.”
“어, 어째서……!”
“설명하지 않겠네.”
천인룡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명하지 않겠어.”
연호정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신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다. 몸도, 마음도, 영혼도, 후생도, 할 수 있다면 천하도 바칠 수 있다.
하지만 신은 신이 될 생각이 전혀 없다.
연호정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무언가가 조금씩 조금씩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은 그만을 위해 살았던 것이 아니라, 혈교의 왕으로서 그와 함께하기를 바랐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