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29)
흑백무제 1329화(1328/1351)
1329화. 도모(圖謀) (4)
“그랬단 말이지?”
그의 음성은 여전히 기괴했다.
연호정은 소름이 오싹 돋는 것을 느꼈다.
아무런 감정이 깃들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상상 초월의 광기가 묻어 나왔다. 혈교 천하를 위해 영혼까지 불사르고 있는 혈교주조차도 감히 비교할 수 없는 광기가 그 안에 있었다.
원래 이분은 이런 사람이었던 것일까?
“소교주가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을 줄이야. 이래서 세상일이라는 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란 것이지.”
“…….”
“사문향.”
“말씀하십시오.”
“너는 본가가 기른 마충 중 가장 뛰어난 녀석이다. 너의 재능은 실로 하늘에 닿은 것이지.”
“과찬이십니다.”
“그러나 무의 재능과 성정은 다른 것이지. 네가 소교주에게 진심으로 충성을 바친 것을 알고 있다.”
또 한 번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연호정은 사죄하지 않았다. 죽여 달라 외치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한 눈으로 사음마가의 가주를 바라보았다.
가주는 그런 연호정의 태도에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악귀의 미소였다.
“아주 좋다.”
“……?”
“그래서 너를 마충으로 키운 것이야.”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마가의 마충으로서 혈교 본단에 사음의 씨앗을 뿌려야 할 자신은 어느덧 혈교의 정보도 마가에 주지 않았다. 그저 소교주를 위해 충성할 뿐.
당연히 가주는 자신을 질책해야 했다. 분노해야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멱살을 잡고 흔들어야만 했다.
“혈교주는 만만한 사람이 아니지. 하물며 역대 최고의 재능을 타고났다는 소교주는 말할 것도 없어. 특히 소교주가 문제였다. 그는 너와 달리 재능과 천품을 고루 타고난 천재니까.”
“……!”
“너의 성정, 너의 영혼은 반드시 소교주를 향하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연호정은 믿을 수 없었다.
그것을 가주가 어찌 알았을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다. 한데 자신이 마충이 아닌 혈왕으로서 소교주를 위해 진심으로 충성을 바치리란 걸 그 옛날부터 알고 있었단 말인가.
“지금 이렇게 보니, 이제야 마충으로서 온전한 임무를 맡을 준비가 되었음을 알겠다.”
“예?”
“소교주를 도와라.”
“……?!”
“그를 도와 혈교 본단을 막아라.”
“가, 가주님?!”
“교단의 힘이 약해져야만 웅크렸던 우리도 고개를 쳐들 수 있다. 너는 그것을 위해 키워진 무간지수이니라.”
“……!!”
“또한, 굳이 마충으로서 그 일을 할 필요는 없다. 지금의 너는 소교주만을 위해 살아가는 놈이지. 그리고 소교주는 혈교를 막으려 하고 있다.”
“…….”
“네 마음은 이미 소교주와 함께하기를 바라고 있어. 그럼 그리하면 된다.”
연호정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도대체 이자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내다보고 사는 것인가? 이자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혈교 본단의 힘이 약해지면, 마가의 힘을 기반으로 새로운 교주가 될 생각인 것일까?
설령 그렇다 한들, 다른 두 마가가 사음마가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광혈과 신화의 힘은 사음에 비해 모자람이 없다.
이자는 신이 되려는 자인가? 아니면 단순한 악마인가? 도대체 그의 머릿속엔 어떤 미래가 펼쳐져 있는 것일까?
하지만 연호정의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가 눈을 빛냈다.
가주의 뜻이 아닌, 난생처음 제 뜻대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자 하는 마충의 안광이었다.
“그리하지요.”
“자네가 여긴 어떻게……?”
수개월을 찾아다닌 끝에 대륙 북부에서 자신의 신과 만난 연호정은 곧장 무릎을 꿇었다.
“소교주님.”
