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32)
흑백무제 1332화(1331/1351)
1332화. 도모(圖謀) (7)
“믿을 수 없다.”
호법장의 얼굴은 불신과 공포로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저것이 사람의 싸움인가……?!”
폭음을 내는 주먹질 한 방, 한 방에 얼마나 깊은 공력이 담겼는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 초월적인 힘을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휘두른다. 일격, 일격을 서로의 몸에 정확하게 때려 박고 있었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물러나지 않는다. 극사의 힘으로도 일격을 막기가 불가능해 보이는 주먹질을 주고받으면서 벌써 반나절이 지나도록 싸우고 있었다.
와중에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있었다.
‘교주님의 저 분노는 무엇이지? 그런 교주님과 맞상대하면서도 멀쩡한 저놈은 인간이긴 한 것인가?!’
그때였다.
“위험해.”
적흠의 말에 호법장은 움찔했다. 두 반신(半神)의 싸움에 집중하고 있던 터라 깜짝 놀란 것이다.
적흠의 말이 빨라졌다.
“물러나시오.”
“무슨……?!”
훅.
어느새 적흠이 수십 장 뒤로 물러났다.
엄청난 신법이었다. 호법장은 적흠의 신법에도 무척 놀랐다.
하지만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위험하다니? 물러나라고?’
뭐가 위험한 건지 모르겠지만, 물러나라는 말을 따를 순 없었다.
그는 호법장이었다. 반신끼리의 싸움이라 끼어들지 못하고 있을 뿐, 교주를 지켜야 할 자가 더 거리를 벌려서 어쩌자는 것인가.
콰르르릉!!
갑작스레 폭풍이 일었다.
그 순간, 호법장은 벼락을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교주를 향한 충성심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육신의 본능이 회피를 종용했다.
‘피해야……!’
쉬이익! 콰앙!
폭음과 함께 호법장이 뒤로 날아갔다.
무려 십여 장이나 구른 끝에 멈춘 그가 연신 피를 토했다.
‘이럴 수가.’
충격파 한 방에 내상을 입었다. 극사에 오른 자신이.
‘거기서 더?!’
두 사람의 힘이 더 강해졌다.
힘이 강해지니 뿜어져 나오는 충격파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졌다. 호법장은 그 충격파에 대응조차 하지 못했다.
호법장은 저도 모르게 외쳤다.
“교주님!!”
그때였다.
콰드드득!
섬뜩한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수백 장 밖까지 들릴 것처럼 큰 소리였다. 호법장은 또 한 번 움찔했다.
사아아아악!
호법장은 희뿌연 무언가가 하늘 높이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그때, 적흠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나가 아니었어.”
호법장이 적흠을 돌아보았다.
놀랍게도 무심한 적흠의 얼굴에 묘한 희열이 담겨 있었다.
“대법을 쓰지 않아도 저런 것이 가능했던가.”
* * *
‘이게 뭐지.’
흐릿한 시야 속에서, 사문향은 하얀 무언가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사규헌.’
비명을 지르며 흩어진다.
‘사국준.’
환희와 함께 소천한다.
‘사중선.’
증오를 풀어내며 가라앉는다.
그간 받아들인 침심안의 소유자들이 모조리 몸 밖으로 뛰쳐나오고 있었다.
‘나 때문이군.’
사문향은 깨닫는다. 군령으로 묶인 저들이 어찌하여 그의 몸을 떠나는지.
‘천기의 통로로…….’
그는 사람으로서 신이 되고 싶었다. 인간이 느끼는 모든 욕망을 손에 넣고 영원불멸의 생을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진짜 사람이 된 순간은 바로 숙적과 싸우는 지금이었다. 지금 그가 발산한 분노는 무려 삼백 년 동안 묵힌 것이었다.
그 분노 가득한 심검으로 쌓아 온 모든 것을 터트리니 군령들의 영향력이 줄어들었다. 이제 그의 몸은 오롯이 그만의 것이 된 것이다.
그러자 알아서 영혼들이 백회를 통해 빠져나갔다. 허무할 정도로 쉽게.
수백 년 동안 치밀한 계획과 탐심으로 받아들인 영혼들이 모조리 빠져나가고 있었다.
덜컥!
사문향의 몸이 움찔했다.
