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35)
흑백무제 1335화(1334/1351)
1335화. 천안(天眼)의 개화 (1)
“괜찮으십니까.”
사문향의 질문에는 뭐든 대답하고 그의 명령이라면 뭐라도 따르는 적흠이었지만, 이렇게 먼저 괜찮으시냐 묻는 경우는 참으로 흔치가 않았다.
그 정도로 사문향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외관은 아무 이상이 없지만 내상은 치유되지 않았고, 공력 소모 역시 극심했다. 군령 이탈로 정신도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사문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흠의 눈이 가늘어졌다.
‘달라졌다.’
사문향의 얼굴에 보이는 것은 명백한 감정이었다.
쾌락, 즐거움 이외의 감정에는 한없이 무디고 인색하던 사람이 지금은 얼굴 위에 오만 감정을 다 담고 있었다.
그중 가장 큰 것은 역시나 ‘공포’였다.
‘이 사람이 이런 모습을 보여 주다니.’
적흠은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이미 한없이 멀어졌지만, 그는 흑제성 무사들의 기척을 읽을 수 있었다. 바다처럼 깊은 공력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
‘흑제성주 연호정.’
당대 흑도 연맹의 맹주이자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에 천하제일을 논하는 무력을 거머쥔 천재.
사실 천재라는 말로도 형용하기 힘들다. 안 그래도 강했던 그 괴물은 오늘, 사신(邪神)이라 불리는 사문향과의 싸움으로 무섭게 성장하여 고금을 논하는 신선의 강자로 발전했다.
‘저런 자가 있는 한 교세 확장은 불가능하겠지.’
적흠은 황룡제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사문향이 황룡제를 얼마나 증오하는지도.
그 증오는 충성심과 애정에 비례한 만큼 엄청났다.
‘만약 저자가 진정 황룡제의 제자라면, 황룡제의 무학은 오색지옥공 이상으로 대단한 것이 분명하다.’
언제나 무심함만이 가득했던 적흠의 두 눈에 무시무시한 탐욕이 어렸다.
‘갖고 싶군.’
그때였다.
“지치는군.”
“잠시 쉴까요?”
“그래.”
태산 자락을 오르며 산의 기운이 어그러지는 걸 느꼈다.
채정마진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다. 아니, 싸운 시간을 생각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힘을 모으고 있었다.
“후욱.”
자리에 앉은 사문향이 숨을 몰아쉬었다.
신선도 쳐 죽일 강자였던 그가 지독히 인간다운 모습을 보여 준다. 무리한 신법으로 인해 내상이 도져 얼굴이 시퍼렇게 변했다.
기운은 불안정했고, 피눈물이 말라붙은 얼굴은 자문(刺文)이라도 새긴 양 살벌했다. 거친 호흡에선 죽음의 냄새가 묻어 나왔다.
적흠의 손이 꿈틀거렸다.
‘지금이 기회인가.’
사문향의 몸 상태는 최악이다. 극사는커녕 절정의 기량을 보여 주는 사음의 전사 하나만 데려다 놔도 감당하기 힘들 듯했다.
‘이자의 힘은 무궁무진하다. 지금은 이런 꼴이 되었지만 필시 얼마 지나지 않아 예전의 기량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적흠은 사문향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사문향이 아는 지식의 팔 할 이상을 전수한 것이 그였다.
이유는 하나였다.
‘지금이 아니면 조만간 잡아먹힐 수도 있을 것이다.’
적흠은 사문향이 자신의 육신을 노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에 대한 지식을 전수한 건 아니지만, 적흠은 뛰어난 두뇌를 타고났다. 사문향이 알려 주지 않은 이혼대법과 화정, 그리고 영혼 복속에 대한 것들도 오랜 공부 끝에 깨달을 수 있었다.
거기서 적흠은 아주 중요한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당신이 나의 모든 것을 앗아 갈 수 있다면, 나 역시 당신의 모든 것을 앗아 갈 수 있다.’
사문향이 대단한 점이 바로 거기에 있다.
그는 수백 년 동안 자신의 제물에게 탐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철저하게 자신을 관리하며 상대가 자신을 따르도록 만들었다.
