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34)
흑백무제 1334화(1333/1351)
1334화. 도모(圖謀) (9)
연호정의 주먹이 사문향의 머리통을 깨부수기 직전.
‘……!’
한계를 초월한 반선의 정신력으로도 포착하지 못했던 미세한 살기를 읽어 낸 연호정이었다.
‘이건?’
찰나에 찰나를 쪼갠 순간.
거대한 영역에 거미줄처럼 쳐진 굵고 질긴 감각들이 한쪽부터 무섭게 무너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아니,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체내 공력도 거의 남지 않았고, 심지어 외기를 끌어오지도 못하고 있다. 남은 힘을 오직 사문향을 죽이기 위해 쏟아붓고 있기 때문에, 잠시나마 천인(天人)의 경지를 넘보던 그의 깨달음도 빈틈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을 노린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무극의 고수가 아니면 절대 보여 주지 못하는 속도.
‘이놈의 부하다.’
주먹은 아직도 나아가고 있었다. 사문향의 머리카락이 지독히도 느릿하게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모든 것이 느려진 세상 속에서도 그의 인지 능력은 벼락처럼 빨랐다.
‘적흠이 아니야. 그 옆에 서 있던 놈, 사왕(四王)급의 고수가 목숨을 걸고 날아오고 있어.’
심검동조로 사문향의 거의 모든 생을 본 그는 그 미지의 고수가 사음교의 호법장(護法長)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 빨라. 놈을 쳐 내고 다시 사문향을 죽이기엔 힘이 부족하다.’
그렇다고 호법장의 공격을 무시할 수도 없다.
지금 연호정은 움직이고 있는 것조차 기적인 상황이었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고 있기에 마지막 일격을 먹일 힘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
즉, 두 번의 기회는 없다.
‘호법장을 공격하면 사문향이 반격할 것이다. 사문향을 죽이면 나도 죽는다. 호법장에겐 최소한 그 정도의 힘이 있어.’
어지간한 절정고수는 이 기망(氣網)을 뚫고 들어오다가 폭사할 것이다. 신왕공의 살기를 감당할 수 없을 테니까.
초절정고수라도 절반 정도의 접근이 한계다. 하지만 무극수라면, 무극수의 공격이라면 반드시 자신에게 닿는다.
목숨을 걸고 내치는 공격이기에 더더욱.
연호정의 얼굴에 갈등의 빛이 어렸다.
‘쉽지 않군.’
하지만 이런 순간에야말로 고민을 길게 가져가선 안 되는 법이다.
‘놈과 함께 죽어 봐야 아무 의미가 없다.’
살아야 한다.
삼교 최후의 일인과 함께 죽을 수 있는 상황이라면 모르되 아직도 삼교의, 사음교의 잔당들은 많이 남아 있었다. 사문향 하나만 죽인다고 끝이 아니란 말이다.
결정적으로 연호정은 살고 싶었다.
그는 자신에게 생(生)을 향한 강력한 욕구가 있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언제나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며 살아왔으나 그 역시 사람이다. 죽어도 이런 데서 죽을 수는 없었다.
그는 열사(烈士)에서 무장(武將)이 되었기 때문이다.
훅!
시간의 흐름이 점점 빨라졌다.
사문향은 여전히 움직이지 못했지만, 불어오는 바람에 그의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속도는 점차 빨라졌다. 동시에, 연호정의 주먹도 이미 사문향의 정수리를 향해 절반 이상 다가가고 있었다.
번쩍!
연호정의 의지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그 의지는 실제 벼락이 움직이는 속도와 다르지 않았다. 그야말로 찰나다. 전음(傳音)이 아닌 순수한 의지의 전달, 달아오른 신왕기로 구사되는 심검의 전심술(傳心術)이었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한중명의 눈이 부릅떠졌다.
“성주님!!”
쾅! 콰콰쾅! 퍼어어엉!
무자비한 폭음과 함께 연호정이 십여 장이나 뒤로 밀려 나갔다.
“크으으…….”
어느새 사문향 곁에 다가온 호법장의 좌측 팔과 다리가 완전히 으스러졌다. 회복할 수 없는 중상, 심지어 내상 역시 심각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쿨럭!”
사문향 역시 삼 장 뒤로 날아간 채로 피를 토하고 있었다.
