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30)
흑백무제 1330화(1329/1351)
1330화. 도모(圖謀) (5)
혈교의 공세는 무서웠다.
오랜 시간 대륙 정벌을 준비한 혈교의 병력은 무림을 몇 번이나 갈아엎을 만큼 대단했다. 당연히 그 병력엔 삼대마가도 포함되었다.
삽시간에 대륙 북부가 밀렸다. 고고하다는 소림마저도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혈교는 발 빠른 공세를 취하면서도 가장 먼저 소림부터 멸문시키고자 했다. 그들의 터전이 아닌, 소림의 이름을 단 무승과 속가 문파는 하나도 남기지 않고 쓸어 버리는 것이 목적이었다.
무림의 정신적 지주인 소림을 무너트리면 그 충격이 대륙을 휩쓸 것이다. 혈교의 대륙 정벌이 한층 쉬워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나 혈교의 대륙 정벌은 남부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천하 만민이 신음하는 그때, 헤아릴 수 없는 양민들이 공포에 떨며 신을 찾던 그때.
바로 그때, 천인룡이 나타났다.
“헉! 헉!”
무림 병력과의 혈투로 치명상을 입은 연호정은 본단 쪽으로 후퇴했다. 길이 그곳밖에 없었다.
‘소교주님.’
그 지경이 되어서도 그는 천인룡을 떠올렸다.
‘엄청나게, 정말 엄청나게 강하구나!’
소교주는 강했다.
그것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했다.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힘으로 혈교 정예들을 며칠 새에 쓸어 버리더니, 무림 병력과 함께 단숨에 광혈마가를 분쇄하고 신화마가를 뒤엎었다.
그 과정에서 혈교의 십삼혈왕(十三血王), 달리 십삼사제장(十三司祭長)이라 불리는 이들 중 다섯이 죽었다.
죽은 혈왕 중 둘은 무림의 최고수에게 격살당했지만, 셋은 소교주의 손에 죽었다. 그것도 각개 격파가 아닌, 단번에 셋을 상대하여 열 합 만에 지옥으로 보내 버렸다.
신(神)의 무력이었다. 사색의 광채를 피워 올리며 혈교 고수들을 격파하는 소교주의 모습은 진정한 무신(武神)이 어떤 존재인지 여실히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본 연호정은, 마침내 깨달았다.
사색의 광채 너머에 도사리고 있는 지옥의 힘.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그 섬뜩한 기운은 바로 오색지옥공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신공이라는 것을.
인간은 익힐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설령 반선이라도 익힐 수 없다는 천하 최악의 마공을 기어이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이다.
‘이러다 진짜 죽겠어.’
공력이 바닥을 드러냈다.
혈음공(血飮功)으로도 상처가 치유되지 않는다. 생명력까지 고갈되고 있다. 제때 치료받지 못하면 진짜로 죽을 것이다.
‘더 이상 죽고 싶지 않아.’
죽어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반드시 살 것이다.
살고, 또 살고, 또 살 것이다. 그래서 소교주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을 때까지 나 자신을 갈고닦을 것이다.
나를 배신한 소교주, 나에게 모욕을 준 소교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충성을 맹세하는 소교주를 당당히 보기 위하여.
‘아니, 그게 아니야.’
연호정은 오랜 세월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을 알려 준 것이 바로 소교주였다.
‘나는 소교주와 마주하기 위해서만 살아가지 않을 것이다.’
당당히 소교주와 같은 위치에 올라서고 싶다. 그 마음은 진심이다.
하지만 그건 소교주에게 인정받고 싶기 때문이 아니다.
‘혈교주도, 소교주도 없는 혈교가 빈껍데기와 같다면, 그 위(位)는 공백이다.’
신좌(神座)의 공백.
신의 씨앗이 사라진 그곳에 먼저 발을 들인 자는 곧 새로운 신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연호정은 그것에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
소교주를 향한 충성조차 ‘따위’로 취급할 만큼.
그렇게 생각을 거듭하길 얼마, 비로소 본단이 보였다.
“……!!”
연호정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본단 병력은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소교주는 반나절 전, 무림 병력과 함께 혈왕들을 상대했다. 당연히 소교주가 자신보다 먼저 이곳에 오진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림 병력이 혈교 본단을 쳐서 궤멸시켰단 말인가? 그놈들에게 그만한 힘이 남아 있었다고?