두 세대 정도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세 세대까지도 운이 따라 주면 어떻게든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사문향은 수 세대에 걸쳐, 수십 명을 상대로 그런 짓을 벌였다. 그가 얼마나 철두철미한지, 나아가 얼마나 대단한 침심안을 타고난 괴물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당신은 모를 것이다. 내가 이미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걸.’
유일하게 사문향에 필적하는 침심안을 타고난 무간지수, 그가 바로 적흠이었다.
그는 태산 정상을 힐끔 바라보았다.
‘한창 진행되고 있군. 반나절이 채 지나기도 전에 완성되겠어.’
화옥의 기운이 들어왔다. 그래서 예상보다 완성이 빠른 것이다.
‘역천신주가 만들어지기 전에 이자를 손에 넣는 것이 좋겠지.’
그때, 사문향이 말했다.
“적흠.”
“예, 교주님.”
“나는 연호정 저놈의 마음을 보았다.”
적흠의 눈이 번뜩였다.
‘심검동조를 말하는가.’
무공이 아닌 술법으로 극사의 경지에 도달한 그였다. 심검을 깨치진 못했지만, 심검동조로 두 사람이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은 알았다.
사문향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놈은 혈교의 마지막 소교주 천인룡의 제자다. 황룡제의 직계 제자란 말이다.”
“예.”
“혈교의 유일신에 가장 적합한 자가 혈교를 배신하고 우리를 불살랐다. 나는 당시의 그를 기억하고 있어. 그는 진실로 무적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무력을 쥔 자였다.”
“…….”
“저놈 역시 소교주와 같다. 아니…….”
“…….”
“소교주보다 더 무섭다.”
“……!”
“소교주의 발끝에도 이르지 못한 재능으로 벌써 저와 같은 경지에 올랐다. 하늘의 선택을 받았느니 운명이 점지했느니 따위의 말도 필요치 않아.”
온몸을 부르르 떨던 사문향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천리를 발아래 두려던 사신의 얼굴은 어디로 갔는지, 하늘마저 두려워하게 된 ‘인간 사문향’이 거기에 있었다.
“저놈은 그저 그래야만 한다는 광적인 집착만으로 신선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
“……하하.”
사문향은 덜덜 떨면서도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
“재미있지 않으냐? 욕망과 집착은 마(魔)의 본질이다. 만약 저놈이 혈교에서 태어났다면, 어쩌면 소교주를 뛰어넘는 진정한 마신(魔神)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를 성장케 해 준 자들은 많았지만, 그 자신의 욕망과 집착이 없었다면 절대 지금과 같은 경지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사문향은 하늘의 뜻이니 운명이니 하는 걸로 연호정을 평가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정말 천의와 운명이 함께한다면, 그것 역시도 연호정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결과일 것이다.
‘이런 고평가는 들어 본 적이 없군.’
세상 어떤 천재도 사문향에게 있어선 탐나는 먹잇감이요, 유희거리일 뿐이다. 한데 연호정이라는 자에 대해서만큼은 극찬을 하고 있었다.
순간 적흠은 묘한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바로 질투였다. 사문향을 증오하면서도 그가 얼마나 대단한 위업을 달성한 자인지 아는 적흠에게 있어, 연호정에 대한 유례없는 고평가는 인정하기 쉽지 않은 것이었다.
적흠은 마음을 숨기며 말했다.
“푹 쉬십시오.”
사문향이 고개를 저었다. 공포가 사라지지 않았는지 천천히 올린 손이 여전히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쉴 수가 없다.”
“…….”
“소교주에게도 이런 두려움을 가진 적은 없었어. 세상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던 나다. 그런 내가 놈에게 압도당했다. 공포를 느끼고 있어.”
“…….”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영음산으로 돌아가고 싶을 정도다.”
적흠은 짜증이 솟는 것을 느꼈다.
약한 소리를 하는 거야 제 마음이지만, 어울리지 않는 소리를 해 대니 듣기가 싫었다. 정 그러고 싶다면 당장 영음산으로 꺼지는 게 어떠냐며 쏘아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적흠은 참았다.
참고 또 참았다.
놈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버티다가 이내 놈을 잡아먹고 새 시대의 신이 되려고 노력해 왔던 세월이 얼마인가. 고작 짜증이 나는 정도로 그간의 노력을 수포로 돌릴 수는 없었다.