“내가 이곳에 있는지 어떻게 알았나?”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
“소신 사문향, 성심을 다해 소교주님께 간언 드립니다. 이미 저의 목숨은 소교주님의 것이니, 제 불충한 발언으로 인한 결과는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부디 저의 간언을 들어 주십시오.”
“……해 보게.”
“혈교를 무너트리십시오.”
천인룡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연호정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소교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소신 사문향, 소교주님이 원하신다면 선봉이 되어 그들과 맞서 싸울 것입니다.”
“문향.”
“다만, 무공을 익히지 않은 혈교의 교도들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그들은 평생 혈신을 떠받들며 살아온 이들, 혈교가 무너지면 그들은 갈 길을 잃고 정처 없이 천하를 헤매다가 비참하게 죽어 갈 것입니다.”
“…….”
“그들을 위해 교주가 되어 주십시오.”
천인룡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는가?”
“알고 있습니다.”
“혈교를 막는 것과 혈교를 무너트리고 교주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야.”
“알고 있습니다.”
“진정 알고 있는가? 나는 가만히 있어도 교주가 될 수 있었어. 그 자리를 박차고 세상에 나온 것은 본교의 교리와 목표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야.”
“…….”
“혈교를 무너트리고 새 교주가 되면, 나는 교주 자리를 일찌감치 찬탈하기 위해 무림과 손을 잡은 권력에 미친 자가 되는 것일세.”
“소교주님께서 가시는 길은 그런 길입니다.”
“……!”
“혈교를 막겠다는 것은 교주님, 나아가 혈교의 모든 마인과 대적하겠다는 뜻. 결국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람들은 소교주님을 찬탈자로 여길 것입니다.”
“…….”
“이왕 찬탈자가 되실 거라면, 혈교 천하가 아닌 그저 혈교를 위해 살아가 주십시오.”
연호정은 눈을 감았다.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다.
죽어도 상관은 없었다. 이미 소교주가 아니었다면 몇 번이나 죽었을 목숨이었다.
그래도 이분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셨으면 했다. 그는 진심으로 그리 바랐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돌아가게.”
“소교주님?”
“이만 돌아가게. 이제부터 나와 자네는 서로 모르는 사이일세.”
연호정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을 맛보았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소교주님!”
“자네는 언제나 나를 위해 살았지. 자네 같은 충신은 달리 없었어. 진심일세.”
“……!”
“하지만 자네는 단순히 나를 신으로서 섬기는 것이 아니었네. 인간 천인룡을 흠모하기만 했던 것이 아니었어.”
천인룡의 눈은 어느새 깊고 맑게 변해 있었다.
“자네는 신이 된 나와 함께 혈교의 제왕이 되어 살아가기를 꿈꾸었지.”
“……!!”
“사음마가의 마충으로서 말이야.”
연호정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자신이 마충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셨을까? 사음마가에서 파견한 세작이라는 것을, 소교주님은 언제부터 알고 계셨던 것일까?
“자네가 마충임을 알았어도 나는 개의치 않았네. 자네는 사음의 세작임에도 진심으로 나에게 충성을 바쳤어. 그 마음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내 어찌 모를 수 있단 말인가.”
“…….”
“그러나 자네와 나는 가는 길이 다르고 바라보는 곳이 달라. 자네는 결코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끊임없이 나를 흔들려 할 것이네.”
“소, 소교주님!”
“아니라고 말하지 말게. 자네의 충성은 진짜였지만, 자네는 언제나 내게 원하는 것이 있었어. 그리고 나는 자네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없는 사람이라네.”
“…….”
“내가 자네에게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모를 것이네. 자네 덕분에 나는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어. 그러나 나와 자네는 가는 길이 달라.”
“……소교주님.”
“신이 되지도, 혈교를 휘어잡지도 못할 사람은 이만 잊고 자네 자신을 위해 살아가게. 자네는 지나치게 오랫동안 남을 위해 살았네.”
연호정의 눈이 충혈되었다.
