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33)
흑백무제 1333화(1332/1351)
1333화. 도모(圖謀) (8)
‘크다!’
사문향의 눈이 흔들렸다.
눈앞에 선 연호정이 마치 산처럼 거대하게 느껴졌다.
‘이 녀석은…… 이미 소교주와 같아.’
당시의 소교주를 떠올리게 하는 무력.
사문향은 연호정의 힘이 거의 다 소진되었음을 눈치챘다. 아마 자신처럼 서 있기도 힘들 것이다.
그래도 당당하다. 천하의 어떤 고수가 와도, 아니 천하 모두가 일시에 덤벼도 이 자리에서 당당하게 막아 낼 수 있을 것 같은 위엄이 가득했다.
사문향의 얼굴에 은은한 두려움이 어렸다.
치이익!
단 하나의 영혼을 제외한 모든 영혼이 귀천하니, 칙칙했던 그의 피부도 본래대로 돌아왔다. 더 이상 귀신을 담은 군령의 몸이 아니었다.
“기회를 준다…….”
사문향이 차갑게 웃었다.
두려움을 숨기려는 웃음이었다.
“알고 있느냐?”
“…….”
“나는 이곳 산동에 들어와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여인은 능욕했고, 어린아이는 찢어 죽였다. 부모가 보는 앞에서 자식을 해체했고, 자식이 보는 앞에서 부모의 머리통을 뽑았다. 내 새끼들과 함께 그랬지.”
“…….”
“당금 무림의 선봉장으로서 절대 용서치 못할 짓거리를 했는데도 내게 기회를 주겠다고? 끔찍한 고통을 겪다가 죽어 사라진 그들의 복수를 하지 않겠다고?”
사문향이 돌연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웃음소리가 공기를 진동시킨다.
“개도 안 웃을 헛소리다. 너는 내게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야.”
그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너는 본교의 싹을 다 없애 버릴 생각이다. 그래서 우리더러 돌아가라고 한 것이지.”
어느 정도는 정답이다.
연호정은 말했다. 병력을 끌고 돌아가라고. 돌아가서 죽을 기회를 잡으라고.
하지만 그 말의 진의는, 당장 산동에 상주한 사음의 병력과 지금 이 순간에도 하북을 공격하고 있는 외적들을 물리고자 함이다.
사문향이 죽으면 사음의 병력들도 미쳐 날뛰기 시작할 터.
복수라는 선택지는 쉽다. 하지만 그 복수심을 접고 당장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마음을 품기는 어렵다.
연호정은 바로 그것을 위해 사문향을 설득한 것이다. 돌아가라고, 가서 우리의 공격을 대비하라고.
사문향은, 평생 신이 되기 위해 타인의 삶을 무참히 짓밟은 마인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대협(大俠)의 결단이다.
나아가 사문향이 다시 한번 병력을 갖춰 중원을 침공하려 한다면, 하나 되어 맞서 싸울 무림 병력으로 인해 최후의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이후 그들이 항복을 선언하고 책임자가 다 죽으면, 죄 없는 교도들은 살려 준다. 그러나 또 한 번 전쟁을 일으키면 그때는 무조건적인 섬멸전으로 끌고 간다.
스승의 회한, 연호정이 깨달은 대협의 마음, 적을 멀쩡히 놔두지 않겠다는 선봉장의 투지, 모두와 함께 나아가겠다는 사신무장의 의지.
그 모든 것이 집약된 제안이기에 연호정은 위대한 것이다.
“그래서, 선택은?”
사문향이 이를 악물었다.
‘움직여라.’
이놈 하나 죽일 공력은 남았다. 마음이 위축되었지만, 실제 싸우면 놈은 절대 자신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놈의 상태가 그러했다.
한데도 공력이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여!’
우웅! 우우웅!
혈제기가 미세하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연호정의 눈이 차가워졌다.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 주는군.”
그가 천천히 주먹을 들어 올렸다.
순간 사문향은 심신이 무저갱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충격을 맛보았다.
‘이런…….’
고작 주먹을 들었을 뿐인데 또다시 공력이 멈추었다.
온몸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호흡이 흐트러지고, 안색은 창백해졌다. 당장 뒤로 물러나고 싶은데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공력, 무공의 상식을 뛰어넘은 의지의 싸움이다.
번쩍!
연호정의 몸에서 새하얀 백색의 기운이 솟구쳤다.