다만, 차마 사문향을 내려다볼 수도 없었다. 진짜로 욕설을 뱉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적흠은 고개를 돌려 저 먼 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멍하니 입을 벌린 채 하늘을 보던 사문향의 두 눈이 천천히 적흠에게로 옮겨 갔다.
“…….”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
적흠은 손바닥에 조금씩 땀이 차는 것을 느꼈다.
‘뭐지?’
어쩐지 등줄기가 시큰시큰하다.
멀쩡히 서 있기가 힘든 기분이었다. 체력과 공력이 여전한데도 그러했다.
왜인지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느낌이랄까. 귀 뒤쪽이 뜨거워진다. 목이 갑갑해지며 기침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 든다.
문득 적흠은 깨달았다.
‘긴장?’
그렇다. 그는 긴장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의 의식이 아닌 몸이 긴장하고 있었다.
무간동을 빠져나와 처음으로 사문향을 알현했을 때와 비슷했다. 수천 마리의 마귀가 몸을 관통하는 느낌,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치솟았다.
‘왜……?’
그때, 목덜미에서 뜨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적흠.”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언제일까? 움직이는 소리를 듣지도 못했는데 어느새 사문향이 자신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사문향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담담했다. 지금껏 보여 주던 두려움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적흠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숨소리가 그를 긴장케 했다.
“……말씀하십시오.”
“목소리가 떨리는구나.”
“……!”
“저놈과 심검동조를 하며, 나는 저 녀석의 과거를 볼 수 있었다.”
“…….”
“저놈은 과거에 나와 만난 적이 있어. 혈옥의 기적으로 시간을 거슬러 되돌아온 놈이기 때문이다.”
“……!!”
“싸울 때는 정신이 없었는데, 이렇게 쉬면서 마음을 가라앉혀 보니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떠올랐다.”
적흠은 또 한 번 침을 삼켰다.
“그게 무엇입니까?”
“저놈이 과거에 싸웠던 나는 지금보다 약했다. 더 먼 시대인데도 그러했어.”
“…….”
“왜 그랬을까?”
적흠은 천천히 주먹을 말아 쥐었다.
힘을 주지 않고선 손이 부르르 떨릴 것 같았다. 마치 사문향처럼.
“모르겠습니다.”
“그래?”
“……예.”
“정녕 모르겠단 말이지?”
“저는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심검동조를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건 그렇지.”
목소리 끝에 옅은 웃음이 밴 듯하다.
천하에서 가장 독한 독사가 혓바닥으로 목덜미를 핥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적흠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몸을 통제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거대한 손이 어깨를 짚자 적흠은 움찔했다.
“내 생에 나보다 더 나은 인재는 네가 처음이다. 정확히는, 나에 필적할 만한 재능을 타고난 녀석은 너 이외에 본 적이 없었다.”
“…….”
“너는 나와 닮았어. 지독하리만치.”
“…….”
“만약 말이다, 만약 내가 너였다면 어땠을까?”
“……!”
“내 머릿속에 들어온 녀석들도 그렇게나 날뛰었는데, 그놈들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너라면……?”
그 순간, 적흠은 움직였다.
파박! 콰아앙!
혼신의 힘을 다한 회전으로 휘두른 수도(手刀) 극사도가 사문향의 목 앞에서 폭음을 일으켰다.
적흠의 눈이 부릅떠졌다.
어느새 손목이 잡혔다. 사문향이 뱀처럼 섬뜩한 눈으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역시나 좋다.”
사문향의 눈과 코, 입에서 피가 주르르 흘렀다. 극사도를 막은 여파로 내상을 입은 것이다.
하지만 그는 죽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를 보며, 적흠은 온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멋진 작품을 만들었어. 어설픈 일격만으로도 이만한 충격을 주다니, 새 옷으로서 부족함이 없다.”
“이익!”
큼직한 손이 적흠의 머리를 덮었다. 적흠은 그것을 막을 수 없었다.
사문향의 얼굴에 쭉 찢어진 웃음이 새겨졌다.
“최고로 맛있을 때 먹겠다고 마냥 아껴 두면 안 된다는 걸, 저놈과의 싸움 덕에 알았다.”
“안 돼!!”
후우우우웅!!
적흠의 두 눈이 하얗게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