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31)
흑백무제 1331화(1330/1351)
1331화. 도모(圖謀) (6)
치이이잉!!
얇고 가느다란 철판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크으윽!”
비틀거리며 물러난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양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것은 사문향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과 같은 무력을 손에 넣은 절대자 역시 심검동조가 깨지자 극심한 두통을 느끼는 것이다.
‘그랬군.’
고통 속에서, 연호정은 사문향의 모든 삶을 복기했다.
‘이놈 역시 스승님과 인연이 있었어.’
혈교를 차지하기 위해 사음마가에서 보낸 세작.
그러나 어느 순간, 스승님의 인간 같지 않은 능력에 감화되어 진심으로 충성을 맹세해 버린 배신자.
나아가 스스로 진정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비로소 역천에 발을 들인, 혈교 역사가 낳은 최악의 괴물.
‘그래서였군.’
연호정은 단순히 사문향의 과거만을 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의 사문향이 겪지 못한, 과거 흑암제 시절 그의 삶도 엿보았다.
‘반란을 겪었구나.’
연호정은 애써 고개를 틀어 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지만 느낄 수 있었다. 그곳에 무극수에 필적하는 고수와 바다처럼 깊은 공력을 지닌 청년이 존재한다는 것을.
‘적흠. 적흠이다.’
정확히는 사적흠이다.
사문향이 뿌린 수많은 씨앗 중 하나로 사문향에 필적하는 침심안을 보유했으며, 삼십구 대(三十九代) 무간지수가 바로 그였다.
‘함무헌, 그 망할 녀석은 적흠보다 한 수 아래야. 그래서 세작으로 보내진 것이다.’
과거 오대신장 중 하나였던 남수활의 함무헌, 당대엔 홍익천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그 녀석은 말로써 사람의 정신을 제멋대로 희롱하는 천재였다.
그러나 그는 반쪽짜리였다. 그만한 능력이 있음에도 사람을 더 알려 했고, 분석하려 했다.
애초에 그런 것을 궁금해할 필요조차 없는 수준에 이르지는 못한 것이다. 그래서 중원으로 보내졌다.
하지만 적흠은 다르다.
‘저 녀석의 반역으로 사음교가 절단 난 것이다.’
적흠은 사문향의 피를 가장 진하게 이은 놈이었다.
흑암제 시절은 과거이자 다가오지 않을 십수 년 후의 미래였다.
회귀한 연호정이 천하의 운명을 바꾸었고, 삼교 역시 그 흐름을 타고 훨씬 더 빠르게 중원을 침공했다. 그러나 본래대로라면 삼교는 이리 빨리 전쟁을 일으키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한 미래에 적흠은 반기를 들었고, 어느새 사음교의 고수 중 절반을 자신의 휘하에 두었다.
‘어차피 먹잇감으로 키워진 것, 주종 관계를 바꿔 보려 했다…… 반란은 필연이었어.’
적흠은 사문향 몰래 침심안을 발전시킬 단초를 잡았고, 순식간에 삼교의 교주급으로 강해졌다.
그 힘과 병력을 이용해 내전을 일으켰으나 사문향을 죽이는 데엔 실패했다. 그러나 그에게 치명적인 피해는 입힐 수 있었다.
‘영력 제거. 군령(群靈)을 제거했다.’
사문향은 자격이 되는 무간지수, 즉 제 자식의 영혼을 빨아먹어 힘을 불렸고 중원의 고수 중 유독 영력이 뛰어난 자 중 하나도 강제로 제 것으로 삼았다.
적흠은 그 힘을 줄이기 위해 군령들을 해방시킨 것이다.
광혈교의 이혼대법을 개량한 탈혼대법(奪魂大法)을 이용하여.
‘기가 막히는군. 그러고도 우리를 상대로 박빙의 승부를 벌일 만한 힘이 남았었단 말이지.’
회귀 전, 사문향의 힘은 중원 최고수 셋을 상대로도 우위를 점할 정도로 엄청났다.
영혼은 제거당했지만 사백여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쌓아 온 공력까지 잃지는 않은 것이다. 게다가 수탈한 영혼으로부터 저마다가 깨달은 무리(武理)를 흡수하여 강해졌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승부였다고 해야 할까? 오히려 그만한 괴물을 상대로 기어이 승리한 세 사람의 분투가 대단했다고 봐야 한다.
