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340)
흑백무제 1340화(1339/1351)
1340화. 천안(天眼)의 개화 (6)
모용군은 자신이 환상을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이 환상이 찰나와 같다는 것도 알았다. 찰나지만 영원과 같고, 영원임을 인식하는 순간 끝나 버리지만 또 달리 생각하면 이렇게나 긴 시간이 없다는 것을.
모순과 모순, 인지와 상실이 뒤죽박죽되었다.
세상이 무너지고 있었다.
번쩍!
어두운 하늘에서 수천 개의 벼락이 쳤다.
어떤 것은 내리꽂혔고, 어떤 것은 저들끼리 합쳐지고 나뉘길 반복하면서 구름을 누볐다.
그런 와중에도 하늘은 무너지고 있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광경은, 직접 보고 있으면서도 표현할 길이 마땅치 않았다.
그리고 무너지기 시작한 하늘의 틈새 사이로 눈이 멀어 버릴 듯한 섬광이 번뜩였다.
‘묘한 광경이군.’
두 번 보기 힘든 장관임에도 모용군은 침착하다 못해 무심하기까지 한 스스로를 자각했다.
놀라우면서도 아무런 감동이 없다. 정말이지 기묘한 상태였다.
와중에 하나 아는 게 있었다.
‘저건 나구나.’
무너지는 하늘.
하늘은 곧 자신이었다.
‘나는 나를 누구보다도 드높다고 생각했지.’
자존심 하나만큼은 천하제일이라고 자부하며 살아온 세월이었다. 남들 눈에도 그리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새인가? 그는 자신의 자존심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모습에 별다른 미련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놀랐다.
‘충분히 망가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멀었던 게지. 저렇게나 깊고 광활한데.’
모용군은 선명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계속 무너지고 있는데도 아직 일 할도 채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중요한 건 무너지고 있는 상황 그 자체다. 지금 당장 모든 걸 내려놓겠다는 건 자만이었다.
한참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던 모용군은 천천히 몸을 숙였다.
조각나 떨어지는 하늘의 파편은 액체와 고체가 뒤섞인 듯한 묘한 것이었다. 모용군은 파편 하나를 주워 들었다.
그 순간, 파편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모용군의 얼굴에 씁쓸함이 어렸다.
‘허무하구나.’
자존심이란 게 이처럼 덧없는 것이다. 적어도 자신의 하늘은 그러했다.
‘이리 쉽게 흩어져 버릴 것을 나는 평생 가슴에 담아 두고 살았단 말인가.’
비로소 모용군은 깨달았다.
‘나는 이미 무극에 오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심(心), 기(氣), 체(體)는 물론 혼(魂)까지도 완벽하게 제련되어 있었다.
무극에 오를 준비는 진즉에 끝났다. 과거 무림맹에서 폐관에 든 그때, 공공대사를 상대로 승리를 거머쥐었던 그때 이미 무극으로 향하는 길이 열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무극에 오르지 못했다.
‘정신과 육체, 진기는 연마되어 있었지만 지금껏 오르지 못했다.’
모용군은 탄식했다.
‘아니, 오르지 않았다.’
자신의 세상에서 무너지는 하늘을, 자존심을 보는 순간.
모용군은 자신의 무의식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괴물이 되고 싶지 않았어.’
진기의 밀도가 올라가고 평범한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경지에 오르면 자연스럽게 무의식도 더 깊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고수의 발전이 어렵다. 끝없이 깊어지는 자신의 무의식을 매번 들여다봐야 하니까. 깨달음의 순간순간이 내가 모르는 나 자신과의 투쟁이거늘, 강해질수록 더 강한 상대와 싸워야 하니 발전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모용군은 폐관 후, 인생 최악의 상대와 싸우고 있었다.
무의식이라는 이름의 난적과.
‘이대로 무극을 열어 봤자 남들만도 못해. 오히려 스스로 망가질 것이다. 내 무의식은 그걸 깨달은 거야.’
남처럼 말하지만 결국 내가 나 스스로 망가질 것을 알고 있기에 끊임없이 무극지도(無極之道)에서 눈을 돌린 것이다. 욕망은 하늘에 닿았으되 욕망 너머의 세상을 본 내가 끝없이 포기한 것이다.
만약 모용군의 욕망이 무의식을 뒤덮을 정도로 무시무시했다면, 그는 이미 무극에 올랐을 것이다.
‘다행이구나.’
모용군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무의식을 깨달은 순간, 하늘은 두 배나 더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무너진 하늘 너머에서 새어 나오는 섬광도 더 밝고 선명해졌다.