연호정은 누구 하나 확실하게 노리지 못했다. 대신 호법장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온 순간, 절대의 일권(一拳)이 발하는 파괴력을 넓게 퍼트려 둘 모두에게 쏟아 냈다.
위력은 반감될 테지만 둘 중 하나는 확실하게 죽일 수 있다고 보았다. 그것이 연호정의 선택이었다.
이왕이면 사문향이 죽었으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하늘은 아직 사음교의 수장을 데려갈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우웨에엑!”
사문향은 몇 번이나 피를 토했다. 시커먼 핏물은 마치 진흙을 토해 내는 것 같았다.
“교, 교주님.”
그 자리에 쓰러져 덜덜 떠는 호법장의 몸에서 생기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연호정의 마지막 일격은 그렇게나 위력적이었다. 사문향을 죽일 수 있는 공격이었으니, 호법장에게 제대로 들어갔다면 그의 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괜찮으십니까!”
“쿨럭! 우웨엑!”
몇 번이고 피를 토한 사문향이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돌렸다.
“성주님을 지켜라!”
멀찍이 날아간 연호정 곁으로 호종대가 몰려들었다.
연호정 역시 죽지는 않았다. 그러나 호법장의 공격과 부딪치며 발생한 충격파가 그의 상태를 최악으로 만들었다.
사문향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죽인다!’
지금 확실하게 죽이지 않으면 언제 또 죽일 수 있을지 모른다.
결정적으로, 저놈은 소교주를 떠올리게 하는 놈이었다. 저놈을 죽여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본능이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죽일 수 있다!’
사문향이 몸을 일으켜 세우려는 그때.
번쩍!!
고개를 든 연호정의 두 눈에서 찬연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순간 사문향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실제로 심장이 떨어져 나간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충격이 엄청났다.
“커억!”
고개를 돌린 사문향의 두 눈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그저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심맥이 타격을 받고 두 눈의 미세 혈관들이 터졌다.
극에 이른 심인상인(心印傷人)이었다. 심검 이전에 연호정의 정신력이 사문향을 완전히 찍어 누르고 있기에 가능한 한 수였다.
사문향이 눈을 감은 채 이를 악물었다.
“저놈들을 죽여라!”
그 와중에도 그런 명령을 내린다는 건 사문향의 정신력 역시 초인의 영역에 달했다는 뜻이리라.
이렇게까지 정신력 차이가 극심한 경우엔 아예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쳐야 한다. 사문향은 그러한 공포조차 억누른 것이다.
“하, 하지만 교주님.”
호법장은 그 명령을 이행할 수가 없었다.
단 일격에 전투 불능이 되었다. 한쪽 팔다리가 다 으스러져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사문향이 다시 눈을 떴다. 피눈물 때문에 세상이 붉게 보였다.
“교주의 명령이다! 당장 저놈을……!”
그 순간, 사문향의 눈이 반짝였다.
‘이건?!’
호법장의 얼굴에서 무엇을 보았음인가.
‘……그렇군.’
힐끔 적흠을 본 사문향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나는 가겠다.”
목숨이 위험한 부하를 두고 혼자 가겠단다. 와중에 목소리는 물론 손까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공포가 육신을 지배했다. 누가 봐도 수장의 그릇이 아니었다.
하지만 호법장의 표정은 밝았다.
“교, 교주님의 목숨을 살릴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사문향은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다급히 등을 돌린 채 적흠 쪽으로 신법을 펼쳤다.
웃으며 그 광경을 보던 호법장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회생 불능의 상황,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이다.
“성주님! 괜찮으십니까? 성주님!”
“……난 괜찮다.”
연호정은 순식간에 멀어지는 사문향을 바라보았다.
시야가 흐릿했지만, 사문향의 뒷모습만큼은 선명하게 보였다.
‘겁에 질렸는가.’
극심한 공력 소모, 군령 소멸로 인한 심검 부재로 사문향은 엄청나게 약해져 있었다. 다시 힘을 비축한다 한들, 오늘과 같은 힘을 선보이진 못할 것이다.
그렇다. 지금의 사문향으로선 그럴 것이다.
‘저놈, 목적이 있어.’
심검동조는 끝났지만 사문향의 생각은 읽을 수 있었다.
연호정이 이를 악물었다.
“호종대주. 암무단주.”
“예, 성주님!”
“저…….”