심지어 당시 사문향은 지금보다 더 완성도 높은 사황체까지 이루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사황체는 그때만 못하지만 수많은 영혼을 쌓아 두고 있는 지금의 사문향은 그때 이상의 괴물이었다.
연호정이 황룡을 깨닫지 못했다면, 아니 싸움을 이어 가며 황룡신왕공의 경지를 무섭게 발전시키지 못했다면 아예 생사결이 성립되지도 않았을 상대였다.
이는 단순히 더 강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심검!’
사문향은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심검지도(心劍之道)를 궁구한 자다. 그런 그의 심검은 수탈한 영혼들을 기반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탈혼대법으로 영혼들을 잃은 이후, 본인의 심검까지도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영혼끼리 심검이 동화된 탓에 그만큼의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
‘아아.’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을 깨닫고, 모든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사문향 역시 마찬가지였다.
후욱!!
사방으로 넘실거리는 혈제기가 특유의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혈제공.’
혈교주의 독문무공.
정확히는 혈신마공(血神魔功)이라는, 단순하고도 확고한 뜻을 지닌 마공이었지만 그것은 천씨 일가가 아니면 연마할 수 없었다.
그 마공을 사문향에게 맞게 변형시킨 것이 바로 혈제공이었다. 비록 변형시켰다고는 하나 혈신마공과 파괴력의 차이는 거의 없었다.
심지어 혈제공은 사문향의 무공을 폭증시키는 역할까지 했다. 혈제공으로 구사하는 모든 무공이 기존보다 더 파괴적이고 격렬해지는 것이다.
혈교 무공의 근원.
어쩌면 혈신마공보다 더 혈교주에게 어울리는 마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랬구나.”
콰드득! 콰드드득!
혈제기가 반경 수십 장을 뒤덮었다.
한계가 없는 공력을 마음껏 풀어 낸다. 꿈틀거리며 공기를 장악하는 혈제기는 무공 한 줌 익히지 않은 범부도 마귀로 만들 만큼 끔찍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후우우웅!
연호정의 몸에서 새하얀 기운이 치솟았다.
황룡신왕공으로 혈제기의 침식을 막아 낸다. 사신기로도 불가능하진 않지만, 황룡이 아니었다면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벅찼을 것이다.
“네놈은…… 혈옥의 기적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온 것이었어!”
사문향이 고개를 쳐들었다.
순간 연호정은 두 눈이 타 버릴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상대의 무시무시한 감정이 느껴졌다.
지독한 분노와 질투, 깊이를 알 수 없는 증오.
그 감정이 어느 정도냐 하면, 삼교라는 말만 들어도 살기에 휘둘렸던 과거의 연호정 이상이었다.
“네놈은 소교주의 제자로구나.”
소교주의 제자.
사색광인의 제자가 아닌, 소교주의 제자라는 호칭이 나왔다. 사문향의 정신과 감정이 과거의 그때로 돌아갔다는 뜻이었다.
“네깟 놈이 감히!”
콰콰콰쾅!!
일갈과 함께 터져 나온 기파가 천지를 진동케 했다.
단순한 기파 발산만으로 하늘이 울고 땅이 신음한다.
공력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불타오르는 분노와 증오에 자연스레 심검의 힘이 실렸다. 진정한 심검은 인간다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 심검과 공력이 일치되어 이런 말도 안 되는 파괴력을 생성하는 것이다.
“그렇게 떠나 버렸으면서 한다는 짓거리가 고작 너처럼 재능도 없는 머저리에게 오색지옥공을 전수한 것이었더냐!!”
하늘이 내린 숙적, 또 다른 천재라는 평가는 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사문향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연호정 역시 대단한 정신력을 타고났지만, 이능(異能)이라 할 만한 능력을 타고난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연호정은 당당했다.
기우희 같은 성력을 타고나지 않아도, 천씨 일가처럼 말도 안 되는 무공 재능을 타고나지 않아도, 사씨 일가처럼 침심안을 타고나지 않아도.