그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자신이 소교주에게 화를 내는 순간이 오게 되리라는 것을.
“어째서! 이리 고집을 부리시는 겁니까!”
연호정은 포효하듯 외쳤다.
처음으로 소교주에게 서운함을 비쳤다. 그리고 분노를 드러냈다.
말을 하면서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쌓이고 쌓인 감정을, 부서진 미래의 편린들을 담아 외쳤다.
천인룡은 여전히 차분했다.
아니, 더 차분해지고 더 평온해졌다.
그렇게 한참을 쏘아 댄 연호정은 숨을 헐떡였다. 얼마나 소리를 질렀는지 목이 다 막혔다.
“혈교의 제왕이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무공에 더 힘을 쏟게. 자네의 재능은 대단한 것이야. 십 년만 노력하면 아버지를 제외한 최고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네.”
“소교주님!”
“아니면, 혈교의 신이 되고 싶은가?”
순간 연호정은 말을 잇지 못했다.
신이 되고 싶냐고? 한 번도 그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그에게 신은 천인룡, 소교주였으니까.
하지만 입이 쉬이 열리지 않았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고, 나를 그런 놈으로 보고 있었냐고 반문할 수가 없었다.
그저 가슴이 두근거렸다.
호흡이 빨라지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소교주가 아닌 내가 신이 된다고? 정말 그럴 수 있다고?
“내가 잘못 알고 있었군.”
천인룡이 쓴웃음을 흘렸다.
“나를 신으로 모시는 혈교의 제왕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었어, 자네는.”
말하지 마.
말하지 마!
“자네는 본인이 신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신의 대리자라도 되고 싶었던 것뿐이었나.”
연호정은 그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속내를 들켜서 부끄럽다? 화를 주체할 수 없다?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냥 그 순간 그렇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천인룡의 얼굴을 볼 수도 없었고,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었다. 그저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만 나를 잃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뒤에서 천인룡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어둠이 되어 신의 시선을 피했다.
다시, 한 달 만에 교단에 들어와 교주를 영접했다.
“현재 소교주는 저 먼 대륙, 섬서라 불리는 땅에 있습니다.”
“…….”
“소교주는 아직도 큰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갈피를 못 잡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
“교주님을 그리워하고 계셨습니다.”
“……!”
“소신, 감히 말씀드리옵니다. 비록 소교주는 마음을 정하지 못했으나 교단을 위해 대륙의 정보를 직접 모아 두고 계셨습니다.”
연호정은 품에서 두툼한 서류 뭉치를 꺼내 들었다.
사음마가가 대륙 정벌을 위해 비밀리 수집한 정보 문서들이었다.
“소교주는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뿐, 마음이 떠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렇듯 단신으로 대륙을 떠돌아다니며 직접 정보를 캐내었으니, 교주님께서 결단을 내리신다면 소교주 역시 그에 응할 것이옵니다.”
천곽룡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연호정은 확신했다. 이제 천곽룡에게 대륙 정벌 따위는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소교주가, 혈교의 신이 될 남자가 배신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교주는 기뻐했다. 자신이 실패해도 자식이라면 반드시 혈교 천하를 이룰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그로서는, 소교주가 적극적으로 정보를 모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크게 안도했을 것이다.
“수고하였다.”
“감사합니다.”
“너는 이 길로 사음으로 돌아가거라.”
“예?”
“삼대마가와 함께 대륙을 정벌할 것이다. 너는 소교주의 교관 노릇을 했던 놈이다. 본교 병력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차라리 사음과 함께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천곽룡이 턱을 쳐들었다.
“이번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면 소교주의 개인 호위로 발탁하겠다.”
연호정이 고개를 조아렸다.
“교주님의 명을 받듭니다.”
그렇게 전쟁이 터졌다.
훗날 대륙인들이 혈교지란이라 명명하게 된 전쟁이.
그리고 그 전쟁은, 많은 이들의 운명을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