최후의 힘을 끌어 올린 지금 이 순간, 비로소 연호정은 혈교지란 당시 천하를 위진했던 스승 천인룡의 경지에 도달했다.
불패(不敗)의 황룡제(黃龍帝), 고금제일인이라 불리었던 무림 역사상 최강의 고수. 천하의 운명을 바꾸었던 남자가 거닐었던 바로 그 경지.
화아악!
하늘에서 빛이 내려오는 느낌이었다.
연호정은 등 뒤에서 스승이 웃는 것을 느꼈다. 대견함과 미안함, 뿌듯함과 안쓰러움이 가득 담긴 미소였다.
‘스승님.’
결심 가득한 주먹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스승님과 저, 두 명의 사신무장과 악연으로 얽힌 최악의 마인을 지금 죽이겠습니다.’
피해를 최소화하지 못했지만, 이번만큼은 천하인들의 이해를 구할 수밖에 없다.
삼교를 막기 위해 평생을 다 바친 한 무림인의 잘못된 선택을, 그들도 부디 이해해 주길.
연호정의 두 눈이 황백색으로 물들었다.
사문향이 저도 모르게 외쳤다.
“안 돼!”
콰앙!
내리친 주먹이 폭음을 냈다.
푸화아악!
핏물이 쫙 번지며 대지를 붉게 물들였다.
* * *
“…….”
가부좌를 튼 채 몸을 다스리던 연위는 별안간 벌떡 일어나 저 머나먼 북쪽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의아한 얼굴로 연위에게 다가간 연지평은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우웅!
나직한 울음과 함께 드러나는 백색의 기류.
안개나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었지만, 그 기운은 순식간에 막사 전체를 가득 채우다 못해 꿈틀거리며 야외까지 영역을 넓혀 갔다.
‘검극사기가 아니다!’
검극사기가 아닌데도 검극사기의 일면이 느껴진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검극사기를 제외한 나머지 오대신공의 기운이 몽땅 다 느껴졌다.
연지평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연가신단!’
상단전에 자리한 연가신단이다.
신(神)이 머무는 장소에 신단을 형성했다는 것만으로도 유례가 없는 일이다. 한데 그 영적 기운을 육안에 보일 정도로 퍼트린다는 것은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 정도면 가히 신선의 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력이 아닌 상단전의 신기만 느꼈는데도 연지평은 자신이 아버지의 발끝에도 이르지 못했음을 알았다.
‘엄청나다! 연가신단은 본디 공력의 집합체로 밀도 높은 공력을 이용해 끊임없이 힘을 불리는 수법인데…… 그것을 상단전에!’
즉, 아버지의 상단신기도 기존의 연가신단처럼 무한하게 힘을 불린다는 뜻이었다.
재능에 따라, 깨달음에 따라 힘의 총량은 달라질 것이다.
연지평은 감히 확신했다. 지금 아버지의 신기는 저 무당파의 검선 탁무자 이상일 것이라고. 어쩌면 무림 역사상 손에 꼽히는 상단신기를 보유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호정.”
반면 연위는 자신이 흩뿌리는 신기 따위는 신경조차 쓸 수 없었다.
저 머나먼 북쪽에서 혈육의 혼을 느끼는 그였다. 마치 강호삼기 중 일인인 통천진인이 대륙 전체를 바라보았던 것처럼, 그 역시 천리(天理)가 이어 준 혈육의 존재감을 명확히 잡아낼 수 있었다.
‘이럴 수가. 호정의 신기(神氣)가 이렇게까지?’
연지평은 연위의 상단신기에 놀랐지만, 그 놀라움은 연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엄청나구나! 천하를 몽땅 뒤덮을 것 같다!’
연위의 얼굴에 황홀함이 어렸다.
아들이 아닌, 궁극의 신기를 퍼트리는 거장을 보는 예술가의 심정이었다.
‘아아!’
연위의 눈이 몽롱해졌다.
화아아악!
연가신단의 기가 밀도를 키워 갔다. 아들의 기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그의 상단신기 역시 발전한다.
천리로 얽힌 혈육의 기운은 무상(無上)의 깨달음으로 가득했다. 설령 연위보다 더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도 지금 연호정의 힘을 느끼지는 못할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부모와 자식.
끊어 내려 해도 절대 끊어지지 않는 그 성긴 그물이 연위의 경지를 상승시키고 있었다.