“왔느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보니, 사지가 기괴하게 뒤틀린 무사 하나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위 무사 복장이다. 감히 자신에게 쓸 만한 말투도, 지을 만한 표정도 아니다.
그러나 연호정은 알 수 있었다.
그 무사의 눈빛 속에 드리워진 알 수 없는 광기를. 대(代)를 넘겨서라도 숙원을 이루고자 하는, 저 혈교주 천곽룡 이상의 맹목적인 목표를 지닌 남자가 그곳에 있음을.
“가주님……?!”
“역시 내 눈이 옳았어. 네놈은 끝까지 살아남았군.”
다 죽어 가는데도 목소리에 흔들림이 없다.
“도대체 어떻게?!”
“광혈(狂血)의 이혼(移魂)과 신화(神火)의 화정(火精)을 훔쳐 냈지.”
“……!!”
연호정은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광혈의 이혼대법도, 신화의 화정술도 불로불사를 이루기 위한 방법이다. 그 모든 것이 혈교를 위해 만들어진 역천의 술수들이었다.
그러나 광혈이혼도, 신화화정도 완성되지 못했다. 완성은커녕 제대로 된 진전도 보이질 않았다. 연호정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
미완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할 지경의 술수들을 훔쳐서 타인의 몸에 자신의 영혼을 쑤셔 넣었단 말인가?
“광혈도, 신화도 우리 못지않은 야심을 지니고 있었다. 이혼대법과 화정술은 이미 상당한 진척을 보였어. 아직 완전하진 않지만.”
“그렇다면…… 그들 역시 교주위를 노리고 있었다는 겁니까?”
“어디 교주위뿐이겠느냐.”
혈교 천하.
이렇든 저렇든 그들은 혈교의 자식들이다. 제 가문을 혈교 본단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을 떠나, 혈교 천하를 이루겠다는 마음만큼은 진심이란 뜻이었다.
“광혈과 신화는 우리보다 강해.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들에게 뒤지지 않는 공부가 있다. 그게 무엇인지 아느냐?”
“…….”
“침심안(浸心眼)이다.”
“침심안……?”
“그것은 이혼대법이나 화정술처럼 배운다고 아는 게 아니야. 저 신화의 성력처럼 타고나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설명할 시간이 없다. 네가 나를 받아들이면 자연스레 알게 될 터.”
“……?!”
“그저 이것 하나만큼은 알아 두어라. 너는 사음 역사상 가장 뛰어난 침심안을 타고난 자다. 내가 낳은 수백 명의 자식 중 너만 한 놈은 없었어.”
“…….”
“사음의 정체성과 너무나도 어울리는 능력이지.”
가주가 웃었다.
여전히 소름 끼치는 웃음이었다.
“나를 받아들여라. 나는 네 속에 들어가 너와 함께 또 다른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연호정은 침착함을 되찾았다.
본인 역시 죽어 가면서도.
“소교주가 왔습니까?”
“그렇다.”
“……!”
연호정은 처음 보았다. 가주가 누군가를 두려워하는 모습을.
가주의 두 눈에 떠오른 감정은 분명한 공포였다.
“소교주는 내 예상보다 훨씬 더 강했다. 그 강함은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어. 이미 인간의 경지를 아득히 넘어, 신의 힘을 휘두르고 다녔다.”
“…….”
“그가 존재하는 한, 혈교는 천하를 얻지 못한다. 적어도 당대에는 불가능할 것이다.”
“…….”
“그러나 우리는 가능하다. 내가 네 몸으로 들어가 침심안의 재능을 타고난 놈들을 생산하고, 대를 이어 힘을 키워 간다면 반드시 혈교는……!”
“묻겠습니다.”
연호정은 일생일대의 도박 수를 던졌다.
“당신의 목표는 사음이 혈교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본인의 목숨을 부지하는 것입니까?”
“……?”
“시간이 없다 하셨으니 속히 답을 주셔야 할 겁니다.”
연호정의 두 눈에 떠오른 기괴한 광채.
그것은 사음마가의 가주이자 초대 무간지수를 능가하는 광기였다.
멍하니 연호정을 보던 가주가 폭소를 터트렸다.
“너의 욕망은 나의 그것보다 훨씬 더 깊고 날카로우며 거대하구나.”