명령을 내리고 싶은데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연호정은 그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저놈들을 당장 쳐야 후환을 제거할 수 있는데, 그리되면 호종대와 암무단주의 목숨을 장담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저놈들을 저리 보내는 것 역시 안 될 일이다. 오히려 자신에게 깨질 대로 깨졌기에, 다음 공격은 더 치밀하고 날카로울 것이다.
‘정신 차려라!’
줄어들던 신왕기가 그의 의지로 인해 다시금 꿈틀댔다.
‘의지만 있다면 움직이는 게 어렵진 않을 것이다. 죽일 수 있다면 지금 죽여 놔야만 해. 움직여라!’
쿵!
주먹으로 땅을 치며 몸을 세우려던 연호정은 문득 신왕기의 움직임이 이상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북쪽인지 서쪽인지 모를 어딘가에서부터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상단전이 이렇게까지 피폐한 와중에도 신왕기는 인간의 육신을 초월한 자들의 기세를 명확히 알려 주고 있었다. 연호정의 경지는 그처럼 대단했다.
‘사마공? 사음교!’
방향은 하북이다.
하북에서 산동으로 넘어오고 있는 것, 말하자면 섬서 전쟁에서 이탈했던 사음교의 고수들이 이곳에 당도했다는 뜻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강량, 진양. 너희는 어디 있…… 응?’
강량과 진양은 느낄 수 없었다. 피폐해진 신왕기가 잡아챌 수 있는 기척은 무극수들뿐이었다.
그래서 연호정은 놀랐다.
‘만류귀원신공? 당가주님!’
그렇다.
사음교 측 고수 둘의 뒤로 당관의 기도가 느껴지고 있었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기도, 분노와 초조함으로 가득한 그 기운은 예전에 봤을 때와는 또 다른 경지에 달해 있었다.
‘당가주님이 오셨다면…… 그나마 안심…….’
안도감을 느끼는 순간, 연호정의 몸이 허물어졌다.
신선의 영역에 달한 정신력도 거기서 끝이다. 삼백 년 전의 스승과 비슷한 경지를 넘보고 있었지만, 아직 그의 몸은 사람의 그것이었다.
게다가 스승의 경지에 이른 것도 아주 잠시뿐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여전히 인간이었다.
‘안 돼…….’
기어이 연호정은 정신을 잃었다.
한중명의 눈이 충혈되었다.
‘성주님!’
신과 같은 무력을 구사하며 적의 마지막 수장과 생사결을 벌인 것도 모자라, 적이 공포에 질려 달아나도록 만들었다.
정말이지 자랑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한중명은 격동만을 느낄 수가 없었다.
‘위험하다!’
겉보기와 달리 무척이나 탄탄하고 강인한 근육을 지녔던 연호정의 몸이 눈에 띄게 말라 버렸다. 마치 몸에 있는 힘이란 힘을 다 써 버린 것 같았다.
실제로 생기까지 흔들리고 있으니, 상황이 너무 안 좋았다.
“호종대는 길을 열어라! 성주님이 위험하시다! 암무단주는 가장 가까이 있는 명의를 수색해 주시오!”
그렇게 호종대는 연호정을 데리고 서쪽으로 이동했다. 적을 섬멸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에겐 성주의 안위가 우선일 수밖에 없었다.
길고 처절했던 괴력난신들의 싸움.
아직 그 결과를 허락하지 않은 하늘은 언제나처럼 무심한 눈으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 *
“방주님! 큰일났습니다!”
“또 뭐냐?!”
“흑제성주와 사음교주가 각기 퇴각했습니다! 양패구상의 결과로 보입니다!”
가득상이 이를 악물었다.
연호정을 향한 걱정과 감탄, 고마움과는 별개로 상황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방도들에게 연락을 돌려! 최대한 빨리 산동으로 집결하라고! 그리고 너희는 저쪽, 저 언덕 뒤의 마을로 가 봐!”
“보고할 것이 또 있습니다!”
“뭔데?”
“사마공을 익힌 무극수 수준의 고수 둘과 오백의 병력이 산동으로 들어왔습니다!”
“……뭐?!”
“그리고 그들 뒤를 당가주님과 모용세가의 병력 일부가 쫓고 있습니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가.
잠시 고민하던 가득상이 외쳤다.
“나는 흑제성주에게 가 보겠다! 사람들을 돌보고 일대를 지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