‘너는 이렇게까지 드높이 날아올랐구나. 실로 놀랍다. 어찌하여 그런 깨달음을…….’
어느 순간, 연위의 얼굴이 굳어졌다.
‘거기서 더 올라간다고?’
새하얗게 백열되는 아들의 신기가 더 강하게, 더 환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전에도 사람의 기운이라 하기에 무리가 있었지만, 지금은 더하다. 상상을 초월하는 백색의 기운이 한계 없이 밀도를 높여 가매, 마침내 인간의 육신으로는 버틸 수 없는 지경까지 나아가고 있었다.
‘호정! 안 돼!’
연위는 그러한 진기 밀도가 무엇을 끌어내는지 알고 있었다.
‘더 이상 힘을 불리면 너는……!’
이승에서 사라진다.
도가식으로는 등선(登仙), 불가식으로는 열반(涅槃)의 경지라고도 불리는 영역으로 나아간다. 등선이든 열반이든, 이승이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상승한 신기는 물질적 존재를 세상에 묶어 두지 않는다.
쉽게 말해 죽는다는 것이다.
‘아아…….’
연위는 탄식을 토해 냈다.
등선이 진짜라면, 열반이 진짜라면 아들이 그러한 세상으로 나아감을 축복해 줘야만 했다.
하지만 연위는 그럴 수가 없었다. 온 세상이 축하해 마땅할 경지라고는 하나, 연위는 어딘지도 모를 세상으로 아들을 떠나보낼 수가 없었다.
나아가 이승에서 아들을 보고 싶었다. 말이 등선이고 열반이지, 실질적인 죽음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간 아들이 얼마나 고생했던가.
자신의 인생은 제대로 살아 본 적도 없이 온 천하를 누비며 외적과 싸웠다.
그러면서도 누군가가 죽으면 다 내 탓이라며 가슴을 치는 착한 녀석이었다. 적의 입장에선 공포의 무장이지만, 연위에게는 천하에 둘밖에 없는 아들 중 하나인 것이다.
‘호정, 너는 아직 사람답게 살아 보지도 못했다. 한데 어찌 벌써 하늘에 이르려고 하는 것이냐.’
그때였다.
훅!
연위의 눈이 흔들렸다.
그 먼 거리에서도 느낀다. 무한하게 증폭되었던 아들의 신기가 갑작스레 확 줄어 버린 것을.
‘왜?!’
의문이 드는 순간 깨달았다.
‘당했는가!’
스스로 신기 증폭을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아들은 자신의 상태조차 모르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이것은 누군가로 인해 강제로 신기가 반 토막이 나 버린 것에 가까웠다. 끝없이 상승하는 신기가 토막 날 정도의 피해나 상상도 못 할 충격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우둑! 우두둑!
연위의 몸에서 돌연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아, 아버지?!”
심상치 않은 변화. 연지평은 크게 당황했다.
하지만 걱정할 것은 없었다.
연위는 증폭된 신기를 이용, 내외상을 치료하고 근육과 뼈의 배치를 미세하게 조정하고 있었다.
환골탈태라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작은 변화였지만, 무의식적으로 몸을 최적의 상태로 만들려는 의지가 근육과 뼈의 위치까지 바꾼 것이다.
훅!
내외상이 치료되자 공력이 무섭게 차올랐다.
“지평. 나는 북쪽으로 가야겠다.”
“아버지?”
“호정의 상태를 제대로 확인할 수가 없다. 필시 큰 문제가 생긴 듯한데,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를 모르겠다.”
연위가 연지평을 바라보았다.
“너도 가자.”
너는 이곳을 지켜라, 네가 낄 곳이 아니다.
그런 말은 하지 않는다.
한 명의 당당한 고수가 된 아들은 연호정만큼 믿음직하다. 나아가 형이 위험하거늘 동생이 되어서 그 상태를 외면해서는 안 될 일이다.
아버지도, 두 아들도 모두 강호의 찬사를 받을 만한 고수로 성장했다면.
천하의 위기를 고루 짊어질 만큼 발전했다면, 이제는 서로가 서로를 도와야 한다.
연지평의 얼굴에 결심의 기색이 어렸다.
“무엇을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알겠습니다. 방향만 알려 주시면 제가 아버지를 보필하겠습니다.”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든든하구나. 자, 어서 가자.”
무턱대고 북상을 결정한 연위와 연지평.
연가의 남자들이 사신(邪神)의 대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