그 와중에 하나의 영혼은 빠져나가지 않았다. 사문향이 원해서가 아니었다. 그 영혼이 사문향의 몸에 남아 있기를 원했다.
사문향은 그 영혼의 존재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부르르르르.
혈제기가 제멋대로 넘실거렸다.
놀랍게도 공력은 아직 흘러넘쳤다. 만전의 상태를 생각하면 엄청나게 줄었지만, 그런데도 극사의 고수 몇은 감당할 만한 공력이 남았다.
하지만 그 공력조차도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사문향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흔들리던 시야가 조금씩 명확해졌다.
그리고 그곳에.
천인룡이 있었다.
사문향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소교주.”
“이제는 헛것이라도 보이는 거냐.”
천인룡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으면서 누구보다도 사람다운 목소리를 낸다. 맑고 청아한 그 음성은 마치 학식 깊은 학자의 음성과 비슷했다.
한 번 더, 시야가 바뀌었다.
그러자 천인룡은 사라지고 그곳에 연호정이 남았다.
문득 사문향은 눈이 부신 것을 느꼈다.
시야가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 더할 나위 없이 환해졌다. 마치 연호정이라는 존재 자체가 피워 내는 빛을 보는 것 같았다.
“나를 똑바로 봐라.”
수도 없이 심검을 퍼부었기 때문일까.
자신과는 다른, 차갑고도 절제된 분노로 가득한 천적의 심검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렇기에 차분하게 모든 것을 쏟아 낼 수 있었다. 연호정의 목소리에서, 사문향은 더 이상의 분노를 느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차분함 너머, 연호정의 몸이 한계에 이르렀음이 보였다.
그래도 연호정의 표정은 담담했다.
“너는 신이 되고자 했지만, 이제는 깨달았을 것이다. 사람은 신이 될 수 없다는 걸.”
사문향의 표정이 굳어졌다.
소교주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소교주고 자네는 혈왕이지. 그러나 나나 자네나 똑같은 사람일세. 우리는 결단코 신이 될 수 없어.’
‘사람은 사람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없어. 나는 그것을 깨달았네. 그리고 나의 뜻을 자네도 알아줄 거라고 생각했다네.’
환청처럼 들리지만 그것은 환청이 아니었다.
무려 삼백 년이 넘도록 그가 기억하고 있는 말이었다. 아직도 한 번씩 불쑥 떠오르는, 떨치려 해도 떨칠 수 없는 저주처럼 뇌리에 새겨진 말이었다.
“너와의 동조로 과거를 본 나는 비로소 모든 것을 알았다.”
“…….”
“스승님께서 혈교지란을 평정한 그때, 바로 그때 혈교는 멸망했다.”
“……?!”
“광신삼교라 포장된 너희는 그저 옛 영광을 잊지 못하고 몸부림치는 망령들에 불과해.”
사문향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개소리하지 말라고, 혈교는 아직 죽지 않았다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 연호정은 단순한 연호정이 아니었다.
그는 소교주, 천인룡과 함께하고 있었다. 그래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도 모두 반박당할 것 같은 기분.
그리고 그 반박을, 나도 모르게 수용할 것 같은 불안감.
연호정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네가 되어 너의 마음을 모두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스승님께서는 그러지 않고도 너를 알았어.”
“……!”
“너에게는 기회가 있었다.”
기회? 무슨 기회?
“사람에게는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주어진다. 그런 기회가 없었다면, 언제나 자신을 의심해 봐야만 해. 그래야 더 나아질 수 있다.”
“…….”
“너는 자신을 돌아보려 하지도 않았고 스승님께서 주신 기회를 기회라 여기지도 않았다. 그저 상대를 내게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썼을 뿐.”
“……!”
“정 뜻대로 되지 않았다면 인연이라도 끊었어야 했다. 목숨이 아까웠다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돌아갔어야 했다. 한데도 너는 그러지 않았다.”
연호정의 눈에 강렬한 위엄이 어렸다.
그 눈은 마치, 혈교 병력을 상대로 싸우면서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던 천인룡의 눈을 보는 듯했다.
“욕망을 되돌아보지 못하는 자, 욕망에 휘둘려 진정한 자신의 인생을 살지 못한다. 어쩌면 그랬기에 너는 더더욱 신이 되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네가 너를 모르니까.”
“……닥쳐라.”