그는 그저 강한 정신력을 지닌 단 한 명의 사람으로서 이 자리에 올랐다. 오히려 재능을 타고나지 않았기에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분은 나를 선택했다. 그리고 나로 인해 이승의 굴레를 벗고 하늘에 이를 수 있었다.”
“……!!”
“서로가 서로를 완성시켜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천연(天緣)이 빚은 사제지간이라는 것이다.”
연호정의 눈에도 불이 붙었다.
비로소 그가 아는 사문향으로 돌아왔다. 그것이 그의 분노에 땔감을 넣고 있었다.
“타인을 존중하지 않고 짐승처럼 탐해 오기만 한 너 따위가 알 수 없는 천품이지.”
“닥쳐라!”
이 싸움은 더 이상 중원의 운명을 건 싸움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감당키 힘든 좌절을 겪은 와중에도 기어이 포기하지 않고 일어나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갔다. 그리고 그 목표를 코앞에 두고 있으니, 어떤 의미론 쌍둥이처럼 닮은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그 과정은 판이했다.
연호정은 그 자신이 원하지 않았음에도 역천의 힘을 빌려 돌아왔지만 또다시 사람으로서 나아갔다. 그는 본인이 사람임을 잊지 않았고, 모두와 함께 나아가고자 하는 사신무장(四神武將)이었다.
사문향은 그 자신이 원했기에 역천의 길을 걸었으며, 끝까지 역천의 마귀로서 이 자리에 돌아왔다. 그는 스스로 사람임을 버렸고 유일무이한 신이 되기 위해 이 자리에 선 사신(邪神)이었다.
서로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상, 천적은 천적이 아니다.
바로 지금에 이르러서야 하늘이 내린 숙적, 진정한 의미의 천적(天敵)끼리의 싸움이 성립되었다. 지금껏 서로를 몰랐기에 어긋났던 싸움이, 주먹이, 도끼가 이제야 상대의 영혼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천인룡!!”
콰앙!
박차고 나아가니 코앞이다.
그 속도는 이전과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연호정은 알고도 막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거대한 분노와 증오가 시야마저 뿌옇게 가려 버렸다. 인간의 육신에 담을 수 없는, 악신(惡神)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짐승의 감정이었다.
울컥 피를 토하며 밀려난 연호정.
콰쾅!
오른발 하나로 몸을 지탱한 그가 도끼를 버리고 질주했다.
후우우우웅!!
돌풍이 일었다.
새하얀 바람이 소용돌이친다. 백열하는 분노로 꽉 찬 주먹이 숙적의 머리를 향해 날아간다.
콰앙!!
일격에 산도 허물겠다.
정통으로 얼굴을 맞은 사문향의 몸이 땅을 파고들었다. 사황체로도 충격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연호정이 차가운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일어나라.”
콱!
땅에 박힌 채로 연호정의 발목을 잡는다.
퍼어엉!
폭음과 함께 몸을 일으킨 사문향이 발목을 쥔 손을 크게 휘둘렀다.
콰쾅!
거대한 철 기둥을 땅에 처박기라도 한 것 같다. 수십 장 범위로 뻗어 나가는 실금 위, 자욱한 열기가 올라왔다.
연호정의 손이 움직였다.
콰앙!
팔꿈치를 정확하게 타격한 번천장이었다. 사문향의 손이 저절로 펴졌다.
동시에, 연호정의 몸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퍼어어억!
사문향의 상체가 꺾였다. 주먹이 명치에 제대로 들어갔다.
쾅!
연호정의 입에서 피가 튀었다. 올려서 후려친 사문향의 팔꿈치가 그의 턱에 작렬한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멀쩡했다.
차갑고 고요한 분노, 그리고 활화산처럼 폭발하는 분노가 두 사람의 심검을 극단적으로 활성화시키고 있었다. 이전보다 더 격식 없고 우악스러운 주먹다짐이기에 파괴적이었고, 그래서 더더욱 회복 속도도 빠르다.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콰콰쾅!
미친 듯이 폭주하는 심검, 그리고 분노.
육성으로 외칠 필요도 없었다. 두 사람의 주먹에는 각자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일격, 일격을 교환할 때마다 둘은 지독하리만치 솔직한 대화를 이어 갔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세상이 어두워지고 달이 하늘 높이 떴을 무렵.
콰득!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그림자 하나가 무릎을 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