‘다행이야. 내가 날 볼 수 있어서.’
더 빨리 강해질 수도 있었다.
과거였다면 그 사실을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아쉬움에 집착했을 것이고, 점점 괴물이 되어 갔을 것이다.
이제는 아니다.
모용군은 폐관 때 인생을 되돌아본 경험이 자신의 삶에 무시무시한 영향을 끼쳤음을 알았다. 그러한 과정이 없었다면 상무 연합과 함께하지 않고 이용만 해 먹었을 것이다.
삼교 놈들의 공격에도 내 밥그릇 싸움에 열을 올렸을 것이고, 내 권력을 빼앗아 가는 놈들을 기어이 처단하여 큰 혼란을 일으켰을 것이다. 오히려 삼교 놈들보다 더 극심한 악적이 되었을 거란 말이다.
그 ‘만약’의 순간을 상상해 보니 소름이 끼쳤다.
그는 누구보다도 삼교를 증오했다. 외적이 중원을 탐욕스럽게 노려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미칠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이 그의 선조 때부터 이어진 자격지심에 가까운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모용군은 지금, 그것을 깨달았다.
‘그놈들은 나와 같다.’
내 땅, 내가 다스려야 할 세상을 넘보고 있다는 것에 크게 분노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삼교의 탐욕에서 나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무림과 하등 상관이 없는 자들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죽여 버릴 수 있는 독심. 정복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철저한 이기심.
모용군은 삼교를 거울 삼아 스스로를 증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나는 나를 알았다.’
모든 번뇌를 보았고, 모든 마음을 느꼈다.
‘나는 자격이 있다.’
오만이 아니었다. 자만이 아니었다.
모용군은 지금 이 순간, 스스로를 명확히 보았다.
‘자격이 있음을 알았기에 이 정도로도 충분해.’
이 영역에서 더 오래 생각하고 싶다. 더 오래 깨닫고 싶다.
그럼 저 하늘을 다 무너트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더 많은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용군은 여기까지가 좋다고 생각했다.
더 많이 얻어 봤자 제어하지 못하는 힘은 결국 폭주로 이어지는 법이었다. 스스로를 정확히 보았기에, 지금 이 정도가 자신이 다룰 수 있는 힘의 정량임을 확신했다.
더 이상 욕심부리지 않으리라.
더 이상 번뇌 앞에 흐려지지 않으리라.
더 이상 나 자신을 불신하지 않으리라.
더 이상 광기로 스스로를 잃지 않으리라.
‘더 이상은.’
모용군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검에 집착하지 않으리라.’
평생 검을 연마해 왔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을 깨달아 버렸다.
이제 그에게 검은 필요치 않다. 아니, 언젠가는 필요한 순간이 있을지 몰라도 더 이상 집착할 필요는 없었다.
처음 검을 쥘 땐 불세출의 경지를 꿈꾸며 중원 무림의 단 하나뿐인 검신(劍神)이 되려 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저 빛이야말로 내가 나아갈 곳이며 나다운 힘이다.’
모용군은 검을 던졌다.
하늘 높이 날아오른 검이 부서진 하늘 너머로 빨려 들어갔다.
그 안에 빛과 검이 공존했다.
‘이제 가자.’
하늘이 삼 할이나 무너졌다.
만족스러운 성과 앞에 모용군은 눈을 감았다.
그러자 세상이 돌변했다.
* * *
번쩍!
모용군의 몸에서 청색의 전광이 이글거렸다.
명활의 눈이 무섭게 흔들렸다.
‘이것은?!’
순간적으로 밀도를 올린 뇌기가 모용군의 미간과 명치, 그리고 배꼽 아래를 수천 번 오가며 힘의 총량을 올리고 있었다.
‘극사!!’
파지지지지직!!
무섭게 폭증하는 뇌기가 대지를 시커멓게 물들였다.
사방팔방으로 치닫는 뇌기는 통제되지 않는 힘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달랐다. 모용군은 하늘을 열고 더 많은 힘, 더 막강한 뇌기를 손에 넣을 수도 있었지만 그래 봤자 자신이 다룰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뇌기는 곧 탁기와 같다.
부여받지 않은 힘, 미련을 버린 힘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위이이이잉!
시퍼런 광채로 물든 모용군의 두 눈은 실로 전설상의 뇌신(雷神)을 방불케 했다.
명활이 소리쳤다.
“이놈!”
부우우웅!!