“그래서 너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사문향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기회를 준다? 그것은 강자가 약자에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말에 화를 내지 못했다. 연호정의 존재 자체에 분노했지만, 그 말에는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연호정의 무력이 더 강해서가 아니었다.
무력이 아니더라도 연호정은 그보다 강했다. 그 마음이, 살아온 방식이, 의지가 지금 이 순간 사문향을 압도하고 있었다.
“삼교의 남은 잔당을 데리고 돌아가라.”
“……?!”
“돌아가서 너희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고민해 봐라. 그걸 받아들인다면…… 지금은 너희를 돌려보내 주겠다.”
과거의 연호정이었다면 혀를 깨무는 한이 있더라도 내뱉지 않을 말이었다.
그는 평생을 삼교의 멸망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었다. 황제를 만나 새로운 시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시대를 위해 살아가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렇다고 삼교를 향한 증오가 퇴색된 것은 아니었다.
사문향이 이전의 사문향이 아니었다면, 연호정도 이전의 연호정이 아니었다.
사문향과 이렇게 만나기 전이었다면 절대 이런 생각 따위 할 리가 없었다. 연호정에게 있어 삼교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다. 단 한 명의 교도라도 살아남아선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문향을 만나, 영혼의 밑창까지 박아 두었던 모든 분노와 증오를 풀어낸 지금.
비로소 연호정은 스승의 말대로 증오와 한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화아아아악!
연호정의 몸에서 바람이 불었다.
피범벅이 되었음에도 피비린내 따위는 나지 않았다.
그가 발하는 바람에선 묘한 향기가 났다.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차분해지는, 생각만 해도 웃음이 새어 나오는 추억의 향기였다.
사문향의 눈이 무섭게 흔들렸다.
‘심검…… 심검…….’
이 또한 심검이다. 그걸 알면서도 당한다.
‘어찌 저러한 경지에 이르렀는가.’
무력으로 치고받지 않아도 심검은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 수 있다.
사문향이 삼백 년간 쌓아 온 분노를 전부 터트렸다면, 연호정 역시 영혼조차 갉아먹도록 놔둔 살기를 이번 심검무도(心劍武道)로 전부 토해 냈다.
분노, 증오, 한.
그러한 감정이 이제껏 연호정을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면, 지금은 그 모든 것을 해소하고 더 높이 날아오를 수 있는 디딤돌이 되어 주었다.
철천지수를 상대로도 용서를 입에 담을 수 있는 마음.
철천지수를 상대했기에 모든 것을 토해 내고 명경지수와 같은 마음을 유지할 수 있으니, 진정 천적은 천적이라 할 수 있을까.
“스승님이 주었던 기회를 너는 잡지 못했다. 하지만 너는 이제 그것이 기회였다는 것을 알아. 하여, 스승님의 제자인 내가 너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는 것이다.”
“…….”
“선택해라. 일시적 휴전이냐? 아니면…….”
연호정은 차분하게 죽음을 입에 담았다.
“여기서 사백 년간 이어 온 삶을 끝내겠느냐.”
사문향이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네가, 대륙 무림을 대표하여 우리를 놔주겠다고?”
“착각하지 마라. 나는 네가 죽을 곳을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을 뿐, 너희를 완전히 놓아주는 게 아니다.”
“……?!”
“일시적 휴전이라는 말을 듣지 못했나? 휴전은 아주 잠시일 뿐이다. 지금 당장 물러난다면, 우리는 전력을 충분히 갖춰 너희를 치러 갈 것이다.”
“……!!”
“그전에 너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다. 허나 만약 너희가 싸움을 택한다면, 그때는 너희가 키우는 개새끼 한 마리 살려 두지 않겠지.”
차분함이 차가움으로 바뀌었다.
“그때는 내게 자비 따위는 바랄 수 없을 것이다.”
“……왜 내게 그런 기회를 준다는 것이냐?”
“스승님이라면 그러셨을 테니까.”
“…….”
“나는 스승님께서 이승에 남긴 회한 한 자락을 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나의 복수심 따위는 잠시나마 내려놓을 수 있어. 그리고 네놈도 알겠지만…….”
우웅! 우웅!
연호정의 두 눈이 살벌한 금안(金眼)으로 바뀌었다.
“너는 내게 거짓을 말할 수도 없다.”
“……!”
“선택의 순간이다, 사문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