“혈교입니까? 아니면 목숨입니까?”
“그리 물어볼 필요도 없다. 너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사람에서 악귀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저는 가주님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의 힘과 지식은 받아들이고 싶겠지.”
“혈교 천하를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네가 신이 되기 위해서이지.”
“같은 의미입니다.”
“나 역시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사음의 꽃을 피울 자는 내가 아니라 너였다는 것을.”
소멸의 순간을 인정하면서도 웃는다. 소교주의 불가해한 무력 앞에 두려움을 느꼈으면서, 본인의 죽음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그것이 사음이다.
내가 죽어도 내가 뿌린 수많은 씨앗 중 하나가 언제고 최고가 될 것이란 믿음, 확신.
그 광기는 마치 후계자를 향한 천곽룡의 광기와 비슷했다.
“내 백회(百會)에 손을 대라.”
연호정은 그가 말한 대로 순순히 손을 움직였다.
가주가 외쳤다.
“반드시 사음의 천하를 이루거라!”
“걱정일랑 접어 두시고 영면하십시오.”
“크하하하!”
가주의 몸이 찬란하게 빛났다.
후우우욱!
백회를 통해 빠져나온 무언가가 연호정의 몸 전체로 퍼져 나갔다.
‘아아!’
찰나를 수백, 수천 번 쪼갰대도 믿을 만큼의 찰나.
연호정은 보았다. 가주의 욕망을.
연호정은 이해했다. 가주의 공부를.
연호정은 받아들였다. 가주의 지식을.
그리고 연호정은 깨달았다.
‘침심안.’
마음을 파고들어 사람을 조종하는 힘이다.
유사 이래 수많은 위정자가 타고난 능력이었다. 실제로 수많은 사람이 크든 작든 그러한 능력을 타고난다.
강력한 위엄으로 타인을 조종하듯 휘두르는 자, 부드러운 성품으로 타인을 알아서 굴복시키는 자, 친근함으로 타인이 알아차리지도 못한 새 자신에게로 복속시키는 자.
위정자의 자격. 인간 중의 인간.
대를 이어 생명의 순환을 이어 가는 것이야말로 영생이다. 사음은 그 순환을 촉진시켜 한 대에 수많은 생명을 생성하고, 그중 침심안을 타고난 자들을 무간동에 집어넣어 가장 재능 있는 자를 선별한다.
침심안을 타고난 자들은 저마다 능력이 달랐다. 누군가는 말로써 사람의 언행과 사상을 조종하고, 누군가는 몸짓으로, 누군가는 눈빛으로, 또 누군가는 성품만으로 조종할 수 있다.
그렇기에 침심안에 정통할수록 영력(靈力)이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한다. 거대해진 영력은 상단전을 저 술사들처럼 주(主) 단전으로 만들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갖추게 된다.
그렇다면 나는?
‘내 침심안은 바다와도 같다.’
연호정은 가주가 어떻게 이혼대법을 썼는지, 어떻게 화정으로 목숨을 이어 갔는지 알았다.
가주의 역량으로는 목숨만 붙여 놓는 것 정도가 한계였다. 하지만 가주보다 훨씬 더 깊은 영력을 지닌 그는 죽어 가는 몸뚱이를 되살릴 수 있다.
화아아악!
화기가 모였다.
평생을 연마해 왔던 것처럼 손쉽게 형성했다.
우둑! 우두둑!
몸 곳곳이 뒤틀리다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럴수록 생명력이 차오른다.
그 순간, 연호정은 또 하나를 깨달았다.
‘화정은 영력을 갉아먹는다.’
그러나 누구보다 웅대한 영력을 가진 그는 한두 번 화정을 써먹는다고 상단전이 무너지진 않을 것이다.
다만 결국 화정도 반쪽짜리에 불과한 공부였다. 시작부터 단추를 잘못 끼웠으니, 수백 년을 붙들고 있어도 이 폐해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아아!’
지식이, 과거가, 미래가 들어온다.
‘소교주는 알았구나. 내게 침심안이 있다는 걸.’
침심안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같이 있다 보면 본인이 흔들릴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을 내친 것이다.
흔들리지 않는 본인을 지키기 위하여.
‘당신은 정녕 고금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신이었소.’
연호정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심검동조(心劍同調)가 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