허공을 가르는 대도에 상상을 초월하는 힘이 깃든다.
혼신의 힘을 다해 찍어 내리는 태산압정의 초식이었다. 그 안에 명활의 내공과 상단신기가 어우러져, 기존 무공의 위력을 밑도 끝도 없이 끌어올리고 있었다.
‘강하구나.’
모용군의 위압감 넘치는 눈은 대도를 휘감은 시뻘건 힘을 전부 보고 있었다.
내력의 힘, 그리고 그 위를 덮고 있는 영혼의 힘.
서로 다른 두 개의 힘이 미친 듯이 얽히고설켜 극단적인 경력을 생성하고 있었다. 이 경지에 오르기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힘의 실체가 거기에 있었다.
‘정면 승부로 감당할 만한 상대가 아니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용군은 담담했다.
빛의 힘이, 욕망을 제어하는 깨달음이 그와 함께하고 있었다.
‘이길 수 없는 상대다. 하지만…….’
모용군의 좌수가 또 한 번 앞으로 내밀어졌다.
‘지지 않을 자신은 있다.’
쿠르릉!
어둑한 하늘에서 한 줄기 벼락이 떨어졌다.
번쩍!
섬광이 된 벼락이 그의 상단전에 거미줄 같은 뇌광을 일으켰다.
훅!
뻗어 나간 뇌기가 명활의 대도에 서린 상단신기를 한 가닥, 한 가닥 엄청난 속도로 해체했다.
대도가 대지를 갈랐다.
콰앙!
강력한 위력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모용군은 땅에 박힌 대도 반 치 뒤에 서 있었다.
명활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너?!”
모용군이 검을 휘둘렀다.
형식은 검법이었지만, 그 안에는 무(武)의 정수가 깃들어 있었다. 권법 같기도 하고 도법 같기도 한 ‘휘두름’ 안에 궁극의 뇌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명활은 서둘러 대도를 뽑아 마주 휘둘렀다.
콰앙!
무자비한 위력이었다.
미친 듯이 뒤로 밀려 나간 명활은 저도 모르게 이빨을 딱딱거렸다. 해소되지 않은 뇌기가 피부를 타고 들어와 근육에 이상을 일으킨 것이다.
‘이런 미친!’
눈앞이 번쩍였다.
힘으로 밀린 게 아니었다. 힘의 성질 차이로 인해 반격을 당한 것이다.
훅!
과연 명활은 대단했다.
느닷없이 무극을 깨달은 상대, 그 상대에게 치욕스러운 일격을 먹었다. 놀라기도 했고 분노도 치밀었다. 그러나 그 분노로 인해 투로가 파탄 나지는 않았다.
화아아아악!
더 막강하게 휘둘러지는 대도.
상단신기를 있는 대로 끌어올려, 모용군이 회피할 수 있는 모든 방위에 영력의 창살을 내리꽂는다. 피하지 말고 한판 붙자는, 참으로 명활다운 일격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모용군이 검을 놓았다.
퍼퍼퍼퍼펑!!
허공을 가른 검이 창살처럼 둘러쳐진 영력을 모조리 파괴했다.
뇌신의 어검술, 무정천뢰식의 뇌신강림(雷神降臨)이었다.
콰쾅!
사방 천지를 박살 낸 대도 일격이 참으로 매섭다.
그러나 어느새 모용군은 대도 옆에 서 있었다. 일대가 다 박살 나고 허물어졌는데, 모용군이 있는 자리만 멀쩡했다.
“말하지 않았나. 내려오라고.”
모용군의 손이 대도에 닿았다.
파지지지지직!
보이지 않는 무형의 뇌기가 명활의 영력을 해체하여 잔해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그 잔해를 뿌리까지 끌어 내렸다.
명활의 얼굴에 당황이 어렸다.
상단전을 운용하며 영력이 타인의 손에 휘둘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한데 이놈 앞에서는 어쩐지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영력, 상단신기란 혼의 힘이다. 내 영력을 상대가 억압할 수는 있어도, 해체하여 흩어 버릴 수는 없다.
지금 모용군은 바로 그런 짓을 한 것이다.
상단전에 비중을 크게 둔 무극수일수록, 모용군의 존재는 더 강하고 치명적인 천적이 될 것이다.
“이기기는 힘들지만 지지도 않아.”
모용군이 주먹을 들었다.
“앞으로는 그리 살아도 괜찮겠네.”
번쩍! 쾅!
섬광처럼 뻗어 나간 주먹에 맞은 명활이 십여 장 밖으로 날아갔다.